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0화 (3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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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축 늘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그녀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혼탁한 눈동자는 제 앞에 꿇어앉은 수십의 마족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마계로 내려온 인간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 한때 우리의 터전이었던 이 어둡고 축축한 공간은, 곧 그들의 지옥이 될 것입니다.”

가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에선 오만한 마족을 찍어 누르는 묘한 위압감이 존재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토를 달거나, 감히 고개를 치켜들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피어오르는 칠흑의 마기. 마왕의 혈육임을 증명하는 그 짙은 마기가 그들의 오만함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에밀리아는 자신이 쥔 권력의 힘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녀는 목청을 높이는 일 없이,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쳐 버릴 만큼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이 마계로 내려온다면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필승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아주 사소한 패착의 여지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을 모은 겁니다.”

가녀린 다리가 여유롭게 움직이며, 꿇어앉은 마족들 사이를 사뿐히 지났다. 그녀는 자신 앞에 수그린 머리통을 하나하나 살피며 다정하게 말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드세요. 그들의 전력을, 의지를, 사기를, 기력을, 철저히 빼앗으세요. 여러분을 희생하세요. 죽음으로 옭아매세요. 그리하면 우리의 동족이, 여러분의 영혼이. 푸른 하늘을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소 짓는 아름다운 얼굴 위로 섬뜩한 야심이 스쳤다. 마족에게 자유를, 자신에겐 세계의 정상에 군림할, 결코 부서지지 않을 왕좌를. 만물을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짓밟아야 할 종족.

기필코 승리하리라. 마족들의 우렁찬 대답 속에서, 그녀의 입꼬리가 음험하게 비틀렸다.

지독하게 길었던 노고 끝에, 인간계는 마계로의 이동 포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례적인 업적이었고, 역사에 기록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화로운 축하연이나 마법사들을 치하하는 후한 보상의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것은 승리한 이후, 평화로운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각국의 정상은 일명 ‘징벌의 문’을 완성한 직후, 기사들의 전략 회의를 위한 장소를 선별했다. 각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참가하는 회의였기에 규모보다는 그 위치에 주목했다. 반나절간의 토론 끝에, 장소는 첫 정상 회담이 이루어졌던 ‘테이론 섬’이 되었다.

열흘 뒤, 기사들은 테이론 섬의 고탑에서 전략 회의를 진행하게 된다. 오스마 제국에서는 총 세 개의 기사단이 참석하게 되었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 엑토 엔티와 부단장 역할의 소린 살라모. 천시 기사단의 단장, 모리톨 아낙과 부단장 역할의 샘 홉킨스.

모두가 수월하게 참석 인원을 정했으나, 적린 기사단은 아니었다. 적린 기사단의 단장은 당연히 카델이니, 문제는 부단장이었다. 이번 회의에서 단장은 필수적으로 본인을 보좌할 부단장을 대동해야 했다.

그러나 카델은 단 한 번도 적린 기사단의 부단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본인이 이 기사단의 부단장이라 여기며 살아온 것이다. 때문에 카델이 이 사실을 전달했을 때, 그들은 곧장 심각한 토론에 돌입했다.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 통째로 빌려 온 주점 안. 커다란 테이블 앞에 둘러앉은 단원들은,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반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부단장은 당연히 나지. 나는 용병단 시절부터 단장의 곁을 지켰다고. 가장 오랫동안 단장과 알고 지낸 건 나야. 누구보다 단장을 잘 알고 있는 것도 나고. 단장이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나보다 더 잘 알아채고 보좌해 줄 놈이 있나? 너희같이 둔해 빠진 놈들은 단장을 보살필 수 없어. 날 대체해서 부단장이 될 만한 놈은 더더욱 없고.”

단장과 가장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누구보다 충직하게 옆을 지킬 수 있는 자. 그런 자야말로 부단장의 재목이 아니던가. 반은 이견을 내는 녀석은 찢어 죽이겠다는 기세로 흉흉하게 눈을 부라렸다. 물론 이곳에 그의 협박에 기가 죽을 사내는 없었다.

“부단장이 함께한 시간과 정만으로 정해지는 자리던가? 애초에 이번 전략 회의에 참석하는 부단장은 보좌뿐만 아니라 회의에서도 활약할 수 있어야 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꼰 루멘이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여기 타 기사들과 잘 어우러지면서 자기 의견을 불쾌하지 않게 피력할 수 있는 사람? 정체를 숨기느라 소심하게 움츠러들거나, 귀족이 싫거나, 아예 인간 자체가 별로인 사람은 빠져. 남은 사람끼리 겨뤄 보자고.”

