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9화 (379/521)

[적혈망매赤血魍魅.]

불이 붙은 것처럼, 그의 반신으로 강렬한 오라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상처에서부터 솟아난 날카로운 조각들이 엉겨 붙으며 반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것은 응고된 피 같기도, 붉은 루비의 결정체 같기도, 보석으로 만들어진 꽃잎 같기도 했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상처 난 팔을 타고 오른 조각은 그의 육체를 2/3 이상 뒤덮은 채 음울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의 얼굴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려 넣고, 한쪽만 솟아난 뿔을 얹고, 살벌하게 치켜뜬 눈매를 조각했다.

일정량의 혈액을 얻을 때까지 자신의 혈액을 담보로 둔다. 그 대가로 예열 없이 절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신기술. 이것은 게임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신여환의 반 헤르도스만이 깨우친 극의.

그랬기에 카델은 해룡의 코앞까지 당도한 반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동? 환희? 어쩌면 사랑일지도.

그 어떤 기억 속에도 이런 모습을 한,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반 헤르도스는 없었다. 반이 스스로 깨우친 그만의 새로운 기술은, 카델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으로 다가왔다.

그의 오라는 뒤집힌 번개처럼 날카롭고 매섭게 해룡의 몸체를 갈라냈다. 대검의 궤적을 따라 얼음 조각 위로 붉은 균열이 번졌다. 많은 힘을 쓸수록 그를 뒤덮은 기운은 맹렬하게 일렁였고, 조금 더 사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반을 집어삼킬 듯 위험스레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정말 반 경다운 기술이네요. 거칠고, 요령 없지만…….”

한계까지 증폭된 오라와 함께 반의 대검이 해룡의 위로 처박힌 순간. 그를 감싸던 모든 오라가 흩어지며, 거대한 충격파가 대기를 휩쓸었다. 공기 중에 섞인 오라가 사방을 촘촘하게 물들였다. 반사적으로 힘을 개방한 가르엘이 마기의 날개를 펼쳐 동료들을 보호하고.

“위력 하나는 대단하단 말이죠.”

얼음의 균열에서부터 발광하듯 눈부신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빠르게 밝아지는 오라를 따라 균열의 잔가지가 뻗치며, 순식간에 얼음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반이 짧은 들숨과 함께 대검을 뽑아내자.

“아아, 내 장난감…….”

얼음이 산산조각 나며, 대량의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날카로운 얼음 파편, 폭포수 같은 핏물, 그 속에 뒤섞인 해룡의 육편이 사정없이 반을 덮쳤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잔해 속에 파묻혔다. 소모했던 혈액을 보충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생각보다 피가 많이 필요하군. 내 신체를 담보로 잡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인가. 더 큰 담보를 잡는다면 힘도, 시간도 늘어나겠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딱히 죽으려고 싸우는 것도 아니니.’

자신의 신기술을 평가하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갗을 후려치는 육편을 대충 쳐 낸 그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했다.

“반!”

고개를 돌리자, 이젠 몇 방울 떨어지지 않는 핏물 사이로 달려오는 카델의 모습이 보였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를 마주한 반이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멈추지 않고 달려든 카델이 펄쩍 뛰어올라 반을 끌어안았다. 익숙하게 그의 엉덩이를 받쳐 주자, 두 다리가 허리를 단단하게 감아 왔다.

“단장, 무슨 일이에요? 엄청 신났네.”

귓가에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은 듯 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델을 보자마자 신기술에 대한 집요한 탐구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릿속이 온통 카델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버려서, 그의 웃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궁금해질 뿐이었다.

카델은 그런 반의 목을 꽉 끌어안고선 잔뜩 들떠 말했다.

“엄청 멋진 기술이었어! 지금까지 내가 본 기술 중에 최고였다고!”

“……정말요?”

“응! 그 도깨비 가면 같은 거, 진짜 멋있어. 최고야. 어떤 종류의 기술인 거야?”

“음……. 전투에서 예열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기술이에요. 별거 아닌데.”

반은 굳이 카델에게 자신의 새로운 기술이 가진 위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기술을 연구하고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제 몫으로, 자신의 기술이 카델의 전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술의 페널티는 필요할 때에 언급하면 된다. 지금은 카델의 커다란 기쁨에 걱정을 묻히고 싶지 않았다.

“별거 아니긴! 저 커다란 괴물을 한 번에 쓰러뜨렸는데.”

반의 목덜미에 파묻다시피 하던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 본 카델이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에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반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여, 여환아.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요…….”

제 이름과 존대가 섞인 말투는 언제 들어도 이상했으나, 카델은 개의치 않고 몇 번이나 더 입을 맞췄다. 뺨과 광대, 콧방울과 입꼬리까지. 진심으로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 여러 차례 온기를 남긴 카델이 마지막으로 힘껏 입술 도장을 찍었다.

반은 그 모든 스킨십을 받아들이면서 차츰 익어 갔다. 부끄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카델을 지탱한 팔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두 남자의 애정 행각을 저지한 이는 다름 아닌 라이돈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자기? 왜 반을 칭찬해? 왜 반만 예뻐해? 내 덕에 저 녀석을 얼린 거잖아? 내 덕에 반이 편안하고 무식하게 힘자랑을 할 수 있었던 건데. 그런데 왜?”

