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7화 (387/521)

*

‘지금쯤 저녁 식사 중이려나.’

동료들이 성으로 떠난 뒤, 거의 반나절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살아온 기간에 비하면 떠난 시간은 지극히 짧기만 할 텐데. 돌아온 화이트 왕국은, 가르엘에게 끊임없이 과거의 향수를 불어넣었다.

한때 사랑했던, 목숨 바쳐 지켰던 왕국에서 전쟁의 상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에 씁쓸함을 느끼고, 더는 고향을 위해 싸울 수 없음을 아쉬워하다, 문득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카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향을 떠나게 된 아쉬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이전의 삶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나 집착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그의 자리는 적린 기사단. 그곳을 이끄는 카델 라이토스의 옆이었으니.

“……꽤 많이 고쳐 뒀네.”

한참을 방황하던 가르엘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목적지는 바스킨 마을. 과거, 에르고라는 마족을 끝장내기 위해 카델이 대마법을 시전했던 장소였다. 그 여파로 황무지가 되었었는데, 근 1년 만에 돌아온 마을은 그럭저럭 사람 사는 곳처럼 보였다.

줄지어 늘어선 집에선 미미한 불빛이 비쳤다. 굴뚝을 타고 나오는 연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로 보아, 다들 각자의 집에서 식사 중인 듯했다.

‘무사히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던 거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그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의식을 잃은 주민들을 치유하는 일뿐이었다. 카델이 없었다면, 정체를 숨기는 데 급급해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을 테지.

과거의 한심했던 자신의 태도가 누군가의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았기를. 그것을 확인하고자 찾아온 마을이었건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그리 생각한 가르엘이 발길을 돌리려던 때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가까운 곳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이는, 다름 아닌 카델이었다. 지금쯤 국왕과의 만찬이 한창이리라 예상했건만. 당혹스러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델의 곁에는 한 명의 사내와 어린아이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자, 잠시만요, 모들렌 경.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피넷, 너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카델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가르엘에게 달려갔다. 빠르게 그의 몸을 돌려세운 카델이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숙소에서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

“계속 숙소에 있기엔 답답하니까요……. 그러는 단장님이야말로 왜 단원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있는 겁니까?”

“버리긴 뭘 버려. 난 저기 뒤에, 피넷이라는 꼬마를 만나러 온 거라고.”

피넷은 바스킨 마을에서 카델이 처음으로 발견한 생존자였다. 아이와는 마을을 위험에서 구해 준 뒤, 다시 화이트 왕국을 찾아오겠노라 약속했던 바 있다. 그 약속을 기억한 카델이 식사 도중 모들렌에게 피넷의 위치를 물었고, 다닐라 국왕이 급한 업무로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가르엘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질렀다. 타이밍이 이렇게까지 좋지 않을 일인가.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차피 중요한 일로 온 것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된 거니, 제가 자리를 뜨도록…….”

도저히 살갑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가르엘은 불편한 분위기를 피하고자 먼저 자리를 뜨는 쪽을 택했으나.

“피넷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 봐야 한다니, 저희도 이만 떠나도록 하죠. 안주가 맛있는 주점을 알고 있습니다. 같이 먹어요. 카델 경도…… 경의 부하도.”

모들렌의 덤덤한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모들렌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카델과 시선을 맞추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굳어 버린 두 남자를 뒤로한 채 피넷을 돌려보내고,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의 부하’라는 건, 아무래도 절 말하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카델과 가르엘은 한참이나 자리에 굳어 모들렌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그가 뒤를 돌아 재촉의 눈짓을 보낼 때서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모들렌이 안내한 주점은 카델에게도, 가르엘에게도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죽은 척 위장 중이던 가르엘이 음주 욕구를 참지 못해 기어코 생존을 들켜 버렸던 장소.

카델과 가르엘은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아, 두 분은 이미 알고 있는 곳이겠군요. 카델 경과도 와 본 적이 있고, 부하분은 뭐……. 워낙 예전 일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모들렌은 작정하고 가르엘에게 무안을 주려는 듯했다. 순진하고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내면은 갖은 속셈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문제랄 것은, 그 속셈에 카델까지 숨이 막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화, 확실히 여기 안주가 맛있긴 했죠. 술도 맛있었고요.”

“그렇죠. 특히 포도주가 제대로 숙성돼서, 술꾼들에게 입소문이 난 곳이라더라고요. 재산을 탕진하고도 빚까지 내서 찾아올 만큼 중독적이라나요.”

“아…….”

“인생의 중요한 걸 전부 내버릴 만큼 중독적이라니. 너무 위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다. 카델은 모들렌의 미소를 마주하며 쭈뼛쭈뼛 입꼬리를 올렸다. 옆자리에 앉은 가르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술만 홀짝이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가르엘을 빼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카델이 주저하며 입을 연 순간.

“그래서, 이젠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네?”

“경의 부하분이요. 옛 호칭은 당연히 안 되겠고. 이름으로 불러도 곤란해질 테고. 세간에선 적린 기사단의 흑마법사 정도로 불리지만…….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흑마법사라고 부르기는 조금 그렇잖아요.”

주점에 온 뒤로 계속 카델만을 향하던 모들렌의 시선이 처음으로 가르엘을 응시했다. 가르엘의 숙인 정수리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언뜻 적대감이 비치는 듯도 했다.

“글쎄…….”

“좋을 대로 불러. 흑마법사라 불러도 좋고, 배신자라 불러도 좋고. 쓰레기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지.”

