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4화 (38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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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 더 이상의 수색은 무리였다. 다시 성으로 모인 그들은, 서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음을 전달했다.

모두가 허탕이라는 소식에 절로 김이 빠졌다. 바다에 들어갔던 가르엘과 라이돈마저 공기 방울과 관련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하니. 내일의 수색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은 많으니까, 각자 하나씩 골라서 들어가. 피곤했을 텐데 오늘 밤이라도 푹 쉬자.”

함께 자자는 라이돈을 어르고 달래 떼어 내고,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자그마한 방 하나를 골랐다. 바깥에 발코니가 있어 머리를 식히기에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란한데 잠이 올 리가 없지.’

자신의 성향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이런 상황, 이런 기분으로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리 없다. 때문에 카델은 발코니로 빠져나와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섰다.

저 멀리 어둡게 가라앉은 밤바다가 보인다.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무수한 별과 선명한 보름달도 눈에 담겼다. 어디를 쳐다봐도 그저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뿐이다.

‘만약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내가 이 세계에 남게 된다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었다. 모두와 함께 매일같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잠겨,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고, 가끔은 욕망에도 충실하며.

‘여긴 만들어진 장소일까. 아니면,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장소로 우릴 이동시킨 걸까.’

이런 위기에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지만, 되도록 실존하는 장소이길 바랐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바다를 응시하던 카델이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아래쪽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그를 비췄기 때문이었다.

한 손으로 아래를 가린 채 실눈으로 빛의 정체를 확인하자, 누군가 반갑게 검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르엘……?”

그가 왜 성 바깥에서 자신에게 빛을 비추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자, 가르엘 역시 빛 마력을 거뒀다. 큰 소리로 그를 부르기엔 모두가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다.

카델의 망설임을 알고 있다는 듯, 멀리서도 보일 만큼 즐겁게 미소 지은 그가 경쾌한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도 잠이 오지 않았던 걸까. 술이나 같이 마시자며 출처 모를 술병을 들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연 순간.

“가르…… 읍…!”

다 열리지도 않은 문의 틈새를 거칠게 밀고 들어선 가르엘이, 단숨에 입을 맞춰 왔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카델이 가르엘의 어깨를 짚고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단단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 넣으면서도, 가르엘은 집요하게 카델과 시선을 맞추며 눈꼬리를 휘었다.

점점 밀려나는 카델이 넘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등을 감싸고, 그의 허리가 훅 꺾일 만큼 격렬하게 파고들었다.

“잠, 깐……!”

고개의 위치를 바꾸며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를 노렸으나, 가르엘은 말을 들을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와의 입맞춤에선 독한 알코올의 맛이 났다. 이미 혼자서 진탕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잔뜩 취해서는 남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키스라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도통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가르엘의 움직임을 따라 정신없이 밀려나던 카델은, 문득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뜨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발코니까지 밀려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난간에 기댄 채 키스하고 싶진 않다. 그리 생각하며 본격적으로 가르엘을 밀어 내려 했으나.

“……!”

한 팔로 가뿐하게 카델을 들어 올린 가르엘이 그를 난간 위에 앉혔다. 등을 받칠 곳도 없고, 높이도 높아 떨어지면 죽음뿐이다.

간담이 서늘해진 카델이 급하게 고개를 빼 입술을 떼어 냈다. 가르엘도 더는 그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살기 위해 움켜쥔 가르엘의 옷깃이 잔뜩 구겨졌다.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는 카델을 두 눈 가득 담아냈다.

“……단장님.”

작게 헐떡이는 붉은 입술과 당혹감에 찬 눈빛, 깜빡이는 눈꺼풀, 상기된 뺨, 바람을 따라 살랑이는 머리칼, 옷깃을 붙든 손아귀의 힘. 이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가르엘을 흥분시켰다. 그가 아니면 안 됐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선 도저히 욕정이 일지 않았다.

“왜 불러, 이 주정뱅이야.”

미약한 불만을 품은 귀여운 대꾸에 가르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자신의 어깨로 올라온 카델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고, 뼈대가 도드라진 손목에 입을 맞췄다.

한참이나 눈을 맞춘 채 카델의 모든 것을 음미하듯 망막에 새겼다. 카델은 불안한 자세에 불편해하면서도,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아 주었다. 그런 카델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쓸어내린 가르엘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여기가 꽤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실망할 건가요?”

“……이곳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물론 알아요. 너무 잘 알아서 문제죠.”

시야를 가득 채운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색이 다른 한 쌍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당연히 잘못된 생각이죠. 한심한가요? 저도 제가 이렇게까지 행복에 약한 인간인지 몰랐답니다.”

카델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가르엘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느라 전전긍긍하지도, 누군가에게 핍박받을 걱정을 하지도, 존재를 부정할 필요도 없는 이 꿈의 장소를 마음에 품었다. 이런 곳에서 행복한 미래를 보내고 싶다고 꿈꾸었던 좀 전의 자신처럼.

