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6화 (386/521)

*

차례차례 깨어난 부하들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혼란스러워했고,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다는 여운에 잠겨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얼마 가지 않아 평소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카델에게서 대강의 탈출 과정을 듣고 영특한 자신의 단장을 칭찬하거나, 건강을 염려하거나, 왜 미리 계획을 말해 주지 않았냐며 서운함을 표하기도 했다.

아무도 행복한 꿈을 깨뜨린 카델을 원망하지 않았다. 사라진 꿈에 대한 아쉬움도 없었다. 카델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의 행복 역시 카델과 함께하는 현실이었으므로.

하지만 딱 한 명. 깨어난 뒤 카델에겐 눈길조차 두지 않은 채 멀찍이 떨어져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사내가 있었으니.

“가르엘.”

카델의 부름에 하릴없이 파도만 응시하던 가르엘의 고개가 돌아갔다. 카델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로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단장님.”

“내가 맞혀 볼게.”

“네?”

“의식을 되찾고도 말 한마디 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유. 그 아공간 속에서 나한테 했던 말 때문이지?”

“…….”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카델은 다시 시선을 회피하려는 가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의 얼굴을 붙들었다.

“그런데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소중한 사람만이 모여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취기를 등에 업은 가르엘이 속삭였던 말들. 그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카델이 환상을 깨고 현실로 돌아온 지금, 환상에 안주하려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거겠지. 가르엘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평소엔 그렇게 잘만 능글거리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카델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말캉한 촉감과 함께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놀라움으로 벌어진 눈이 드러났다.

“내 생각이라고 너와 크게 다르진 않았어.”

“……하지만 단장님과 저의 선택은 정반대였죠.”

“결국 똑같아.”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투명한 반응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카델은 가르엘의 잘빠진 눈썹을 살살 어루만지며 속닥거리듯 말했다.

“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소중한 사람만 모여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다 함께 찾아내고 싶었을 뿐이니까.”

“…….”

“이곳에서 찾아보자.”

만약 승리와 이별의 사이, 제게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평화를 찾은 세계에서 그들과 환상 같은 삶을 꾸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이 정반대라는 거라니까요.”

카델의 다정한 약속에 그제야 어색하던 가르엘의 표정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4/100」

시야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짧게 일별한 카델이 가르엘의 얼굴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손안 가득 찬 잘난 얼굴에 대고 짓궂게 말했다.

“한가하게 나와의 차이점이나 찾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빨리 내일을 준비하는 게 좋을걸?”

“내일을 준비할 게 있나요?”

“평화의 돌을 찾았잖아. 너희가 기절한 동안 [울로]에 연락을 해 뒀거든. 그랬더니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황혼 기사단이 복귀를 돕는다지 뭐야.”

이제는 완전한 남이 되어 버린 옛 부하들과의 대면. 카델이 전한 예상치 못한 소식에, 가르엘의 안색이 흐려졌다.

평화의 돌을 발견했다는 광역 통신을 보낸 뒤, 가장 가까운 섬에 있던 황혼 기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평화의 돌을 화이트 왕국까지 이송하는 것이 일의 마무리였다.

때문에 카델은 반가움과 껄끄러움이 오묘하게 섞인 인물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모들렌 경.”

선박에서 내린 모들렌에게 곧장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모들렌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성실하고 올곧은 인상에 단장이라는 감투까지 얹어지니, 외관만으로도 신뢰감이 들었다. 비록 진한 다크서클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아마 태생적인 문제인 듯했다.

잠시 카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이내 밝은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카델 경. 그간 경의 소식을 들으며 과거의 만남을 몇 번이나 그렸는지……. 수많은 활약상을 전해 들을 때면 제 어깨가 다 올라가지 뭡니까.”

“활약상이라고 하니 낯부끄럽네요.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평화의 돌을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벌써 적린 기사단이 세 번째 돌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퍼져서, 여기저기서 난리입니다.”

하나의 기사단이 3개국 몫의 돌을 찾아냈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모두를 위한 것임에도 자국의 돌은 자국의 기사단이 찾아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을 터. 그런데도 모들렌은 아쉬움이나 질투의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실 텐데, 서둘러 화이트 왕국으로 이동하죠. 국왕 폐하께서 적린 기사단을 초대하셨습니다. 전쟁 중이니 형편은 좋지 못하지만, 영웅을 대접할 여유 정도는 있으시다고요.”

“대접이라니,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요. 저희도 제국으로의 복귀를 서둘러야 하고요.”

“하루 정도만 시간을 내주십쇼.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폐하가 경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물론 알고 있다. 다닐라 왕에게는 몇 번씩 도움을 받은 기억도 있으니. 이쪽을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는데 계속 거절하기도 어려워, 카델은 결국 화이트 왕국에서 이틀 정도를 머무르기로 약속했다.

“단원들을 모아 주시죠. 마도구 충전을 완료했으니, 곧장 출항하면 됩니다.”

모들렌의 말에 카델은 흩어져 짐을 정리하고 있던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미 황혼 기사단과 안면이 있는 반과 루멘, 라이돈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나눴다. 반면 초면인 요젠은 기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깡그리 무시한 채 빠르게 선실로 들어갔고, 가르엘은…….