명을 다하고 만 장난감을 애도하던 라이돈이 뒤늦게 카델과 반을 발견한 것이다. 카델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그를 떼어 내려 하자, 반이 카델의 허벅지를 쥐고 놔주려 하지 않았다. 졸지에 상하체가 분리될 위기에 처한 카델은 기쁨을 음미할 새도 없이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너희 힘을 좀 생각하고 행동해! 찢어진다고!”

*

루멘과 요젠은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도 30분이 더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어느 곳에도 빈틈이 없고, 암기를 흘려도 뚫리지 않았지.”

요젠은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하자마자 카델의 옆에서 자신의 색다른 경험에 대해 늘어놨다. 평생 마땅히 대적할 상대가 없었으니, 해룡에게 느꼈던 무력함이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예상했으나. 의외로 요젠에겐 꽤 쓸 만한 경험이 된 듯했다.

“무섭진 않았어? 조금만 늦었으면 질식했을 수도 있는데.”

“사방이 물로 막혀서 기척을 느끼긴 어려웠지만, 어차피 네가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 다음은 널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물론 그렇지. 성장했네, 요젠. 단장한테 기댈 줄도 알고.”

카델이 요젠을 기특해하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줄 무렵. 멀찍이서 다가온 루멘이 마찬가지로 멀찍이서 요젠을 불렀다.

“어느 정도 토대는 잡았으니 마무리해. 난 부족한 재료를 보충하러 가 보지.”

“알겠어.”

요젠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루멘 역시 등을 돌려 곧장 떠나려 했다. 하지만 함께 일어난 카델이 그를 붙들어 세웠다.

“무슨 문제 있어?”

루멘은 깨어난 뒤로 동료들은 물론 카델에게조차 한 마디를 꺼내지 않았다. 최대한 말을 삼가며, 맡은 일을 묵묵히 처리할 뿐이었다. 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도 같았다.

본래라면 다친 곳은 없느냐, 적의 정체는 무엇이었냐, 어떤 식으로 해치웠느냐 등등 호기심을 드러냈을 사내였다. 그에 의아해하며 묻자, 루멘은 자연스럽게 카델에게 잡힌 팔을 돌려 뺐다.

“아무 문제 없어.”

눈도 쳐다보지 않는 주제에 그런 변명이 들어 먹힐 리 없다. 미간을 좁힌 카델이 아예 루멘의 앞으로 몸을 틀어 그의 경로를 방해했다. 그러자 열심히 카델을 비껴가려던 그가 한숨과 함께 멈춰 섰다.

“아무 문제 없다니까. 대장이 신경 쓸 일은 없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너 혹시, 아무것도 못하고 붙잡혀 있던 게 부끄러워서 이래?”

“…….”

“맞구나?”

차마 거짓말을 꺼내 놓지 못한 그가 침묵을 택하자, 잠시 루멘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카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싸우다 보면 당할 때도 있는 거지. 그럴 때 도와주라고 동료가 있는 거 아니겠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진 않았어.”

잘 이해할 순 없으나, 루멘은 언제나 멋있고 듬직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듯했다. 실제로 전장에서의 그는 무력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단장인 자신에게 적의 기술에 붙잡혀 맥을 못 추는 모습을 공개한 것은, 정신적 타격이 클 수도 있다. 특히 루멘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내라면 더더욱.

카델은 내상이라도 입은 듯한 표정의 루멘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뭔가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 대장이야. 보통은 대장이 부하를 지키지 않아? 난 그다지 너한테 지켜 줘야 할 존재가 되고 싶진 않거든.”

“…….”

“그러니까, 가끔은 내가 대장 노릇 좀 하게 해 달라고.”

뭉친 근육을 풀듯 어깨를 주무르자, 경직되었던 루멘이 조금씩 긴장을 내려 두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카델을 마주 보다, 이내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건가?”

“넌 좀 자만하고 있는 게 어울려. 괜한 걸로 풀 죽어 있지 말란 소리야.”

“……그러지.”

아무리 마음이 굳어 있고,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카델의 몇 마디면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의 앞에선 자신의 기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았다. 사사로운 감정은 전부 제쳐 두고, 오로지 그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비결이 뭘까. 종종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루멘은 카델의 뺨을 손마디로 가볍게 쓸어내리곤, 움찔거리는 걸 모르는 척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평화의 돌 수색 계획은 없는 건가?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무인도인 줄 알았는데 그런 괴수가 나타났어. 돌을 수색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뭐…… 손 놓고 있기 애매해지긴 했지.”

적린 기사단이 세 번째 평화의 돌을 찾아낼 것이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건만. 뜻밖의 이벤트가 찾아와 버렸으니, 섬에서의 휴가는 물 건너간 듯했다.

섬이 침몰하기 전에 해룡을 해치웠으나, 시간이 지체된 탓에 상당 부분이 바닷물에 잠겼다. 야영지의 위치를 안쪽으로 옮겼음에도 조금만 파도가 거세면 코앞까지 물이 찰 정도였다. 상당히 불안한 환경이었으나, 단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예민한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그랬기에 카델은 모두가 잠든 밤, 야영지 밖으로 나와 작은 불덩이를 피웠다.

“어디 보자…….”

불덩이는 두툼한 양피지 안쪽의 글귀를 비췄다. 아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카델은 문장을 세심하게 정독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섬, 흠뻑 잠긴 세계의 유일한 숨. 두 번의 탐욕, 투명한 구슬 속 가득 찬 영혼. 구해 낼 용기를 쥐고 가라앉는 자, 희망의 유산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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