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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론 섬으로의 출항까지 앞으로 9일. 카델은 루멘과 외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단추 한두 개 정도는 더 풀어도 돼.”
루멘은 잔뜩 긴장한 카델의 표정을 일별하며 목 끝까지 잠근 단추를 건드렸다. 그에 카델이 머뭇거리며 단추를 끌렀다.
“그래도 내 편에 서 달라고 부탁하러 가는 길인데. 격식을 차리는 게 낫지 않나?”
“엑토 경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엑토 경이라면 대장의 편안한 모습을 더 선호할 거야.”
“그런가…….”
현재 그들의 목적은 엑토 엔티를 카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가 회의에서 카델의 의견을 지지하며 힘을 보태게 만드는 것이었다. 테이론 섬에 모일 기사단장들은 대부분이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월을 싸워 온 노장이다. 개인의 힘만으론 의견에 무게를 싣기 어려웠다.
아군을 많이 모을수록 회의에서의 비중도 높아진다.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아, 엑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막중했다.
“너무 굳어 있진 마. 가장 중요한 건 대장이 어떻게 보일지가 아니라, 엑토 경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니까. 대장이 주장하려는 전술을 처음 들었을 때, 나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거든.”
“적룡의 힘을 끌어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라고 했잖아. 그전까지 내 힘을 사용하는 데도 제약이 생겨서, 최대한 후반부에 몰아치는 게…….”
“알고 있어. 다만, 적룡의 힘이 마계에서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태잖아. 그런데도 대장 정도의, 그것도 마법사의 전력을 아예 제외해 둔다는 건 큰 모험이니까.”
정확한 이유를 밝힐 수 없어 대충 둘러댄 변명이니,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허술한 변명을 가지고 제국의 단장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울상은 말고, 평소처럼 해. 설득하는 거, 그거 대장 특기잖아.”
루멘은 굳어 있는 카델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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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 이게 얼마 만이오! 못 본 새 업적이 더 늘어났더군!”
“오랜만입니다, 엑토 경.”
엑토와의 만남은 민가와 붙어 있는 어느 소박한 주점에서 이루어졌다. 엑토의 취향을 고려한 루멘의 선택으로, 그는 처음 주점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좋다며 칭찬을 쏟아 내기 바빴다.
한 테이블에 뭉쳐 앉은 그들은 곧장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내가 루멘 도미닉 경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군. 오늘 카델 경과 동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소.”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하하! 적린 기사단의 쾌검사, 루멘 도미닉을 모를 리가 없지. 내 아들놈도 제법 빠른 편이라고 여겼는데, 경의 검술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지 않소.”
“과찬이십니다. 엑토 경의 아드님이라면, 드레프 경을 말씀하시는 거죠? 드레프 경의 검술은 상당한 기술력을 요하지 않습니까. 쌍검술에 속도까지 갖추다니,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겠어요.”
“……그런가?”
“그럼요. 물론 천부적인 재능도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엑토 경의 핏줄이니, 재능은 이미 충분히 갖춘 거나 마찬가지고요. 재능이 넘치면 자만하기 쉬운 법인데, 노력까지 하니 앞으로의 성장세가 기대됩니다.”
“하긴! 내 아들놈이 겉으로는 틱틱거려도, 제법 노력파요. 크하하!”
루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며 엑토의 기분을 끌어 올렸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치켜세우고, 끊임없이 관심사를 던지며 흥을 돋웠다.
‘이럴 때 보면 진짜 귀족 같다니까.’
그들의 옆에서 대충 맞장구를 치던 카델이 생각했다. 고고한 외모에 우아한 미소를 달고,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 가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다른 단원들이었다면 보기 힘들었을 장면이긴 했다.
세 남자는 주문한 술과 음식을 즐기며, 서로의 개인사나 과거의 전투, 시답잖은 고민거리를 나눴다. 그렇게 한창 취기가 올라 긴장이 완전히 풀어졌을 무렵. 루멘이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전략 회의 말입니다. 호계 기사단 측에서는 소린 살라모 경이 부단장으로 동행하신다죠?”
