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에게 평화의 돌을 넘겨준 뒤, 카델은 마이뉴 왕국에 머물며 황제의 다음 임무를 기다렸다. 마이뉴 국왕은 왕국을 지키고 평화의 돌까지 찾아준 적린 기사단에게 아낌없는 호의를 베풀었으나, 성안에 머무는 한 그들은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없었다.
마이뉴 왕국이 고향인 루멘은 삼 보에 한 번씩 아는 얼굴을 만나 반갑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 가야 했고, 반은 기사단의 유명세 때문에 자신에게 들러붙는 호기심 많은 귀족을 향한 살의를 억눌러야 했다. 또한 가르엘과 요젠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오로지 밤에만 바깥을 돌아다녔으니. 유일하게 신난 이는 라이돈으로, 그는 왕실 요리사들을 제집 종처럼 부리며 끊임없이 새로운 디저트를 맛보았다.
그리고 그런 단원들을 뒤로한 채, 카델은 하루하루 머리를 혹사하며 지내야 했다.
‘시스템의 정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통제당하지 않아. 물론 한꺼번에 많은 생각을 하는 건 위험하니 적당히 텀을 주고는 있지만.’
그는 매일같이 시스템이 가진 진정한 목적과 이 세계선의 평화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종일 시스템을 생각하며 파고드는 건 자제했지만, 그를 제외하고도 카델의 두뇌를 필요로 하는 일은 많았다.
셀레브가 남긴 마계 소환진의 재구축이 차질을 빚고 있는지, 마법사들의 우는소리가 담긴 서신이 날아드는 탓이었다. 마침 카델은 마밀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두 마법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여 술식을 점검하고, 마법진 구동을 실험했다.
온종일 바쁘게 노동하거나, 홀로 상념에 젖어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피로에 녹아 침대에 쓰러져 버린다. 그런 단장을 개인 욕심을 위해 바깥으로 끌어낼 단원은 없었다. 그 라이돈조차 한밤중에 몰래 방으로 들어와 그를 끌어안고 잠드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황제의 새로운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적린 기사단은 지겨운 일상을 보내야 했다.
“여기가 우리 새로운 파견 지역이야. 어때?”
지도를 펼친 카델이 한데 모인 단원들 앞에서 가볍게 눈을 휘었다. 비록 고된 노동으로 눈 밑엔 다크서클이 내려앉고, 머리칼은 덥수룩하게 헝클어졌으나. 미소 짓는 얼굴에선 만족감이 번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라이돈을 향했다. 그리고 카델이 가리킨 지도 위의 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라이돈은, 곧 눈을 반짝이며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바다? 우리 바다로 가는 거야, 카델?”
“응. 여기 있는 무인도로 이동할 거야. 화이트 왕국 쪽 수색을 돕는 건데, 수색해야 할 섬이 많아서 도움을 요청했대.”
라이돈은 카델의 짐작보다 훨씬 더 기뻐하며 아낌없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가 섬으로 챙겨갈 간식거리를 정해야겠다며 종이와 펜을 찾으러 떠나자, 다시 시선을 옮긴 카델이 이번엔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화이트 왕국. 그곳은 가르엘이 이끌던 황혼 기사단이 있는 그의 고향이기도 했다. 카델과 눈이 마주친 가르엘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러 섬을 수색해야 하는 거라면 황혼 기사단과 협업할 일은 없겠네요. 숨어 있을 필요는 없겠어요.”
“맞아. 우리가 이동할 이 ‘페알르’ 섬엔 적린 기사단밖에 없을 테니까. 이 섬은 규모도 작고, 다른 섬보다 상대적으로 마물의 수도 적대.”
황혼 기사단은 크고 위험한 섬 위주로 탐색하고 있었기에, 이런 작은 무인도에까지 병력을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비교적 수색이 간단한 섬으로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
“그런 곳에 우리가 간다는 건 병력 낭비 같은데. 황제 폐하가 결정했다니 의외네.”
얘기를 듣던 루멘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적린 기사단 정도 되는 병력이 페알르 섬처럼 앙증맞은 구역에 배치되는 것은 낭비 같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자고. 우린 벌써 평화의 돌을 두 개나 찾아냈어. 나머지 기사단이 돌을 찾아낼 기회를 줘야지. 그동안 설렁설렁 탐색하면서 휴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위험 구역만 골라 원정을 떠나는 건 당장의 효율을 챙길지는 몰라도, 정작 중요한 때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황제 역시 적린 기사단을 계속 굴리는 것보단 적당히 힘을 아끼게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듯했고.
