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이게 웬 봉변이냐고!”
카델은 흠뻑 젖은 옷을 털어 내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섬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거대한 괴물이 끊임없이 물을 뿜어 대고 있었다. 물의 양은 섬을 통째로 휩쓸 만큼 방대했고, 수압 역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로 묵직했다.
놈이 계속해서 물을 뿜어 댄다면, 이런 작은 섬 하나쯤은 금세 침몰시킬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 위중한 사실보다도 카델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저건 이벤트 전투에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잖아! 해룡이 왜 여기서 나와?’
쿤라가 지상의 용이라면, 저 녀석은 바다의 용이다. 다만 쿤라가 높은 지능과 권능을 가진 것과는 달리, 해룡은 높은 전투력만 갖췄을 뿐. 별다른 지능은 없었다. 이벤트 퀘스트를 안내하는 용과 몬스터로 등장하는 용의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해룡이 등장했던 이벤트는 분명……. 그래, 배경이 섬이었던 것 같기는 해. 하지만 그냥 미보유 기사들을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 아니었나? 이게 메인 퀘스트랑 뭔가의 연관이 있어?’
해룡이 보스로 나왔던 이벤트에서, 플레이어는 게임 내 모든 기사를 마음대로 조합해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뿐. 그 외엔 특별히 떠오르는 정보가 없다. 이벤트에도 분명 스토리는 존재하겠지만, 메인 퀘스트도 스킵하는 사람이 이벤트 스토리를 읽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계 전쟁 퀘스트가 개방된 이후에 등장한 이벤트였어. 주인공 기사단과는 연관이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벤트 스테이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사는 총 여섯. 언제나 덱의 일부로서 함께했던 카델 라이토스를 제외하고, 다른 기사를 넣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카드를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주인공인 카델 라이토스와는 완전히 상관없는 스토리라고 볼 수 있었다.
‘설마 이 이벤트에서 평화의 돌을 얻나? 주인공 기사단이 아닌 다른 기사단이 해룡과 싸워 얻어 내는 형식으로…….’
이벤트 스토리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아군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면. 그 스토리에서 평화의 돌을 얻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문제는 그 이벤트가 왜 우리한테 나타났냐는 건데.’
그저 재수가 옴 붙은 것인지, 시스템이 이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 해룡이 등장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가르엘! 서두르자!”
카델은 질퍽하게 젖은 바닥을 내달리며 서둘러 해안가로 이동했다. 지금쯤 지각한 단장을 둔 단원들이 분투 중일 것이었다.
그러나 카델의 예상과는 달리, 도착한 해안가에서 분투 중인 단원은 단 두 명뿐이었다.
*
“루멘! 요젠!”
“저게 대체…….”
야영지로 돌아온 카델과 가르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우람하게 자리한 해룡의 존재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해룡의 앞. 둥근 물방울 속에 갇힌 루멘과 요젠의 모습이었다.
상공에 뜬 물방울은 세찬 회오리를 품은 채 내부의 인간을 할퀴어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갇혀 있던 것인지, 두 남자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 물방울 속에서 축 늘어진 단원을 발견한 카델이 사색이 되어 곧장 바람 마력을 날렸다. 가르엘 역시 마기를 개방해 해룡의 머리를 노리려 했으나.
“멈춰! 공격하지 마!”
“예? 하지만…….”
카델의 단호한 저지에 가르엘은 주춤하면서도 이내 순순히 마기를 거뒀다. 그러는 동안 카델이 날린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물방울을 베어 냈다. 수십 개의 바람결이 만들어 낸 풍압이 순식간에 물방울을 터뜨리고. 카델은 추락하는 부하들의 몸에 부드러운 바람을 둘러 그들을 가까이 끌어왔다.
“두 사람 상태 좀 확인해 줘.”
루멘과 요젠 정도의 인물이 의식을 잃을 정도라면, 어지간히 오래 붙잡혀 있던 것이 아닌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은 해룡의 공략법을 알지 못할 테니. 평소와 같은 싸움을 해서는 해룡을 이길 수 없다.
카델은 쓰러진 부하들 앞에 쭈그려 앉아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불길한 상상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느릿한 박동에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 물방울은 해룡의 속박 기술이 분명해. 아군을 기절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었고, 게임 내에선 그 기술만으로 체력이 닳지는 않았어. ……하지만 현실에선 조심해야겠지.’