“아아, 그렇소. 소린 말고는 부단장을 할 만한 녀석이 없어. 적린 기사단의 부단장은 루멘 경이겠지?”
“물론입니다. 여기서도 절 제외하면 부단장의 재목이 없어서요.”
“크하하! 얼굴로 정한 건 아니고? 뭐, 그쪽 기사단이야 하나같이 얼굴이 번지르르하니. 얼굴로 정했대도 치열했겠어.”
“얼굴로 정했다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이번 회의에서 단장의 의견 피력을 돕기 위해 뽑혔죠.”
루멘이 술잔을 채워 주며 말하자, 술을 받아 마신 엑토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벌써 생각해 둔 전술이 있는 모양이오?”
“예. 회의 날짜가 오기만을 벼르고 있더군요. 엑토 경께선 염두에 둔 전술이 없으십니까?”
“그런 회의는 뭘 생각해 뒀다 해도 그대로 꺼내 놓기가 어렵소. 싸움꾼들의 자리이니, 회의장이 개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거든. 그자들이 근엄한 척 굴어 봤자, 조금만 자극당하면 금세 전투 본능이 튀어나오지. 그런 부분에서 카델 경의 침착함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소.”
자연스럽게 엑토의 시선이 카델에게로 움직였다. 그에 대충 술을 마시는 척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카델은, 한껏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침착하다기보단 생각이 많아 반응이 느릴 뿐입니다. 지금도 계속 제 전술에 보강할 점은 없는지, 정말 이게 최선인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니까요.”
“같이 술을 마시면서 그런 재미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오?”
“하하……. 글쎄요. 정말 재미없는 생각인지 아닌지,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흐음…….”
카델의 전술을 들은 뒤, 엑토는 한참이나 말없이 턱을 문질렀다. 좋아하는 술도 내려 둔 지 오래였다. 카델은 엑토의 침묵에 애를 태우며 애꿎은 손끝만 꾹꾹 눌러 댔고, 루멘은 테이블 아래서 그런 카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을 감싸는 온기에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루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엑토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감싼 온기에는 점점 힘이 더해져, 카델은 조금씩 긴장감을 내려 두게 되었다.
엑토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부족한 점을 보완해 다시 설득해 보면 된다. 그래도 안 된다면 곧장 다음 타깃을 노리러 이동해야겠지. 마음 졸인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평정을 찾아 가는 카델의 앞에서, 엑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소. 나도 그 전술에 탑승해 보지.”
“분명 도박성 강한 모험이긴 하지만, 저에게만큼은 확신이 있습니다. 의견에 힘을 보태 주시기만 하면…….”
“대장, 수락하셨어. 더 설득하지 않아도 돼.”
루멘은 엑토의 수락에도 조건 반사처럼 떠들어 대는 카델의 입을 막으며 기품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 단장님의 전술은 언제나 그랬듯,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무조건 성공하리라 여겼던 술책도 보란 듯이 실패하는 법이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모든 가능성, 모든 경우의 수를 셈하려 애쓰오. 카델 경의 그 도박 같은 전술을 지지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오.”
엑토에게 전술이란, 성공 확률이 비교적 높은 것과 낮은 것으로 분류될 뿐이다. 카델이 말한 전술은 확실히 도박성이 짙어 위태롭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을 보완해 줄 만한 전술은 얼마든지 있었고, 만약 카델이 적룡의 힘을 효과적으로 끌어온다면. 승리의 확률은 대폭 증가하게 될 테다.
카델의 전술은 일종의 히든카드. 그 카드를 지키기 위해선 약간의 희생이 필요할 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안정성만 추구하는 것은 엑토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전쟁에서 안정성이라니, 그보다 바보 같은 소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경의 부하들까지 참전을 미뤄서는 안 될 거요. 제국의 정예 기사단이 초반 전투에서 통째로 제외된다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단장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요. 경도 단장이니 알겠지만, 결국 제 사람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 않소.”
단장이란 자신의 단원들을 지휘하고 통솔하며, 동시에 지켜야 하는 자. 한 기사단의 애매한 전술을 위해 자기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 전술을 따를 자는 없을 것이다.