그의 말대로다. 이곳은 자신에게, 그리고 부하들에게 필요한 장소였다. 오랜 전투에 지친 그들에게 있어, 이보다 완벽한 휴식처는 없으리라.

그랬기에 카델은 말없이 가르엘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이 세계를 통제하는 시스템의 영향력을 없애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자신의 부하들은 거대한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바엔 차라리…….’

이 꿈같은 장소에서, 다 함께 세계의 멸망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행복을 끌어모아, 기쁨에 잠겨 눈을 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진정으로 옳은 길은 무엇인지, 조금씩 분별이 어려워졌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 이후로도 열흘이 넘도록 매일같이 주변을 탐색한 결과, 기사단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섬이다. 규모가 워낙 커 어느 대륙에 딸린 해변인 줄로만 알았으나,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섬이었다.

또한 이 거대한 섬에 사는 지성체라고는 오로지 기사단뿐. 더 찾아오는 마족도, 기사도 없었다. 그렇다고 주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성에는 매일 청소와 요리를 도와주는 ‘유령’이 찾아왔고,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척척 가져다주었다.

적린 기사단만이 머무는 평화로운 터전. 며칠 간의 수색으로 얻어 낸 결론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탈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날이 지날수록 수색의 의욕은 떨어졌다.

‘……좋네.’

모래사장에 앉아 흠뻑 젖은 몸을 말리며, 멀찍이 펼쳐진 수평선을 응시했다. 따뜻하기만 한 햇볕이 축축한 몸의 물기를 덜어 내는 느낌이 좋았다.

작게 시선을 움직이면, 여전히 수영에 열중인 라이돈이 보인다. 아무리 봐도 수색은 핑계다. 라이돈과 한바탕 물장난하던 좀 전의 기억을 떠올린 카델이 피식 웃었다.

“라이돈, 그만하고 나와! 밥 먹어야지.”

물속에서도 용케 카델의 부름을 알아들은 라이돈이 날아올랐다. 그의 비행을 따라 하늘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제 머리 위로 낙하한 물방울을 털어 낸 카델이 설설 고개를 저었다.

공중에서 내려온 라이돈은 카델이 몸을 말린 보람도 없이 젖은 몸으로 그를 꼭 끌어안고는, 머리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낀 그들이 함께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오늘은 그 유령이 뭘 만들어 줄까?”

“글쎄, 이왕이면 매콤한 음식이었으면 좋겠는데. 어젠 단 걸 너무 많이 먹었어. 어떤 요정이 계속 단 음식만 요청해서.”

“맛있지 않았어? 음식은 달수록 맛있는 건데!”

“단것투성이니까 문제지.”

잡담을 나누며 성으로 돌아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과도 수색을 핑계로 한 자율 시간의 이야기를 듣고,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며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는 카델이 바라던 대로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 늘어져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라이돈의 몫으로 보이는 꿀에 절인 과일들도 있었다.

“다들 밥 다 먹으면 섬 동쪽으로 가 볼래? 그쪽에서 새로운 동굴을 찾았는데, 포인트는 그 근처에 파란색 코코넛 열매가 자란다는 거야. 무슨 맛일지 궁금하지 않아?”

“파란색 코코넛이라니, 독성이 있을 것 같은데.”

“단장은 제가 먹어 본 다음에 먹어요. 알겠죠?”

“덤불에 가려져 있던 동굴을 말하는 거라면, 그 안쪽에선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어. 코코넛만 보러 가는 게 좋겠네.”

맛있는 음식을 배 속에 양껏 밀어 넣고, 곧장 짐을 챙겨 다 함께 동쪽으로 향했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덤불,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웃음 섞인 장난과 재미있는 헛소리, 애정 담긴 몇 마디가 정오의 잔잔한 공기와 어우러졌다.

“……정말이네요. 파란색 코코넛이 있어요. 아무리 봐도 마계 과일처럼 생기긴 했지만.”

“그런 소리 하지 마. 먹어 보기 꺼려지잖아.”

바람 마력을 날카롭게 응축해 코코넛의 줄기를 잘랐다. 무더기로 떨어진 열매 위로 얇은 섬광이 새겨지고. 루멘은 깔끔하게 절단된 코코넛을 반에게 던지며 말했다.

“네가 먼저 먹어 봐라.”

“단장한테 고맙다고 인사해. 단장이 아니었다면 너희가 이걸 먹고 뒈지든 말든 알 바 아니었을 테니까.”

반은 자신의 희생이 카델을 제외한 나머지의 목숨까지 책임질지 모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짧게 혀를 찬 그가 코코넛 물을 시원스럽게 들이켜고.

“괜찮아, 반……?”

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몇 번 입맛을 다셨다.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하곤 나머지를 몽땅 들이마시자, 카델이 기겁하며 그의 손에서 코코넛을 뺏어 들었다.

“이상한 거면 어쩌려고 그렇게 다 마셔!”

카델의 역정에 잠시 당황하던 반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단장.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그런데…….”

“그런데?”

“수상할 정도로 맛있어요. 평범한 코코넛 물이랑은 당도부터 다르던데요.”