가르엘은 동료들에게 마기를 불어넣는 와중에도 해룡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델이 상태를 확인해 달라니 하고는 있지만, 해룡의 코앞에서 치유술을 거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걱정을 차단했다.
“저 해룡은 이쪽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물을 뿜는 것밖엔 하지 않아. 어차피 놈이 뿜는 물은 섬 전체를 뒤덮으니, 굳이 멀리 도망갈 필요는 없지. 여기서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술을 사용하는 게 나아.”
“쿤라 님의 정보인가요? 설마 루멘 경과 요젠 경이 그런 꼴을 당했던 것도 해룡을 공격했기 때문입니까?”
“그래. 선공을 날리면 아까처럼 물방울에 갇혀 속박당하게 돼. 피할 수 없는 공격이지.”
카델의 설명을 듣는 가르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공하면 물방울 속에서 기절할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해룡이 내뱉는 물에 점점 해수면이 높아져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이런 답 없는 상황이……. 한 방에 녀석을 쓰러뜨릴 만한 기술을 사용한다면요? 아쉬브카를 상대했을 때처럼 말이죠.”
“해룡은 몸의 일부를 물로 변환시킬 수 있어. 보기와는 달리 움직임도 재빠르지. 한 방에 죽이기는 어려워.”
“그렇다면…….”
“우리도 저 녀석을 속박해야 해. 공격을 회피할 수 없도록,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해야지.”
해룡은 그 자체로 바다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몸을 액체로 만들 수 있는 적을 속박이라니.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잠시 신중하게 고민하던 가르엘은,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카델은 자신을 돌아보는 가르엘과 눈을 맞추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명, 해룡을 속박할 수 있는 녀석이 있잖아.”
*
“한 번 더! 아하하!”
양팔을 활짝 벌린 라이돈이 한껏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온몸이 흠뻑 젖었음에도 찝찝하거나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다. 그저 다가올 물 폭탄이 기대된다는 듯,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요정의 옆. 축축하게 들러붙은 웃옷을 벗어 던진 반이 짜증스레 외쳤다.
“그만 웃고 내려와라, 요정 놈! 저 괴물을 처리해야 할 거 아니야!”
원래라면 괴물이 등장한 즉시, 라이돈이 물벼락을 즐기든 말든 곧장 단장을 찾아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 야영지로 돌아가던 길, 반은 깨달았다. 멀리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라이돈의 힘이 필요하다는걸.
계속해서 쏟아지는 물벼락을 막기 위해선 물이 나오는 구멍을 통째로 얼려 버리는 편이 편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라이돈을 두고 가 봤자 찾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기에, 차마 무시하고 혼자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이돈은 반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바닥에 있었다면 강제로 끌고 가기라도 했을 텐데. 반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듯, 라이돈은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에만 머물렀다.
“단장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는걸?”
“저 크기를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는 거냐?”
“크기가 전부가 아니야, 반! 인간들이 멍청한 걸까, 반이 멍청한 걸까? 카델은 똑똑하니까 아무래도 후자겠지?”
“제발 닥치고 그만 내려……!”
그렇게 분노의 한계치에 다다른 반이 오라를 개방하려던 때.
콰아아아―
또 한 번,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섬을 휩쓸었다. 괴물이 뱉어 낸 물은 섬을 크게 문지르며 유유히 바다로 돌아갔으나, 그 피해는 상당했다. 수압을 이기지 못한 나무가 기울어지고, 열매는 터지고 짓무른 채 나동그라졌다. 바닥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 발이 푹푹 꺼질 만큼 흙이 질어지기까지 했다.
대검을 땅에 꽂아 넣어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반이 푹 젖은 고개를 수그린 채 이를 갈았다. 드러난 팔뚝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었으나, 그럼에도 서 있는 것이 고작일 만큼 세찬 물줄기였다.
‘여환이라면 벌써 몇 번은 쓰러졌을 거야. 이미 혼절했을 수도 있지. 내가 지켜 줘야 하는데…….’
물을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단장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반은 젖은 얼굴을 문지르며 즐겁게 웃어 대는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빠르게 오라를 개방한 반이 손바닥으로 대검의 날을 힘주어 쓸었다. 날붙이에 베인 살갗에서 피가 흐르며, 주인의 피를 흡수한 검날이 붉게 물들었다.