그렇게 적린 기사단의 ‘페알르 섬’ 행이 정해진 이틀 뒤. 그들은 마이뉴 국왕이 내어 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
“그럼 수고하십쇼, 기사님들!”
적린 기사단을 섬까지 안전하게 운반해 준 선장과 선원이 우렁찬 인사와 함께 퇴장하고. 마주 인사한 카델이 짐가방을 둘러메며 뒤를 돌았다. 그의 눈앞으로 뜨거운 햇살에 파묻힌 초목과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섬에 와 본 건 두 번째야. 무인도는 첫 번째고.”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모래 위에 손을 펼친 요젠이 말했다. 카델은 그런 요젠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다 같이 놀러 온 것도 처음 아니야?”
“……놀러 온 건 아니잖아.”
“다 마음먹기에 달렸지! 같이 탐험하러 왔다고 생각하자고. 화이트 왕국 측이 평화의 돌을 찾아내기 전까진, 우리에게 주어진 수색 장소는 이곳이 전부일 테니까.”
활기찬 카델의 말에 요젠 역시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처음 섬에 방문했던 이유는 그곳에 별장을 둔 공작을 암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느꼈던 불쾌함이나 자극적인 살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감각은 오로지 평화와 아늑함뿐이었다.
“섬 중심부에서 마물의 기척이 느껴져. 많지는 않고,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네. 수색하는 동안 조금만 정리하면 깨끗해지겠어.”
“그래? 그럼 일단은 야영지부터 만들자. 얼마나 오래 여기 묵을지 모르니까.”
페알르 섬에서의 탐색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화이트 왕국과 연결된 [울로]를 통해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그 후엔 왕국 측에서 보낸 배를 타고 복귀하면 된다. 그 말인즉슨, 평화의 돌을 찾기 전까지 언제까지고 섬에 머물러도 상관없다는 소리.
“단장, 잠깐 살펴보니까 안쪽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이나 버섯이 꽤 많아요. 팀을 나눠서 식량이랑 땔감, 야영지를 만들 재료들을 구해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새 섬을 들쑤시고 온 반이 손안 가득 담긴 붉은 베리를 카델에게 넘겨주었다. 몇 개를 집어 먹자, 혀끝으로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퍼졌다.
“그럼 제비뽑기로 결정하자. 다들 모여 봐!”
카델은 자신의 부름을 듣고 모여든 단원들을 훑어보았다. 가르엘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벌써 제비뽑기를 위한 나뭇가지를 챙겨 왔고, 루멘은 해안가에 둔 식량과 물을 흘기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여전히 모래를 매만지는 요젠과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반의 얼굴까지 확인한 그가 슬쩍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얜 또 어디 갔어.”
라이돈이 보이지 않았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갑판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요정이다. 배에서 내린 뒤에는 짐을 옮기느라 제대로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고. 설마 배에서 내리는 걸 까먹고 돌아가는 길은 아니겠지. 그렇게 카델이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던 때.
“아하하! 기분 좋아! 여기서 살고 싶어. 우리 계속 여기서 지내면 안 돼?”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흠뻑 젖은 라이돈이 모래사장으로 빠져나왔다. 앞섶을 풀어 헤친 흰 셔츠가 살갗에 달라붙으며, 균형 잡힌 탄탄한 몸매의 윤곽이 드러났다. 축축해진 머리칼을 털어 내며 다가오는 라이돈에게선 지금껏 느낄 수 없었던 남성미마저 비치고 있었다.
일순 라이돈의 몸매에 눈길을 빼앗긴 카델은, 자신이 라이돈의 몸을 보며 감탄했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고 표정을 굳혔다.
“놀이는 나중에 해라, 요정 놈. 다들 바쁜데 혼자 살판 났군.”
“흐응, 딱히 바빠 보이진 않는걸? 질투 나면 반도 수영하면 되잖아. 혹시 수영 못해?”
“도발해 봤자 내가 너랑 사이좋게 물놀이할 일은 없을 거다. 빨리 일이나 해.”
“나도 반 같은 칙칙한 인간이랑 바다를 누비고 싶진 않거든! 자기! 이따 나랑 수영하러 가자.”
라이돈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자극적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평소처럼 카델에게 달라붙었다. 옷 위로 차가운 바닷물이 느껴지며, 평소보다 진해진 체향이 풍겨 왔다. 카델은 의식적으로 라이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수영은 나중이야. 밤이 오기 전에 잠자리를 만드는 게 우선이니까.”
