소설리스트

395화 (395/521)

이 요정은 기어이 제 인간이 수치사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구나. 마치 B급 영화의 예고편처럼 진행되는 환상 속에서, 카델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역시 카델 님이셔! 한 방에 적군을 몰살하시는군!”

“이게 다 카델 님의 어마어마한 마법에, 적룡의 힘이 합쳐졌기 때문이지!”

“우리가 힘들게 적들을 막아 낸 보람이 있어!”

승리는 우리 인간의 것이다!

어느 허접한 캠페인의 구호처럼 어색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 환상 속의 카델은 적룡을 타고 아주 손쉽게 적들을 도륙했다. 적룡의 브레스와 뒤섞인 화염 마력이 대지를 불태우고 아군을 보호했다.

일방적인 전투였다. 계속해서 밀리는 형국이던 아군은 오로지 카델과 적룡의 힘에만 의지해 승기를 되찾았다. 그야말로 일사천리. 진짜 전쟁에서는 이루어질 리 없는, 너무도 수월한 승리였다.

그 행복한 장면 속에서, 회의장의 전원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지금 자신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적군의 기습을 염려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눈앞의 장면이 가진 목적은 분명했다.

모든 적이 사망한 마계. 적룡과 함께 대지로 내려온 카델은, 무수한 선망의 시선을 받으며 근엄하게 외쳤다.

“모두 제 의견을 믿고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승리는 전부 여러분의 믿음 덕입니다!”

차라리 귀를 떼어 내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외침을 끝으로, 모두를 둘러싸고 있던 환상이 차츰 옅어졌다. 흐려지는 배경 너머로 본래의 성내가 비쳤다.

전장의 소음이 사라진 회의장엔 지독한 침묵이 찾아왔다. 시장통처럼 요란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터무니 없는 사건을 되새기기 바빠 보였다.

상황 파악은 빠르게 끝났다. 눈치 좋은 단장들은 곧 이 사태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차렸고, 모두의 시선이 차례차례 카델을 향했다.

‘……죽고 싶다.’

서러운 욕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옆에 선 루멘조차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했다. 두 남성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저기……. 음, 이건, 그러니까…….”

더 부끄러워질 일이 남은 줄 알았더라면 환상이 시작되자마자 자수해야 했다. 늦어도 한참은 늦은 후회와 함께, 카델은 죽을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전술부터 들어 보시는 건 어떤가요?”

⚔️

결과적으로, 카델은 몇 가지 조건을 내걸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성공했다. 카델이 입을 염과 동시에 쏟아졌던 무수한 비난을 엑토와 모리톨, 모들렌의 노력으로 상쇄한 덕이었다.

그렇다고 카델이 부단장 이외의 부하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적린 기사단은 회의 중반 무렵 쫓겨나듯 섬을 떠나야 했다. 회담의 조항을 어긴 데에 대한 처분은 추후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제국으로 돌아가는 선박 안.

“왜 자꾸 때리는 거야, 자기! 등 아파! 날개가 떨어지면 책임질 거야?”

“안 때리게 생겼냐? 넌 진짜……!”

“화내지 마! 기껏 도와줬더니!”

“도와주긴 뭘 도와줘!”

카델은 회의장 바깥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타났던 라이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널찍한 등을 수차례 후려쳤다. 아무리 때려도 울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한편, 당연히 자신 덕에 카델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요정. 라이돈은 카델의 분노와 루멘의 냉대, 쏟아지는 폭력이 억울하기만 했다.

“인간들이 말을 안 들어줄까 봐 걱정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내가 말보다 확실한 환상을 보여 줬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카델은 말 한 번 제대로 못 꺼냈을걸?”

“그 쪽팔리는 환상이 도움이냐? 어? 차라리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가. 혼자 얌전히 있으랬더니 기어이 사고를 쳐!”

“아악! 때리지 마! 너무해, 카델! 못됐어!”

억울함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며 라이돈을 구박하던 카델은, 선실로 찾아온 루멘의 방문에 그제야 제 성질을 다스렸다.

“이거 받아, 대장. 소린 경이 보냈어.”

“소린 경이?”

소린과는 섬에 도착한 후 말 한마디 제대로 섞지 못했다. 하지만 환상이 끝난 직후 그가 보낸 한심한 눈초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루멘이 건넨 쪽지를 받은 카델이 한숨과 함께 안쪽의 글을 읽었다.

“……아직 회의가 진행 중인 모양이네. 대략 정해진 전술들을 적어 줬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진행 내용을 전달해 주겠다고 하네.”

“불행 중 다행이군.”

이것은 아마 엑토의 배려일 것이다. 그는 카델이 겪은 끔찍한 재앙을 호탕한 웃음으로 넘겨 버렸으니. 자신을 경멸하던 모리톨과는 달리 최대한 도움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카델은 쪽지에 적힌 전술들을 정독하며 대강의 토대를 잡았다. 그의 전술을 들은 단장들이 강조했던 조건은 적룡의 힘을 모으는 동안 단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이었으니. 부하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쨌든 큰 산은 하나 넘었어.’