“시체를 끌고 가 봤자 쓸모없으니, 죽기 전에 끝내 주마.”
점점 높아지는 해수면에 섬의 면적이 좁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숲 앞까지 밀려난 카델과 가르엘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동료를 보호하며 해룡이 발사하는 물대포를 견뎠다.
해룡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라이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카델은 직접 라이돈을 찾아가는 대신, 그와 함께 있을 반을 믿고 그들의 복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결과.
“자기! 이것 좀 봐! 반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고!”
밧줄처럼 뻗친 오라에 칭칭 묶인 라이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반은 그런 라이돈을 짐짝처럼 끌며 나아가다, 카델을 발견하곤 살벌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단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들어도 알 것 같네. 고생했어, 반.”
반이 오라를 해제하자,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펄럭인 라이돈이 카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는 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카델의 팔을 낚아채 포박하듯 위로 올렸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드러난 품 안으로 파고들어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려 댔다.
“얼마나 무식하게 오라를 날려 댔는지 알아? 난 카델이 화낼까 봐 제대로 반격도 못 했는데! 정말, 약한 인간 상대하기는 너무 까다롭다니까.”
무조건 잘못은 라이돈 쪽이 했을 것 같다만. 여기서 그 점을 지적한다면, 이 까탈스러운 요정은 분명히 토라질 것이었다.
반조차도 그런 피곤한 일은 원치 않는지, 라이돈에게 파묻힌 카델과 눈을 맞춘 그가 요정의 비위를 맞추라는 듯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카델은 바닷물로 뻑뻑해진 라이돈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능숙하게 그를 달랬다.
“그래, 그래. 참을 줄도 알고 너무 기특하다.”
“그렇지? 난 카델을 너무 좋아하나 봐. 반의 건방진 도전까지 참아 주다니.”
“나도 네가 너무 좋아, 라이돈. 그러니까 마음 놓고 같이 놀 수 있도록 저 커다란 방해물 좀 처리해 볼까?”
“커다란 방해물? 반을 말하는 거야? 드디어 허락해 주는구나!”
“아니, 저거 말이야.”
라이돈의 엉뚱한 답에 헛웃음을 뱉은 카델이 간신히 몸을 비틀어 해룡을 가리켰다. 그제야 시선을 옮긴 라이돈이 작게 미간을 좁혔다.
“저걸 없애 달라고?”
“얼려만 줘.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반격할 수 없게 단숨에 얼려 버려야 해.”
“하지만 쟤가 있어야 재미있는데…….”
해룡이 계속해서 물을 뿜는다면 섬은 침몰할 테지만, 날개가 있는 라이돈에게 있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카델은 날지 못하나, 그렇다면 자신이 안고 나르면 된다. 대륙이 있는 곳까지 운반하면 되지 않겠는가. 도중에 힘이 들면 얼음 마력을 사용해 잠깐씩 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델은 다른 단원들의 안전까지 고려하는 듯했다. 상당히 괘씸했으나, 이제 와 투덜거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다.
“……좋아. 대신 저걸 해치우면, 나랑 같이 수영해 줘야 해. 약속해.”
“알겠어. 약속할게.”
세 번이나 카델의 진심 어린 약속을 받아 낸 라이돈이 설렁설렁 날아올랐다. 고도를 한참이나 높인 뒤에야 겨우 해룡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라이돈은 해룡의 자그마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해룡 역시 자신의 앞까지 당도한 요정을 응시했다.
“애완동물로 삼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그치?”
조금만 몸집이 작았더라면, 어떻게든 카델을 꼬드겨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얼리면 운반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원할 때 꺼내면 언제든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생명체라니. 참으로 탐났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그런 녀석이 가장 중요한 카델의 호감을 얻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실컷 안타까움을 표출하는 라이돈을 앞에 두고, 해룡은 서서히 입을 벌렸다. 다시금 물대포를 발사하려는 것이다. 나무를 휘게 할 만큼 대단한 수압이니, 정면에서 맞는다면 제아무리 라이돈이라도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돈은 태평하게 수다를 이어 갔다.
“너 말이야, 혹시 자식은 없어? 바다에 숨겨 뒀다면 나한테만 얘기해 줘. 말을 못 해? 그럼 신호라도 줘. 네가 죽으면 자식들은 살아남기 힘들 거 아니야. 내가 상냥하게 보살펴 줄게!”
