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2화 (39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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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재수 없어! 무슨 사람이 그렇게까지 재수가 없냐? 아니, 그냥 인간의 감정이란 게 없는 건가?”

“진정해, 대장.”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어린 사람의 어린 생각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으니, 시간 낭비할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하라고? 늙어서 좋겠네! 아주 부러워 죽겠어!”

식당을 빠져나와 성으로 돌아가는 길. 분통을 이기지 못한 카델은 씩씩거리며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걷어차기 바빴다. 그런 카델의 옆에서, 루멘은 대장의 사회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카델을 뒤에서 끌어안듯 잡아당긴 그가 성난 동물을 달래듯 차분하게 속삭였다.

“어디에 천시 기사단이 있을지 몰라. 모리톨 아낙의 설득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면, 밖에선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아.”

“……열 받아.”

“나도 그래. 그 녀석이 대장에게 막말할 때는,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베어 버리고 싶었으니까. 아마 반이나 라이돈이었다면 진즉에 칼부림이 났을걸.”

루멘의 말을 따라 반이나 라이돈이 합석한 장면을 상상하자, 순식간에 분이 가라앉으며 묘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은 카델이 루멘의 가슴에 기대듯 서서 투덜거렸다.

“나도 이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의견이란 건 알아. 하지만 가능성 정도는 한번 고려해 볼 만하잖아? 그런데 설명을 다 듣지도 않고 가 버리다니. 먹인 밥이 아까워.”

“원래 그런 사람이야. 사소한 전투에서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단장이라고 하니. 대규모 전쟁이면 말할 것도 없겠지. 도박을 하느니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인드일 거야.”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냐. 감도 안 잡힌다.”

“설득은 두 번째고, 우선 대장의 의견을 제대로 마주 보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의아하게 되묻는 카델에게, 루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런 류의 인간들은 자기 일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미쳐 버리거든. 제정신을 유지하고 싶다면 대장 의견을 제대로 고려해 봐야 할 거야.”

어차피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동원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모리톨 경을 들볶는 수밖에.

산뜻하게 말하는 루멘에게선, 희미한 광기 같은 것이 비치고 있었다.

모리톨 아낙의 일상에 침범하여 그의 고집이 꺾일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기는 것. 그것이 루멘의 계획이었다.

전시 중임을 감안하더라도 모리톨의 일과는 매우 빡빡했다. 그 모든 일정을 일일이 방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인원이 필요했기에, 루멘은 동료들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모리톨 경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식사하고, 한 시간 정도 산책을 겸한 정찰을 돌면서 문제가 생긴 곳을 점검해. 라이돈, 너는 그 시간 동안 모리톨 경의 곁을 맴돌면서 네 특기를 발휘해라.”

라이돈은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하품 섞인 대꾸를 했다.

“내 특기라면…… 예쁘기?”

“짜증 나게 굴기. 그걸 해.”

“흐응, 그건 루멘 특기 아니야?”

“시간이 없어. 곧 모리톨 경의 단골 식당이 문을 열 거다.”

라이돈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면서도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루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루멘의 말에 의하면, 그 모리톨 아낙이란 인간이 카델을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그 괘씸한 작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졸려. 피곤해. 하아, 그냥 카델이랑 오후까지 자 버리고 싶다.”

라이돈은 카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을 떠올리며 설렁설렁 식당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부터 운영하는 스튜 전문점이었다. 곧 쓰러질 듯 생기 없던 몸짓은, 가게 안에서부터 풍겨 오는 고소한 향에 조금씩 힘이 붙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순식간에 직원과 요리사의 시선이 쏠렸다. 난데없는 거대 요정의 등장에 접시에 코를 박고 스튜를 흡입 중이던 손님들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라이돈은 그들의 관심을 태연하게 무시하며 단숨에 인간 한 명을 찾아냈다.

루멘이 말했던 인상착의와 똑같은 남자. 그는 라이돈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시금치 스튜에 부지런히 빵을 적시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라이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걸로 줘. 맛없으면 전부 얼려 버릴 거야.”

“예? 저, 전부 얼려 버린다니 그게 무슨…….”

“제일 달고 맛있는 걸로 달라는 소리야. 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인간이 제일 싫어. 귀찮네, 정말.”

라이돈은 자연스럽게 진상을 부리며 모리톨의 맞은편으로 다가갔다. 테이블에 드리운 기다란 그림자에 그제야 모리톨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떡하니 자리한 요정의 모습을 본 모리톨의 표정이 뒤늦게 움직였다.

“……적린 기사단의 라이돈 경이군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여러모로 들은 바가 많은지라. 우연히 같은 식당에서 만나게 됐군요. 그럼 즐거운 식사…….”

“기분 나빠라.”

“……?”

라이돈의 발언에 모리톨의 눈썹이 들썩였다. 빤한 시선을 마주하던 그가 짧은 들숨과 함께 스푼을 내려 두었다.

“기분이 나쁘다니. 무슨 의미죠?”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기분 나빠. 기억했더라도 함부로 뱉지 마. 내 소중한 이름은 우리 자기만 부를 수 있거든.”

“……우리 자기.”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앞뒤 없이 시비를 걸다니. 매일 아침, 따뜻한 스튜와 함께 시작하는 상쾌한 하루에 이물질이 섞여 들었다.

모리톨은 이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눈앞의 요정을 떨쳐 낼까 했으나, 불만을 드러낸다고 순순히 사라져 줄 것 같진 않았다. 때문에 그는 무시를 택했다. 머리에 나사 빠진 자들은 진지하게 상대해 봤자 상대한 사람만 바보가 되는 법이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죠. 별 뜻은 없었습니다.”