“달다고? 그럼 나부터 마실래! 루멘, 코코넛 잘라 줘!”

굉장히 달콤한 맛이 난다는 반의 감상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먼저 라이돈이 달려들었다. 차례차례 코코넛을 배당받은 그들은 의심하며 목을 축이다, 곧 커다래진 눈으로 열매 하나를 다 비워 냈다. 반의 말대로 꿀을 탄 듯 달콤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상큼한 코코넛이었다.

모두가 금세 코코넛의 맛에 빠져들었으나, 그중 가장 심각한 이는 라이돈이었다. 카델은 라이돈의 성화에 못 이겨 야자수를 열댓 개나 털어 낸 뒤에야 근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돌아다니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졌네.”

“오늘 저녁은 바깥에서 먹을까요? 바닷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죠. 유령에게 부탁한다면 장비도 가져와 줄 거예요.”

“고기 좋지. 잘하면 라이돈이 물고기도 잡아 와 줄걸.”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고, 모두와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고, 오로지 즐거움뿐인 감정을 느끼며 풍성한 만족감을 얻었다. 이곳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성에 돌아왔을 때는 늦저녁이었다. 가르엘이 식사를 준비 중인 유령에게 저녁 계획을 전하자, 요리를 중단한 녀석이 바닷가로 이동했다.

유령은 순식간에 좋은 터를 잡아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고, 모닥불을 피워 손질된 고기를 통으로 꿰어 굽기 시작했다. 카델은 유령의 완벽한 준비성에 감탄하며 녀석과 함께 고기를 구웠다.

다 익은 고기를 조금씩 잘라 내어 나누어 먹었다. 그들이 준비된 테이블에 앉지 않고 서로 누가 더 고기를 잘 굽는지 따위의 시합에 열중하자, 눈치 좋은 유령은 생고기 몇 덩이와 술을 놓아둔 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날 좋은 밤바다에서 놀고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바다는 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한바탕 식사를 끝낸 뒤엔, 라이돈이 반을 노리며 시작된 강제 입수 놀이가 시작됐다.

서로를 바다에 빠뜨리기 바쁜 부하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카델은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호쾌한 웃음소리와 밝은 얼굴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평생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임을, 절절하게 깨닫게 될 만큼.

한참이나 부하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놀이에 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대장, 어디 가려는 거야?”

“잠깐 가져올 게 생각나서. 성에 들렀다 올게.”

“데려다줄까?”

“아니, 됐어. 금방 올 거야.”

자신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운 부하들을 안심시키며, 카델은 느긋하게 성을 향했다. 그의 걸음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고, 종종 하늘을 올려 보는 눈빛에선 느긋함마저 비쳤다.

가져올 것이 생각났다던 카델은 성에 도착했음에도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정문 앞에 멈춰 선 채 높게 솟은 성을 얌전히 훑어볼 뿐이었다. 거친 외벽을 어루만지고, 손마디로 툭툭 두들겨 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됐어.”

카델의 손끝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문 위로 불꽃을 옮겨 붙인 그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점점 양을 불리는 마력을 따라, 손톱만 하던 불꽃이 매섭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된 거야.”

그의 불꽃은 거침없이 성을 불태웠다. 마력이 담긴 화염은 성의 내부까지 파고들어 안쪽의 모든 것을 태워 갔다. 떨리는 눈동자 위로 환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내가…….”

그러쥔 주먹이 덜덜 떨리며, 조금씩 표정이 일그러졌다. 뜨거운 불꽃 앞에 선 그의 눈가로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가르엘이 자신을 찾아왔던 첫날 밤, 카델은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행복한 꿈’임을.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꿈을 꾸고 있음을. 모두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충분히 행복하니까. 바깥의 치열한 전투에선 느낄 수 없던, 평화와 사랑이 가득했으니까. 자신이 그들에게 안겨 주고 싶던 행복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미안해…….”

성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멀찍이서 불타는 성을 발견하고 달려온 부하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자신의 손으로 그들의 행복을 부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힘겨운 현실로 끌어내려 했다. 진정한 현실에서 그들에게 똑같은 행복을 안겨 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행복한 꿈보다 힘겨운 현실이 나으리라는, 그 현실은 분명 이 꿈보다 아름다우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깨워 내려는 것은, 그들의 처절했던 삶의 마지막을 환상으로 끝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렵사리 이어 온 현실의 삶을, 그 끝을 진정한 행복으로 꾸며 주고 싶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환상 속에선, 그들의 치열한 인생이 보답받을 수 없다. 또한 그들이 믿고 따르는 단장은, 행복한 꿈에 잠겨 모두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선택을 해선 안 됐다. 그들이 선택한 단장은 눈앞의 고난을 회피하고 눈을 감는 자가 아니었으니.

“단장님!”

“카델!”

눈을 깜빡이자 한껏 고인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카델의 시야 속으로 가까워진 부하들의 모습이 들어찼다. 카델은 걱정이 가득한 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이 카델의 코앞까지 당도한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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