해룡의 입 안으로 거품 가득한 해수가 맹렬하게 회오리쳤다. 턱이 우악스럽게 벌어지며, 짙은 색의 섬광이 아른거렸다. 금방이라도 물이 쏟아질 듯한 기세였다.
아래에서 해룡과 라이돈을 지켜보던 카델은, 위험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요정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라이돈이 방심하고 정면으로 공격을 맞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카델이 라이돈의 위로 비늘 갑옷을 둘러 주려던 때였다.
“말도 안 통하는 멍청이네. 정말 장난감으로 딱이잖아!”
활짝 웃은 라이돈이 불쑥 손을 뻗어 해룡의 콧잔등을 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쩌저저적―
하얀 손끝에서부터 투명한 얼음이 퍼져 나갔다. 손톱만 했던 얼음 조각은 흘러드는 라이돈의 마력을 따라 빠르게 해룡의 몸을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콧잔등과 눈, 날카로운 송곳니와 머금고 있던 해수, 기다란 목과 굵직한 몸통의 움직임이 차례차례 정지했다.
역병처럼 번진 얼음은 순식간에 해룡의 몸뚱이를 얼어붙였다. 주위의 온도가 내려가며, 살짝 열린 라이돈의 입새로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새빨간 눈동자가 눈앞의 얼음덩이를 무심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애교스럽게 눈매를 휘었다.
“혹시 모르니까, 바다를 한번 뒤져 볼까?”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한 그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하강했다. 라이돈의 마력은 단숨에 해룡을 압도했으나, 완전히 해치운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투명한 얼음 아래, 벌어진 입 속에는 여전히 회전 중인 해류가 고여 있었다.
카델은 급격히 내려간 온도에 잔기침을 뱉고는, 반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알아챈 그가 대검을 빼 들어 달려 나가고. 동시에 카델의 앞으로 착지한 라이돈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추워, 자기! 전부 끝날 때까지 꼭 끌어안고 있자. 응?”
“비켜 봐, 라이돈. 반이 안 보이잖아.”
“아하하! 뭐야? 반을 죽이고 싶은 거라면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또 못된 소리 하네.”
라이돈은 고집스럽게 포옹을 유지했으므로, 카델은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 너머로 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대하군.’
뜀박질의 속도와 비례하게, 대검에 둘러진 오라의 농도가 짙어졌다. 해룡의 그림자를 밟는 반의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며, 기술을 고심하는 눈빛에 예기가 어렸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하반신까지 포함한다면, 녀석의 크기는 아쉬브카와 비견할 만했다. 심장만을 노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긴 하겠으나, 안타깝게도 해룡의 심장이 어디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암살자 놈이라면 요령 좋게 찾아냈겠지만, 지금은 쓸모없이 기절 중이고.’
급소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저 육중한 몸을 통째로 도려내는 수밖엔 없다. 물론 그만한 양의 혈액을 모으진 못했으므로, 강한 위력을 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했다.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은 기술이 있었지.’
광전사는 혈액을 기반으로 전투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상대의 피를 취하며 전투의 시간과 비례하게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확연한 한계가 존재했다. 오라로 인한 이성 통제의 어려움과 전투의 예열 시간. 이성을 통제하는 일은 수많은 전투로부터 얻은 요령 덕에 문제가 줄어들었다지만, 예열 시간의 단축은 좀처럼 해결할 수 없었다.
[적월만찬] 같은 경우, 모아 둔 혈액이 없어도 주변의 혈액을 강제로 흡수하는 식으로 전투가 가능하다. 하지만 자칫 집중력이 흐려졌다간 자신의 혈액까지 빨아 먹혀 곤란한 일이 발생하고 만다.
때문에 반은 무수한 고심을 통해 나름의 방법을 강구했다.
“단장이 무서워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것이다. 짧게 혀를 찬 그가 끌 듯이 들고 있던 대검을 치켜올리곤, 그대로 제 팔목을 그었다. 곧장 벌어지는 상처 위로 붉은 핏물이 차올랐다. 핏물은 뜀박질의 반동을 따라 그의 팔을 적시고, 모랫바닥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동시에 피를 발견한 오라가 그의 몸을 타고 오르며 상처를 항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검붉은 오라가 상처를 헤집듯 파고든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