“그런 건 다른 애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니야?”
“안 돼. 가르엘이 나뭇가지를 챙겨 왔으니까, 저걸로 제비뽑기하자. 같은 길이의 나뭇가지를 뽑은 사람끼리 조를 나누는 거야.”
자꾸만 본능에 지배되려는 눈알의 기강을 잡으며, 카델이 가장 먼저 나뭇가지를 뽑아 들었다.
각 조의 임무는 식량 조달, 땔감 및 자재 수집, 야영지 건축으로 나뉘었다. 각 조에는 두 명의 인원이 배치되었으며, 라이돈과 반이 식량 조달, 요젠과 루멘은 야영지 건축, 가르엘과 카델이 자재를 수집하게 되었다.
“허억… 흐으…….”
조를 바꿔 준다고 할 때 그냥 바꿀걸. 카델은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를 하며 턱밑까지 쌓은 땔감을 힘겹게 운반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카델의 세 배는 될 법한 양의 재료를 모은 가르엘이 들고 있던 것을 얼음 수레 위로 내려 두며 고개를 저었다.
“바쁘게 재료 모으는데 자꾸 음란한 소리 내지 말아 주시죠, 단장님. 집중이 안 돼서 불편하네요.”
“음, 란… 같은 소리……!”
시뻘게진 얼굴로 비척비척 수레 앞까지 다다른 그가 짧은 기합과 함께 땔감을 던져 넣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닦으며 헉헉거리자, 가르엘이 부러 과장된 곤란함을 연기하며 말했다.
“입에 뭘 넣어 주면 조용해질까?”
힘드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말마저 나오지 않았다. 가르엘은 반쯤 풀린 눈으로 헥헥거리는 카델을 은근하게 응시하며 그의 앞에 섰다. 부드러운 턱선을 쓸어내린 그가 짓궂은 눈빛을 보냈다.
“먹을 건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여기 있는 건 나무와 몸뿐인데. 나무보단 내 걸 넣어 주는 게 좋겠죠?”
“……꺼져.”
기어이 대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발언을 한다. 카델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가르엘의 어깨를 밀쳤고, 순순히 밀려난 가르엘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쉬고 있어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까.”
가뜩이나 힘든데 황당한 소리까지 들으니 맥이 빠졌다. 카델은 구태여 가르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은 채 차가운 수레에 기대 완전히 늘어졌다. 그렇게 카델을 쉬게 한 가르엘이 부지런히 재료를 모으고. 두 사람은 금세 가득 찬 수레를 끌고 야영지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단장님.”
“왜.”
“화이트 왕국이 가진 글귀요. 이번엔 내용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들려줄 수 있나요?”
“나도 아직 못 외웠어. 가방에 들어 있을 텐데. 대충…… 바다 한가운데, 물과 섞인……. 아, 기억 안 나. 어차피 우리 쪽 섬엔 없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카델은 대충 대꾸하며 오만상을 구겼다. 뒤에서 수레를 밀어 주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얼음 마력으로 만들어진 수레는 쥐는 것만으로 한기가 올라와 주기적으로 손을 녹여 줘야 했고, 무게도 상당해 온몸의 체중을 실어 밀어야 했다.
“만에 하나 평화의 돌이 이 섬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봉인석이 7개가 있다고 그 7개를 플레이어가 전부 모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수집을 완료하면, 약간의 스토리 뒤에 바로 봉인에 돌입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카델은 평화의 돌을 2개 모은 시점에서 적린 기사단의 임무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7개 중 3개나 한 기사단이 발견하는 건 스토리상으로도 억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저도 저희가 평화의 돌을 3개째 발견하는 건 행운의 영역을 넘은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혹시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혹시라는 건 없……!”
그렇게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하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수레를 밀고 가던 때. 차갑지만 튼튼하게 굴러가던 얼음 수레가 폭삭 내려앉았다.
“어……. 이런.”
분해된 수레와 함께 열심히 모은 땔감과 돌, 이파리들이 널브러졌다. 가르엘은 수레의 손잡이만 덜렁 든 채 헛웃음을 뱉었고, 무너진 수레를 따라 바닥에 엎어진 카델은 짜증스레 외쳤다.
“라이돈!”
*
한편, 식량 조달을 맡은 반과 라이돈.
“열매를 얼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는 거냐, 요정 놈! 맛이 떨어진다고!”
반은 속까지 얼어붙은 코코넛 열매를 내던지며 역정을 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목소리가 걸걸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분노를 받은 대상은 평온하기만 했다.
