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3화 (393/521)

아침 일찍 기사단의 상태를 점검한 후, 식당에서 포장한 음식을 가지고 수련장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보고받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몸을 단련하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의 일정을 욱여넣은 모리톨만의 루틴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반이 투입된다.

“……?”

천시 기사단의 수련장에 들어선 모리톨이 작게 인상을 구겼다. 보통 단장들에겐 기사단용 수련장 이외에도 개별 수련장이 존재했지만, 모리톨은 단원들과 같은 수련장을 사용했다. 그들의 훈련을 가까이서 돕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전시 중인 만큼 한창 뜨거워야 할 수련장이 어수선한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련을 미뤄 둔 채 잡담이라도 하는 중인가.

괘씸함을 느끼며 내부를 들여다본 모리톨의 입가가 움찔 떨렸다. 그곳에는 수련장의 외곽을 둥글게 둘러싼 부하들과, 그 중심에서 홀로 대검을 휘두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다들 어찌나 중앙의 사내에게 집중했는지, 단장이 도착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모리톨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단원 한 명을 불러세웠다.

“데노릭.”

“엇, 단장님! 안녕하십니까!”

“다들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듯한데. 이 귀한 시간에 팔을 놀려 가며 뭘 하는 거지? 정찰 중인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도 않나?”

“아, 저, 그게…….”

단장의 폭풍 같은 잔소리에 한껏 주눅이 든 데노릭은, 쭈뼛거리며 수련장의 중앙을 가리켰다.

“적린 기사단의 반 헤르도스가 저희 수련장을 찾아와서, 저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뭡니까.”

“……뭐?”

“근처에만 가도 오라를 방출해 버리는 탓에, 어느새 다들 외곽까지 밀려났습니다. 자리가 불편하니 수련도 흐지부지되고, 그게 불만이었던 동료들이 대결을 신청했다가 참패해서……. 다들 구경만 하고 있는 겁니다.”

참패. 그 단어를 들은 모리톨의 턱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단장의 낯빛에 데노릭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 아니다. 천시 기사단은 승리를 위해 불나방처럼 몸을 날리는 무식한 기사단이 아니야.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능률을 뽑는 것. 그게 내 기사단의 좌우명이 아니었나.’

그러니 단순 대결에서 참패했다고 단원을 몰아붙일 순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적린 기사단의 기사가 왜 여기서 수련을 하는 거지?”

“그쪽 수련장에 사고가 일어나서 천장이 무너졌답니다. 복구하는 데만 며칠이 걸린대요. 그동안 다른 기사단의 수련장을 공유해도 좋다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다 하고요.”

“황제 폐하의……?”

폐하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잠시 생각하던 모리톨이 이내 부하들을 헤치며 수련장의 중앙으로 빠져나왔다. 뒤늦게 단장을 발견한 단원들이 서둘러 길을 터 주며 깍듯이 인사하자, 그 요란한 움직임을 눈치챈 반이 건성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리톨은 자신을 향한 반의 삐딱한 시선을 받아 내며 손 관절을 뚝뚝 꺾었다. 아침에도 그랬지만, 적린 기사단의 기사들은 루멘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시 기사단의 단장, 모리톨 아낙입니다. 경은 적린 기사단의 광전사, 반 헤르도스. 맞지요?”

반은 모리톨을 위아래로 슬쩍 훑어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점이 미친 듯이 모리톨의 심기를 거슬렀으나, 그는 연장자답게 인내했다.

“그쪽 수련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탓에 황제 폐하가 아량을 베풀어, 타 기사단의 수련장을 공유하라 명하셨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아무리 지금은 성내에 따로 공간을 내어 줄 여유가 없고, 적린 기사단이 인원 적은 소수 정예래도. 모리톨은 황제도 인정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범위 내에 있기를 바라는 사내. 그런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수련장을 공유하라 명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제가 왜 이런 수련장에서 땀을 빼고 있겠습니까?”

“……이런 수련장?”

모리톨이 싸늘하게 되묻자, 반은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훔쳐 내며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예. 인원은 더럽게 많은 주제에 제대로 된 훈련 상대 하나 만나기도 어려운, 이런 수련장.”

“……무례하군요. 건방지기도 하고요.”

“어쩌겠습니까. 태생이 천한 놈인걸.”

수련장 내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숨을 죽일 만큼, 모리톨의 분노는 살벌한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되레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그럼 제가 더는 건방 떨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대검을 고쳐 쥔 반이 모리톨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그를 대련 상대로 지목한 것이다. 그에 단원들은 물론, 당사자인 모리톨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음…….”

모리톨 정도라면 성에 차는 수련 상대가 되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도발한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너무 간 거겠지.’

반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애초에 루멘이 단장의 고통을 들먹이며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구더기 같은 귀족 무리 틈에 끼어 검을 휘두를 일은 없었다.

“황제가 허락한 적도 없는 수련장 공유를 핑계 삼아 침입해야 해. 그 정도 똥배짱을 가진 녀석으로는 네가 가장 적합하지. 그러니 가서 모리톨 아낙의 성질을 시원하게 긁어 주고 와라.”

자신이 왜 귀족 도련님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여환의 목적 달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데.

‘모리톨의 성질을 긁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해. 더 나갔다간 쓸데없는 혼란만 일으켜서 단장을 귀찮게 만들겠지.’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한 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검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아닙니다. 괜한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진 않네요. 나중에 아무 상관 없는 단장에게 뒷말이 얹어지는 것도 싫고.”