부단장으로서의 전투력은 물론 뛰어난 처세술까지 갖췄다. 이 사회 부적응자들의 모임 속에서 타인과의 교류는 항상 자신의 몫이었다. 낯가리는 고양이처럼 굴어 대는 사내들을 대신해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치우지 않았는가. 루멘은 슬슬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설득력 있는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여 줄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진짜 부단장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단장은 부단장이 어떤 일을 처리해 줄 때 가장 편안하고 든든한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저뿐일 텐데요?”

가르엘은 벌써 일곱 잔째인 술을 시원스럽게 들이켜며 쾌활하게 웃었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황혼 기사단을 이끌면서 부단장인 모들렌을 얼마나 막 대해 왔는지 아시나요? 여러분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제가 모들렌에게 얼마나 사소한 잡일까지 떠넘겼는지, 그래서 제가 얼마나 편안한 단장 생활을 누려 왔는지!”

“그건 자랑이 아닐 텐데요.”

“전 모들렌만큼, 아니, 모들렌보다도 더 꼼꼼하고 확실하게 단장님을 모실 준비가 됐습니다. 단장이었던 과거를 바탕으로 유용한 조언도 해 드릴 수 있죠. 회의에 참석할 다른 기사들의 정보에도 빠삭하니, 회의를 유리한 방향으로 구슬리기도 편할 겁니다.”

지금까지 왕국 대표 성기사단의 단장으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그 기간 동안 쌓아 온 여러 노하우를 바탕으로, 카델의 피로도를 최소한으로 줄여 줄 자신이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긴 회의에 피곤해한다면, 바로 옆에서 치유술도 사용해 줄 수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부단장.

가르엘은 자신이야말로 카델의 옆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러한 믿음은 이곳의 모두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었다.

“이번 회의는 마계 침투 방식을 논하는 자리라고 들었는데.”

모두의 떠들썩한 발언을 묵묵히 경청하던 요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나보다 습격에 능한 자는 없어. 은밀하게 적진에 침투하는 건, 전 대륙의 기사를 모아 봐도 내가 최고지. 그런 내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회의에 참석해야 해. 말로는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 직접 증명도 해 줘야 하고.”

회의에 필요한 핵심적인 전술 지식을 대량 보유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요젠은 마계 침입에 자신의 능력이 필요할 것임을 자신했고, 그 능력을 카델의 곁에서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 봤자, 가장 활용도 높은 이는 자신이었다. 겸사겸사 회의 시간에 카델의 심기를 거스르는 놈을 찾아가 직접 경고해 줄 수도 있으니.

이렇듯 단원들은 각자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격한 토론을 이어 갔다. 정작 중요한 카델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 이미 한참 전에 그들의 거친 토론의 장에서 밀려난 카델은, 안주로 나온 생선구이를 야무지게 뜯으며 모두의 말에 공감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그 역시 누가 부단장에 어울리는지 이성적으로 가려내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렇게 안주에만 집중하며 단원들의 주장을 배경음 삼던 카델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라이돈?”

“응?”

카델의 부름에 한입 가득 사과 절임을 욱여넣던 라이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는 라이돈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넌 부단장이 되고 싶지 않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라이돈이라면 가장 먼저 자신이야말로 부단장의 재목이라며 날뛸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아 토론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라 예상했건만. 그는 부단장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카델의 의아한 물음에, 사과 절임을 야무지게 씹어 넘긴 그가 답했다.

“부단장은 귀찮아. 인간들 회의에 따라가서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

“난 그런 귀찮은 일 안 하고 그냥 카델 옆에 있을 거야.”

“부단장까지만 테이론 섬에 대동할 수 있어. 다른 단원들은 제국에 남게 될 텐데?”

“흐응, 누구 마음대로? 작게 변하면 어차피 찾아내지도 못해. 어떻게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기.”

라이돈은 처음부터 동행 조건을 무시하고 함께 테이론 섬으로 떠날 계획이었던 듯했다. 상식에 얽매이는 인간들이나 열심히 부단장 자리를 꿰차기 위해 분투 중인 것이다.

‘……하긴. 쟤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들었다고.’

어차피 라이돈의 말대로, 작은 요정의 모습이라면 발견될 위험은 낮다. 만약 오지 못하게 저지한대도 꾸역꾸역 따라올 게 분명했으니.

‘다른 애들만 불쌍하게 됐네.’

뒤늦게 라이돈을 발견하고 맥이 빠질 미래의 부단장을 상상한 카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부단장은 나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무식하게 소리 지르는 것부터 탈락이다. 부단장은 나야.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걸.”