“흐응, 귀 아파. 직접 따는 건 귀찮은걸. 마법으로 대충 건드리면 우수수 쏟아지는데. 왜 굳이 몸을 움직여야 해?”
“그건 바로 네 마력이 얼음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쓸모없는 요정. 너 때문에 못 먹게 된 열매가 몇 개인 줄 알기나 해? 계속 방해할 거면 꺼져!”
“세상에!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으면 입이라도 고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산짐승 같은 태도로 어떻게 우리 자기 옆에서 살아남은 거야? 카델은 나처럼 뽀얗고 귀여운 남자를 좋아해.”
“그딴 거구를 하고서 잘도 귀여움을 논하는군. 제발 꺼져라. 부탁이다.”
“아하하! 내가 왜 반의 부탁을 들어줘야 해?”
라이돈은 반이 기껏 모아 온 베리 더미 위로 냉기를 흩뿌리며 깔깔댔다. 그에 기어코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은 반이 대검을 빼 들어 마구잡이로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지금 싸우자는 거야, 반? 내가 못 할 것 같아? 반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난 카델한테 혼나지 않을 거라고!”
“여기서 널 죽이면 단장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겠지.”
“날 죽여? 반이? 꿈도 야무지네! 아하하!”
라이돈은 새로운 놀거리가 생긴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마구 냉기를 날려 댔다. 신경이 온통 살벌한 반의 공격에만 쏠린 탓에, 카델에게 만들어 준 얼음 수레를 유지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렇게 두 남자가 본분을 잊고 각각 분노와 재미에 빠져 버린 무렵. 재료가 도착할 때까지 터를 정리하는 것밖엔 할 일이 없는 루멘과 요젠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지 않는군.”
동료 넷이 떠난 지 어언 3시간째. 루멘과 요젠은 할 일 없이 모래사장에 걸터앉아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오롯이 바다를 감상할 수 없는 요젠은 그림자 분신을 꺼내 카델을 지켜볼까 했으나, 일전 카델이 자신의 감시를 질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인내했다.
둘 사이로 지독한 침묵이 흘렀다. 워낙 과묵한 두 남자가 만났으니 필연적인 일이었다. 파도는 잠잠하고, 하늘은 조금씩 주홍빛으로 물들고, 바람은 선선하다. 참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
하지만 별 대화도 없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3시간씩이나 지속되면, 슬슬 지루함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루멘이 요젠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것도 없으니 주변을 둘러보고 오지. 언젠간 단원들이 돌아올 테니, 넌 여기 있어라.”
대답은 없었으나, 루멘은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싫었다면 참지 않고 말했을 사내이니. 하지만 루멘이 몇 걸음을 떼기도 전.
“기다려.”
요젠의 단호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그에 주춤한 루멘이 제 발아래를 내려 보았다. 꿀렁이는 암기가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불만이 있다면 말로 하지 그래.”
“……뭔가 있어.”
“……?”
“뭔가가…….”
요젠은 그 ‘무언가’의 정체를 짐작하는 듯 미간을 좁힌 채 천천히 일어섰다. 루멘 역시 요젠이 감지한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주위를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척에 민감한 루멘에게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요젠이 발목을 붙들 리는 없건만.
루멘은 발목을 휘감고 있던 암기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사위를 경계했다. 검집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가며, 섬 안쪽의 숲을 응시하는 눈빛에 예기가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쪽이다.”
요젠의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내내 잠잠했던 바다에서 폭포수처럼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루멘의 눈동자로 당혹감이 서렸다.
“저건…….”
그것은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첨탑 같기도, 힘 있게 치켜든 거인의 팔뚝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근접한 묘사는, 아마 날개 없는 해룡이 아닐까.
섬 전체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괴생명체가 조금씩 몸을 수그렸다. 놈의 자그마한 눈동자는 바다를 품은 듯 무서울 정도로 새파란 색을 띠었고, 그 안에는 오로지 살의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콧등 옆으로 해초처럼 늘어진 수염이 들썩이며, 괴생명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범상치 않은 자태에 루멘은 자연스럽게 녀석이 인간의 말을 꺼낼 것이라 예상했다.
저리도 거대한 몸뚱이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요젠마저도 코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알아차렸을 정도. 당장 녀석의 입에서 이 섬에서 사라지라는 말이 나온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괴생명체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불청객을 내쫓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벌어진 입 안 가득 투명한 바닷물이 차오르며, 눈부신 광휘가 물을 감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해라!”
어마어마한 양의 물줄기가 그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