최소한의 대비책은 마련해 두었다. 남은 일은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동원해 시스템을 격파하는 것. 그 대업을 이루기 전, 쿤라와도 마지막 점검을 해 두어야 했다.

⚔️

고요의 산맥.

어두운 공동 안. 뜨거운 열기가 내부를 채우고, 흘러넘친 기운이 대지를 흔들었다. 튀어 오르는 불꽃은 드문드문 내부의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그 중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정좌를 틀고 앉은 쿤라가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에선 끊임없이 식은땀이 흘렀고, 달싹이는 입술 새로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흘러나왔다.

쿤라는 제 기운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깊은 심연 너머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키고 싶은가?]

광활하게 펼쳐진 피의 바다. 선홍색을 머금은 하늘과 공간을 통째로 일그러뜨린 균열. 자신은 흉측하게 변해 버린 풍경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입에서는 선혈이 흘렀고, 만신창이가 된 몸은 볼품없이 후들거렸으며, 늘어진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느릿느릿 고개를 들자, 긴 머리칼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은 맞은편.

[너는 패배했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가?]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쿤라는 직감적으로 저것이 놈의 본체가 아님을 느꼈다. 녀석에게는 ‘본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보이고 싶은 대로 형태를 바꿀 뿐.

[대답하라, 작은 세계의 나약한 신이여. 너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길 바라는가?]

자신의 모습을 한 그것은 계속해서 물었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쿤라로서는 상당히 짜증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환상인지 과거인지 모를 장면 속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다.”

그러자 ‘그것’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그것’의 웃음소리는 낮았고, 피로 얼룩진 공간을 크게 울렸다. 소름 끼칠 만큼 붉은 하늘과 잡초 하나 자라지 못한 공허한 대지, 그 위를 흠뻑 적신 주인 모를 피.

사방을 가득 채운 절망의 공기는 ‘그것’의 즐거움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참을 웃어 대던 ‘그것’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영혼을 내게 바쳐라. 나는 네 세계의 영혼을 탐닉하고, 나의 것들이 이 세계의 고통을 향유하게 할 것이다.]

“…….”

[그러니 너는 모든 기억을 버리고, 내가, 그리고 나의 것들이 네 세계를 누리는 것을 도와라. 그리한다면 너의 패배를 눈감아 주겠다.]

이야기를 듣던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없이 치욕스럽다는 듯, 꽉 깨문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그것’은 대답 없이 꿇어앉은 자신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자신을 깔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녕 지키고 싶은가?]

그것은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후엔 더 이상의 제안도, 기회도 없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형형하던 눈동자에 빛이 사라지고, 꼿꼿하던 고개에서 힘이 풀렸다.

자신은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무력함만이 맴도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지키고 싶다.”

짧은 대답과 동시에, ‘그것’이 자신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불시에 눈앞이 점멸되며 어둠이 찾아왔다.

퍼뜩 눈을 뜬 쿤라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깜빡이는 눈꺼풀을 타고 땀이 흘렀다. 힘을 준 전신에 오한이 들었고, 이젠 한 몸처럼 느껴지는 두통이 머리를 댕댕 울렸다.

한참을 멈춰 있던 그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내가 지키려던 것은…….”

홀린 듯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맥없이 고꾸라졌다.

‘왜 계속 반응이 없지?’

제국에 도착한 이후, 카델은 곧장 별채의 숙소로 이동해 쿤라를 불러내려 했다. 섬에서 내쫓긴 것에 대한 황제의 호출도 전부 무시한 채 쿤라와의 대화를 일 순위로 둔 것이다.

하지만 쿤라는 카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찾아가 한탄 같은 잔소리를 듣고, 남아 있던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깊었다. 이렇게 늦은 밤이라면 아무리 바쁘대도 조금은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불러 보았으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야?”

처음 쿤라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이후엔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찾아왔고. 이번에도 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용 대가리 걱정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이란 건 알고 있지만…….’

적룡이라고 모든 위협에서 안전할 순 없다. 쿤라가 도망치듯 떠났던 날, 카델은 그 사실을 절감했다.

‘또 혼자 끙끙 앓다가 다 끝난 뒤에 나타날 셈인가.’

그런 게 아니라면 왜 부름에 답하지 않느냔 말이다. 고작 만남만으로 시스템이 제약을 걸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스템은 내내 그들의 만남을 방관해 왔으니, 이제 와 시스템의 제약을 걱정해 거리를 둔다는 것도 이상했다.

“……안 되겠어.”

지금은 쿤라가 직접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결심한 카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제에게 회의가 끝나기 전까진 자숙의 의미로 성을 떠나지 말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런 데 일일이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몰래 움직이는 게 낫겠지.’

카델은 방바닥에 이동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마지막으로 쿤라를 불러 본 그는,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마법진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하여튼, 은근히 귀찮게 한단 말이야.’

솟구치는 섬광과 함께, 눈을 감은 카델이 짧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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