‘엄청 수상하게도 가려 놨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채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갑갑하게 여민 기다란 로브에 눈 아래까지 눌러쓴 후드. 가면은 최대한 끌어 내리고, 고개도 푹 수그린 탓에 보이는 부위라곤 그림자 진 입술과 턱뿐이었다.

카델이 그런 가르엘을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단원들을 통솔하던 모들렌의 시선이 움직였다. 곧 가르엘을 발견한 모들렌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아, 내가 시선을 끌어 버렸나. 표정이 안 좋네. 하긴. 혼자서 남은 단원들을 잘 이끌어 보겠다곤 했지만, 그거완 별개로 가르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그따위였으니…….’

과거, 가르엘은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로 모들렌을 떼어 냈다. 그가 자신을 잊고, 저보다 나은 단장이 되어 황혼 기사단을 이끌어 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들렌은 가르엘의 부재가 아쉽지 않을 만큼 멋지게 기사단을 이끌고 있으나.

“모들렌 경. 혹시 원하신다면 따로 얘기할 시간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여전히 가르엘에게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듯했다. 모들렌은 가르엘이 다가오기가 무섭게 등을 돌려 선박 안으로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당혹스럽게 좇던 카델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가르엘을 돌아보았다. 가르엘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였으나,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주 꼼꼼하게도 가려 놨네.”

“오래 알고 지냈던 녀석들이니까요. 제 머리카락 색만 봐도 죽은 옛 단장을 떠올릴 수 있으니, 공 좀 들여 봤습니다.”

“……들어가자. 화이트 왕국에서 이틀 정도 묵게 됐어. 원한다면 가까운 도시에 따로 방을 잡아 줄게.”

“숙박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됩니다, 단장님. 이래 봬도 화이트 왕국은 제 고향이니, 괜찮은 여관은 꿰고 있거든요.”

가르엘은 카델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카델의 등을 밀어 함께 선박으로 올라가자, 곳곳에 자리한 황혼 기사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멈춰 서 그들을 응시하던 가르엘은, 이내 더 끌어 내릴 것도 없는 후드를 잡아당기며 뻣뻣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도착할 때까지 선실에 박혀 있어야겠군요.”

“그렇게 가려 놨는데 알아볼 리가 없잖아. 답답하면 나와 있어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제 선실까지만 안내받을 수 있을까요?”

“……알았어.”

언제나 여유 넘치던 태도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꼭 죄인처럼 움츠러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카델의 뒤를 따랐다. 선실에 도착한 뒤엔 곧장 안으로 들어서, 짧은 인사와 함께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어쩔 수 없나.’

가르엘이 황혼 기사단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의 정체를 세간에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모르겠다만, 그날이 온대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카델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가르엘의 선실을 떠나야 했다.

*

“와아, 오랜만이네! 조개 초콜릿 왕국!”

“조개 초콜릿 왕국이 아니라 화이트 왕국이겠지. 남의 왕국을 그렇게 부르는 건 실례다, 라이돈.”

“아하하! 그거 알아, 루멘? 너 점점 멜피스 할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어. 그럴수록 매력은 뚝뚝 떨어질 테니까, 그만큼 카델은 날 더 좋아해 주겠지?”

오랜만에 방문한 화이트 왕국은 시원스러운 풍경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트이는 광경이었으나, 왕국 특유의 밝고 화사한 분위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허물어진 건물의 보수로 한창이었고, 부상을 달고 돌아다니는 정찰병이나 일반 시민들도 보였다.

항구를 둘러보는 카델의 옆에서, 모들렌이 심란한 투로 말했다.

“제국도 비슷한 상황이겠죠. 마음 같아서는 저희가 지키지 못한 국민 한 명 한 명에게 치유술을 사용해 주고 싶습니다. 가끔은 무력함마저 느껴져요. 모두 왕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한 싸움일 텐데…….”

“……아무래도 치유사의 수와 마력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사들을 돌보는 만큼, 나머지에게 돌아가는 관심은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카델은 착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에서부터 그들을 성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모인 마법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델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단원들을 불러 모으려 했으나. 그런 그의 곁으로 두 남자가 접근했다. 요젠과 가르엘이었다.

“저희는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로 했습니다.”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묵을 숙소의 주소를 적어 둘 테니, 만약 일이 생긴다면 이곳으로 전보를 보내 주세요. 직접 찾아와 주신다면 더 좋고요.”

“나는 가르엘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있을 거야. 주기적으로 분신을 살필 테니,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불러.”

애초에 모두가 한데 모여 국왕과 식사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오히려 이 그룹에 반이 끼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래. 길게 머무르진 않을 거니까, 대충 볼일이 끝나면 바로 찾으러 갈게.”

본의 아니게 봉인석을 세 개나 찾아 버렸으니. 오스마 황제도 적린 기사단을 이 이상 외부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국의 정예 기사단을 본 전투에 돌입하기도 전에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 휴식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카델은 요젠과 가르엘을 몰래 빼돌리며, 나머지 단원과 함께 마법사들의 앞으로 이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