모리톨은 이대로 라이돈이 제자리를 찾아가 식사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제국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우리 자기’로 추정되는 라이돈의 상관 역시 같은 위치에 있었으니. 여기서 자신을 더 긁어 대 봤자 카델만 곤란해질 뿐이다.

하지만 이 요정은, 소문보다도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여긴 제 자리입니다만.”

“그걸 질문이라고 해? 합석하는 거잖아.”

“남은 자리가 많습니다.”

“난 여기가 좋아.”

라이돈은 당당하게 모리톨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쳐다볼 작정인지, 황당하다는 듯 응시하는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뻔뻔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대체 부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소속이 다르더라도 같은 제국의 기사라면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법이다. 동료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따끔하게 일러 준다면 갱생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모리톨은 적린 기사단과 그다지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피곤해지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자리를 피하도록 하죠.”

모리톨은 먹던 그릇을 들어 바로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라이돈도 태연하게 자리를 옮겨 다시 모리톨과 마주 앉았다.

“…….”

“뭘 그렇게 봐? 잘생긴 건 아니까, 굳이 새삼스럽게 알려 주지 않아도 돼.”

“식사는 혼자 하는 게 편합니다. 자리를 비켜 주시죠.”

“싫어.”

“싫……!”

어이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모리톨은 훅 차오르는 성질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턱에 힘을 주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자인지.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저렇게까지 안하무인일 수가 있는가.

잠시 마음을 다스리듯 눈을 감고 숨을 고른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카델 경이 시키던가요? 본인 의견을 지지해 준다고 말할 때까지 절 괴롭히라고. 그 정도로 바닥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최소한의 기대치에도 못 미치는 분인가 봅니다.”

“흐응, 한 마디만 더 해 봐. 다시는 입을 못 열게 해 줄 테니까.”

“……지금 본인의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는 있습니까?”

“위험한 건 내 발언이 아니라 네 목숨이야.”

생글거리며 웃고 있음에도 분명한 살기가 느껴진다. 너무도 확실한 적의라 황당해질 지경이었다. 동료 기사단의 단장을 이토록 당당하게 협박하다니.

모리톨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라이돈이 주문한 스튜가 나왔다. 스튜를 한 입 맛본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주방장에게 아무렇지 않게 엄지를 들어 올려 주었다.

“……당신 같은 부하를 둔 카델 경을 생각해 한 번은 봐드리죠. 대신 두 번은 없을 겁니다.”

현재 라이돈의 태도는 큰 문제로 번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단장들의 전략 회의를 앞두고 있었으며, 라이돈의 존재는 분명 전쟁에서 도움이 될 테니. 당장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분풀이를 위한 것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리톨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자신이 한발 물러서, 경고 수준으로 끝내는 쪽을 택했다. 물론, 라이돈은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스튜에만 몰입할 뿐이었다.

예정에도 없던 겸상을 빠르게 끝낸 뒤에는, 새벽 사이 벌어진 사건들을 점검하기 위해 관문 바깥을 순찰했다.

평소였다면 밤샘을 한 기사들이 피로한 낯짝으로 절도 있는 인사를 해 왔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평소처럼 인사를 하려다가도, 반사적으로 모리톨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하! 뭘 봐? 계속 쳐다보면 눈알을 얼려 버릴 거야. 못생긴 인간한테 시선을 받아 봤자 전혀 기쁘지 않거든!”

바로 모리톨의 머리 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요정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모리톨은 근엄하게 단원들을 돌아보며 라이돈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식당에서부터 따라붙은 요정에게는 저리 가라는 말도, 이번이 마지막 경고라는 말도 먹히질 않았으니. 당장 카델을 찾아가 담판을 지을 것이 아니라면, 무시밖에 답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모리톨 단장님!”

“그래. 어젯밤엔 관문을 습격한 고블린의 수가 많았다고 하던데. 부상자는 없나?”

“크게 다친 기사는 없습니다. 고블린도 전부 처리했고요.”

“수고가 많군. 고블린 발생지의…….”

모리톨이 기사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 볼라치면.

“너 여기 흰머리가 났어. 금발에 섞여서 잘 안 보인 거야? 아니면 설마 멋으로 놔둔 건가? 그런 거라면 구리니까 그만둬.”

“고블린 발생지의…….”

“내가 뽑아 줄까? 아니, 관둘래. 더러워.”

“……발생지의 위치는?”

“짜증 나네! 위에서 보니까 계속 거슬리잖아! 알려 줄 테니까 네가 직접 뽑아.”

그는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단장의 권위마저 깎아내리는 잡담을 쉴 새 없이 쏟아 냈다. 자신이 요정의 말을 무시한다고 단원들까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평소와 같은 정찰은 거의 불가능하다 볼 수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모리톨이 단원들이 없는 곳으로 빠져나와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할 작정이죠?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카델 경이 직접 오라고 하십쇼.”

“카델은 상관없는 일인데?”

“뭐라고요?”

“난 그냥 심심해서 널 쫓아다니는 것뿐이야. 한창 심심할 때 마침 네가 보여서.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근데 이제 질렸어. 갈게.”

루멘이 고지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은 라이돈은, 망설임 없이 모리톨을 버리고 떠났다. 그에 한창 분개하던 모리톨이 허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요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한마디 해야겠군.”

이렇게 사사롭고 구차한 괴롭힘으로 자신이 그의 터무니없는 의견에 동조하리라 생각한다면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그의 의견을 정면으로 깔아뭉개고 싶다는 의욕마저 타올랐다.

모리톨은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으며, 다시 단원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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