“아뇨,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만. 부단장은 저죠. 저보다 부단장의 자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 성가시게 굴지 마.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절해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순히 양보해.”

반과 루멘, 가르엘과 요젠. 이 네 남자의 부단장 쟁탈전은 카델과 라이돈이 목 끝까지 안주를 밀어 넣고도 무려 세 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심지어는 끝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결국 결투로 승부를 내자는 의견이 나오자 보다 못한 카델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단장이 직접 부단장을 지목한다면 모두 순순히 승복할 것이다. 하지만 카델은 그 이후에 부단장이 되지 못한 부하들이 보일 서운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공정한 방법으로 부단장을 가려내기로 했다.

“자, 뽑아. 끝이 불탄 포크를 뽑은 사람이 부단장인 거야.”

라이돈은 부단장 자리를 포기했으므로, 포크의 수는 네 개. 카델은 심각한 표정의 네 남자 앞으로 포크를 내밀었다.

“암기 사용은 금지야, 요젠.”

“……나한테만 페널티를 주지 마.”

“공평성을 위한 거거든.”

여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들이 꼼꼼히 포크를 훑어냈다. 사실상 이번 회의가 끝내면 흐지부지 사라질 부단장의 자리건만. 카델은 쓸데없이 심각한 부하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거다!”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손을 뻗은 네 남자가, 각기 다른 포크를 뽑아 들었다.

“믿을 수 없어……. 어째서 저런 놈이…….”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태어난 것부터 행운과는 동떨어진 삶이라는 걸. 받아들여야죠.”

“……착하게 살아온 걸 다행으로 여겨. 그 덕에 오늘 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거니까.”

반, 가르엘, 요젠. 세 남자는 멀쩡한 나무 포크를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쥔 채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어딜 봐도 타들어 간 흔적이 없으니, 볼수록 우울해지기만 했다.

반면, 끝이 새까맣게 불탄 포크의 주인. 루멘 도미닉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포크를 테이블 위로 내려 두었다.

“뭐, 예상하고 있었어. 하늘도 알고 있는 거지. 이곳에서 부단장을 할 만한 인물은 나뿐이라는걸.”

그저 1/4의 확률에 당첨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루멘은 신의 점지를 받은 영웅이라도 된 양 한껏 으스대며 패배자들을 업신여겼다.

이대로 놔둔다면 빈정이 상한 단원들이 난동을 피울 것이 분명하다. 미래를 내다본 카델은 루멘이 이 이상 거만하게 굴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

“다들 왜 그렇게 부단장 자리에 집착하는진 모르겠지만, 루멘. 마냥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전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단의 우두머리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기사단을 이끌어 온 시간은 물론, 나이에서부터 상대가 안 되는 사람들 천지겠지. 그 사이에서 우리의 의견을 피력해야 해.”

마치 부장급 임원들이 모인 회의에 몇 번 운 좋게 활약한 덕으로 끼게 된 1년 차 신입 사원의 위치랄까. 어쨌든, 이쪽의 의견이 제대로 들어먹히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스토리에서는 어떻게 진행됐을지 몰라도, 여기선 무조건 우리의 뜻대로 밀고 나가야 해.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마계로의 침입 후, 전투와 탐색을 병행해야 했다. 심지어 탐색에는 단원들을 대동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마왕 후계자의 생존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겠지. 애초에 전력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전쟁 속에서 단원들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도박은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쟁에만 집중한 뒤,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움직이기도 애매하다. 승전을 인지한 시스템이 특전을 지급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승전을 판단한 직후 특전을 지급하게 된다면. 또 다른 마왕 후계자의 유무를 파악할 기회가 사라진다.

때문에 카델은 적린 기사단의 활약을 전쟁 후반부로 미뤄 둘 생각이었다. 초반에는 선두 기사단을 지원하는 식으로 힘을 아끼다, 탐색이 끝나는 즉시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는 느낌이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단장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밀어붙여야겠지.’

카델의 바람은 전쟁의 흐름만 설설 살피며 힘을 비축해 두다, 막판에 가서 모두의 희생을 발판 삼아 영웅의 타이틀을 움켜쥐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막타충은 나도 싫어한다고. 하지만 모두의 안녕을 위해서니까.’

과연 쟁쟁한 기사단장들 사이에서 이러한 얌체 같은 전술이 받아들여질까. 막막함을 느끼는 카델의 앞에서, 임시 부단장이 된 루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회의에서 모든 걸 담판 지으려 하지 마. 원래 이런 건 물밑 작업이 중요한 거거든.”

“물밑 작업……?”

“일단 단장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힘 있는 아군을 모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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