“이미 트러블은 잔뜩 일으킨 것 같은데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더 볼 것도 없으니 이만 가 보죠. 수련장 잘 썼습니다.”

“……이대로 떠나시겠다?”

남의 수련장에 와서 물을 흐려 놓는 걸로도 모자라, 우두머리의 권위에까지 도전했다. 그래 놓고는 혼자 손을 털고 가 버리겠다고?

황당해진 모리톨이 무어라 일갈하려 했으나, 반은 듣는 척도 안 하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수련장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거침없이 밀어젖히는 괴팍함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모리톨은, 점점 멀어지는 반의 뒷모습과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단원들을 담아내며 어떻게든 끓는 속을 다스리려 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인 데다, 언행은 무례했지만 실질적으로 문제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면 이쪽만 속 좁은 인간이 되겠지. ……카델 단장. 진심으로 이렇게 나오겠다는 겁니까.’

그의 부하들은 본인들의 만행에 카델의 입김은 작용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걸 순순히 믿을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치졸하고, 수준이 떨어진다. 단합해도 모자랄 시기에 상대의 정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제 의견을 강요하겠다는 것인가. 극에 달한 반발심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다, 단장님…….”

모리톨은 걱정하며 다가오는 단원들을 단호하게 물리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도발에 일일이 휘둘리는 녀석은 없겠지. 수련을 재개해라.”

“네, 넵!”

⚔️

차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한껏 땀을 뺀 뒤, 정갈한 몸으로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그다음에는 대대장들을 모아 하루치 성과를 전해 듣고, 잠이 들기 직전까지 서류 작업을 처리하는 것이 모리톨의 일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모리톨은 갖은 방해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시작은 목욕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암살자의 습격이었다.

“아, 잘못 들어왔어. 여긴 네 방이었구나.”

“어디 있는 거지? 목소리만 내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카델 방인 줄 알았거든.”

“또 적린 기사단의 기사……?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그 소문 무성한 암살자인 듯하군요.”

“걱정하지 마. 남의 맨몸을 보는 취미는 없어. 볼 수도 없고.”

“……사람을 부르기 전에 어서 나가십시오.”

방을 잘못 찾았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꺼내든 암살자는, 아무리 나가라고 역정을 내도 끝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며 목욕을 방해했다. 참다못해 사람을 불러도 소용없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목소리를 내는 암살자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결국 그는 모리톨 아낙이 미쳐 버렸다는 오해를 피하고자 목욕이 끝날 때까지 암살자의 살인법을 묵묵히 경청해야 했다.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식사하니 속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 이후 이어진 대대장들과의 모임. 그곳에선 웬 흑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이번에 아깝게 부단장의 자리를 놓치게 돼서 말입니다. 천시 기사단 정도 되는 집단의 대대장들은 어떻게 행동하나, 참고하러 와 봤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사단의 회의를 방해하겠다는 겁니까?”

“어차피 저흰 경쟁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타 기사단의 방식을 보고 배워 둔다면, 전쟁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혹시 저의 신분이 신경 쓰이는 거라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비록 전쟁 중에 세기도 힘들 만큼 무수한 아군의 목숨을 살렸지만, 여전히 과거의 오점이 신경 쓰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차별 익숙합…….”

“알겠으니 그만 말하시죠.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들어도 좋습니다.”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괜찮다는 말을 어떻게 들은 것인지. 흑마법사는 대대장이 몇 마디를 꺼내는 즉시 온갖 첨언을 갖다 붙이며 참견해 댔다. 그에 짜증이 나 저지하려 들면, 자신이 살린 천시 기사단원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를 세기도 힘들다면서 어떻게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인지.

결국 기가 쪽 빨린 대대장들이 도망치듯 해산하고. 모리톨은 제가 한마디 하기도 전에 떠나 버린 흑마법사의 빈자리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제 서류 작성 시간에는 누굴 보낼 작정입니까……? 남은 부하는 루멘 경이죠. 그자를 보낼 겁니까? 아니면 본인이 직접? 어쩌면 적룡을 보낼지도 모르죠.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모든 일과를 철저하게 망친 모리톨의 눈에서 분노가 번들거렸다. 자신의 일과를 방해하는 마지막 기사가 도착한다면, 더 이상은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인내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까분다면 주제를 알게 해 주는 수밖에.

그리 다짐한 모리톨이었으나.

“오지 않아……?”

모리톨의 취침 시간인 12시가 지나서도, 집무실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방문자를 기다리느라 업무도 처리하지 못했건만. 그는 그저 세 시간 동안 사방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이를 갈아 댄 바보가 된 것이다.

“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온종일 방해꾼들에게 시달린 탓에 그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신경 쓰였다. 이대로 다음 날을 맞이한대도 하루를 불안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책상 위의 서류를 거칠게 구겨 버린 그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왜 당신의 의견이 고려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조목조목 따져 주죠.”

그가 주장한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절절히 일깨워 주리라. 모리톨은 이성의 끝자락을 붙든 채 머릿속 깊숙이 처박아 뒀던 카델의 의견을 끄집어냈다.

한 번의 정중한 거절로는 모자란다면, 전술을 철저히 짓밟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 빈 종이를 꺼내 든 모리톨의 눈이 투지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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