마땅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어물거리는 동안, 내내 침묵하던 가르엘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찬물이 부어진 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카델은 양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망했다.’

애초에 둘을 같은 장소에 있게 해선 안 됐는데. 모들렌의 변덕에 뭔가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혹시 모를 일을 상상하며 따라왔던 것이 실수였다. 이대로 둘을 놔둔다면, 감정이 격양되어 이미 어그러진 관계가 완전히 박살 날지도 몰랐다.

끔찍한 결말을 우려한 카델이 가르엘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를 끌고 주점을 나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검사로 하죠. 나열했던 호칭 중에선 딱히 들어맞는 게 없네요.”

날카롭게 반박하리라 예상했던 모들렌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카델은 자신이 쥔 가르엘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모들렌의 반응이 의외인 듯했다.

“어떻게 흑마법사라는 변명이 통했던 건가요? 흑마법은커녕 빛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면서.”

안주로 나온 닭꼬치를 뜯으며, 모들렌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물었다. 시선은 가르엘에게서 떨어진 지 오래였으나, 카델은 그가 가르엘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가르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장님이 암흑 마력을 사용할 줄 알아. 내가 치유술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을 방출해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주지.”

“번거롭겠네요.”

“정체를 숨기려면 어쩔 수 없어.”

짧은 대화의 끝은 먹고 마시기의 반복이었다. 모들렌은 카델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눈을 내리깔면 곧장 무표정이 되었다.

‘……심란해 보이네, 모들렌 경.’

가르엘은 모들렌이 자신을 완벽하게 원망하기를 바랐다. 그 원망을 비료 삼아 황혼 기사단이 성장하기를. 그걸 위해 자신을 따르던 충직한 부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자신을 영영 미워하리란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등을 돌렸다.

카델은 때때로 그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지금 가르엘은 자신과 함께, 새로운 동료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지만. 그가 아꼈던 과거의 인연들도 그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단이나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모들렌은, 가르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대신 차분하게 대화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에서 카델은 희미한 희망을 감지했다.

“제가 암흑 마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 건가요, 모들렌 경?”

“뭐……. 카델 경이니까요. 암흑 마력을 사용할 줄 안대도 이상할 건 없죠.”

“제가 흑마법사일지도 모르는데요?”

“세상을 구하는 흑마법사라, 확실히 흥미롭긴 하군요.”

“편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죠.”

카델은 모들렌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 수 있도록 열심히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그가 가르엘을 저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오로지 가르엘만을 위한, 조금은 이기적인 욕심일지라도.

그런 카델의 바람이 통한 듯, 좀 전보다 긴장을 내려 둔 모들렌이 가벼운 투로 말했다.

“적린 기사단의 흑마법사가 엄청난 치유 실력을 갖췄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전멸한 대군을 한 번에 부활시킬 만큼 대단하다고. ……예전에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소문은 과장되는 법이니까. ……그래도 이번 소문엔 별로 허풍이 섞이지 않은 모양이네.”

“허풍이 섞이지 않은 소문이란 건 이런 거죠. 그 흑마법사, 실력은 뛰어나도 술을 물처럼 마셔 대는 탓에, 근처에만 가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고.”

“내가 청결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건강엔 영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건 알죠.”

가벼운 농담이 오가며, 조금 전까지의 날 선 태도는 점차 누그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시선을 맞춘 두 남자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그 모습에, 카델의 입꼬리도 덩달아 들썩였다. 한껏 들뜬 카델의 얼굴을 일별한 가르엘이 낮은 한숨과 함께 가면을 고쳐 썼다.

“황혼 기사단은 역시 네가 이끄는 게 나아. 예전보다 신성 기사단이란 호칭이 잘 어울리는 기사단이 됐더군.”

“……마검사님도요. 지금이 훨씬 행복해 보이십니다.”

의젓하게 허리를 펴고, 어깨에 힘을 준다. 가르엘은 훌쩍 성장한 모들렌의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런 사내였기에 사랑했던 기사단을 넘긴 것이다. 아무리 원망하라고 쏘아붙이고 못되게 굴어도, 결코 미움으론 살아가지 못하는 남자니까. 자신과는 달라도 한참은 다른 단장의 재목이다.

“그나저나, 핍이랑 시온 말입니다. 그 녀석들은 한결같이 말을 안 듣던데. 대체 어떻게 구슬려 왔던 겁니까?”

“아, 걔네?”

“전투 중에도 곧잘 흥분해서, 독단 행동을 할 때가 많아요.”

“그 녀석들이 좋아하는 술이 있어. 흥분할 때마다 코밑에 술병을 갖다 대 주면, 홀린 듯이 명령을 듣는다고.”

“……핍과 시온은 성기삽니다.”

“나도 성기사였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소중함을 지키고 있기에. 모들렌과 자신은 동등하게 서로를 마주한 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마저도 카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멀리 도망쳤을 것이고, 황혼 기사단을 완전히 망가뜨렸을지도 몰랐다.

대체 자신의 단장님은 이 구제 불능의 삶을 어디까지 고쳐 놓을 작정인 걸까. 자기 일이 아님에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카델의 모습을 보며, 가르엘은 내면의 무언가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닐라 국왕과의 짧은 만찬 뒤, 황제는 카델에게 일주일간 휴식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평화의 돌 수색도 완료했고, 다닐라 왕의 환대를 무시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카델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가 적린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할 일은 전부 마쳤다. 평화의 돌을 세 개나 찾아내지 않았는가. 나머지는 타국의 기사들이 찾아내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하룻밤 만에 보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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