카델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전체가 힘을 비축하지는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으니.
이렇게 엑토의 설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음 타깃은 제국의 또 다른 기사단. 천시 기사단의 단장, 모리톨 아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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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톨과는 약속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국방에 힘써야 할 때 사사로운 만남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루멘은 심란해하는 카델에게 모리톨과의 점심 약속을 따냈음을 당당히 알렸다.
“이런 레스토랑엔 기사단끼리도 와 본 적이 없는데.”
“그 시끄러운 녀석들을 데리고 어떻게 이런 곳에 오겠어.”
카델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연신 감탄을 뱉었다. 사방에 화려한 장식과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이 가득해서, 식당이 아니라 어느 귀족의 성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모두와 함께 오고 싶을 만큼 화려한 곳이었으나, 정작 좋아할 만한 인물은 없을 것 같아 금세 생각을 거뒀다.
“먼저 도착해 계셨군요. 오는 길에 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 온다는 게 제시간보다 살짝 늦어 버렸습니다.”
쫙 넘긴 금발 머리에 차분하다 못해 무감각해 보이는 표정,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옷차림. 모리톨은 그 등장만으로 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약속 시간을 딱 맞추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죠.”
카델은 최대한 살가운 태도를 보이려 애썼다.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자신을 지지해 달라 졸라 대야 했으니. 너그럽게 굴어야 했다.
하지만 모리톨은 카델에게 별다른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 음식을 먹는 내내. 모리톨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딱 한 번이었고, 그마저도 카델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1개월간 신입 기사의 훈련을 봐 주기로 한 약속, 잊지 않으셨겠죠?”
모리톨의 말에 심각하게 관자구이를 썰던 카델이 퍼뜩 놀라 루멘을 바라보았다. 신입 기사의 훈련이라니. 설마 이 자리는 루멘의 시간과 정성을 팔아 마련된 것이었나.
루멘은 충격으로 물든 카델을 뒤로한 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쟁 준비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이라면, 오늘 당장에라도 시작하죠.”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신다고 했으니, 섬에서 돌아오는 대로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좋습니다.”
루멘에게 약속을 확인받은 뒤에는, 침묵과 함께하는 식사가 이어질 뿐이었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까지 철옹성 같냐.’
모리톨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카델도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의 화제를 꺼내는 족족 모리톨은 단답으로 일관했다. 심할 때는 대답 대신 눈짓으로 끝내기도 했다.
이번에는 루멘의 도움도 바랄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미리 모리톨의 성향을 파악해 둔 그가 했던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리톨 경은 침착하고 보수적이지. 자존심도 세다고 해. 나와의 거래 때문에 약속을 잡긴 했지만, 기사 한 명에게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기는 싫을 거야. 이쪽과의 관계를 진척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을 테니, 나는 최대한 말을 삼가도록 할게. 이번에는 단장이 알아서 분위기를 풀어 보도록 해.”
까다로운 성격이란 건 알았지만, 그와의 대화에선 한 톨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진 몰라도, 모리톨에겐 자신의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황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꼬웠나.’
보수적인 사내라고 하니, 황제에게 격식 없이 할 말을 전부 해 대는, 그의 기준에선 풋내기에 불과한 기사단장이 아니꼽게 느껴졌을 법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소중한 단원이 자신의 시간을 버려 가면서까지 얻어 낸 기회. 설득에 성공한다면, 제국에서 모을 수 있는 강력한 아군은 전부 모은 것이나 다름없다.
의지를 다잡은 카델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사사로운 만남도, 잡담도 즐기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이번 전략 회의에서 절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법 용기를 낸 발언에 모리톨은 낮은 한숨을 쉬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카델을 향한 시선에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피로한 기색마저 비쳤다.
“지지를 바란다면 본인의 의견과 입장부터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로 자신감이 떨어지는 반응이다. 하지만 카델은 그 심드렁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섰다. 설득은 자신감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자신의 허접한 전술을 입에 쑤셔 넣어 주리라.
다짐한 그가 호기롭게 자신의 전술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