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5화 (375/521)

“어서 당겨! 빨리!”

가장 먼저 밧줄 앞으로 달려간 카델이 있는 힘껏 줄을 잡아당겼다. 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작은 요정의 무게로 당기고 있다고는 상상도 안 될 만큼 강한 인력이 느껴졌다.

단단한 밧줄이 손바닥과 마찰하며 쓰라린 고통이 느껴졌으나, 카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에 그다지 급한 기색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반이 서둘러 달려왔다.

“손 놓으세요, 단장! 제가 할게요.”

반은 카델의 부상을 염려하며 그를 떼어 놓고는, 대신해 밧줄을 잡았다. 카델이 잡던 때와는 달리 밧줄은 더 이상 아래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우물 안쪽에서 뭔가 위험한 걸 발견한 걸까? 아니면 숨이 막혔나? 당황해서 밧줄을 놓치면 안 될 텐데.

반에게 밧줄을 맡긴 카델은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로 우물 앞에 섰다. 우물의 가장자리를 짚은 그가 수면을 내려 보았다. 반의 힘을 따라 밧줄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으나, 아래에서 비치는 그림자는 없었다.

“라이돈! 괜찮아?”

소리 높여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카델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입가를 문지르던 그때.

“단장!”

반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축 늘어진 밧줄을 쥐고 있는 반의 모습이었다.

“……뭐야?”

“밧줄을 당기던 힘이 사라졌어요. 놓친 모양이에요.”

“라이돈…….”

카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떨리는 눈빛에선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낭패감이 스쳤다.

“들어가서 구해야 해!”

반이 아무것도 딸려 나오지 않은 밧줄을 우물 바깥으로 끌어내자, 카델이 다급하게 끝을 쥐고 자신의 허리에 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부하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대장이 들어가 봤자 구해야 할 인원만 늘어날 뿐이야. 내가 가지.”

루멘은 카델의 손에서 밧줄을 뺏어 들어 허리에 단단히 고정했다. 곧장 우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그의 옆에서, 요젠이 말했다.

“나도 암기를 흘려보내 볼게. 물속이라 제대로 감지하긴 어렵겠지만, 라이돈이 살아 있다면 알아챌 수 있을 거야.”

부하들의 도움에 울상이 된 카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된 수련을 했는데 물에 빠진 부하 한 명 제대로 돌볼 수 없다니. 달갑지 않은 무력함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장님. 라이돈 경은 무사할 겁니다.”

가르엘은 축 처진 카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했다. 확신하는 듯한 말투에 카델도 혼란을 덜고 침착해지려 애썼다. 여기서 패닉에 빠져 봤자 정말 필요한 때에 라이돈을 돕기 어려워질 뿐이었다.

“그럼 내려가 보지.”

그렇게 준비를 마친 루멘이 우물에 발을 올리고. 카델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입수를 지켜보려던 순간.

“푸하!”

사방으로 물을 흩뿌리며, 건장한 사내 한 명이 우물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라이돈!”

젖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차가운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카델은 황당하다는 듯 선 루멘을 뒤로한 채 라이돈에게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감쌌다.

“너 괜찮아? 밧줄은 어쩌다 놓친 거야? 걱정했잖아!”

라이돈은 본인이 얼마나 큰 걱정을 끼쳤는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는 자신을 감싼 카델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해사하게 웃었다. 내리쬐는 햇볕이 물기 맺힌 속눈썹과 촉촉한 뺨, 불그스름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그의 미소를 한층 아름답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격양되었던 카델의 태도는, 그 순진무구한 미소에 빠르게 맥이 풀렸다.

“너 정말…….”

“이것 봐, 카델! 엄청 깊게 박혀 있어서, 작은 몸으로는 빼내기 어렵더라고. 양손을 다 써야 해서 밧줄도 버렸어.”

라이돈은 물속에 있던 팔을 들어 손안의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짙은 청록색의 돌. 매끈하게 다듬어진 돌의 안쪽에선, 마치 물결 같은 기운의 파동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카델이 라이돈이 내민 돌을 움켜쥔 순간.

「보유 봉인석 : 2/7」

두 번째 봉인석을 획득했다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베네 마을의 오래된 주택 앞.

하룻밤을 마을에서 묵기로 한 그들은 빈집을 골라 들어갔다. 부하들은 미리 가져온 식재료와 직접 따 온 과일 따위로 저녁을 준비했고, 카델은 영문도 모른 채 부엌에서 내쫓겨 식사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단장의 체력과 그의 요리 실력을 고려한 부하들의 선택이었으나. 카델 개인에게는 썩 좋지 못한 배려였다. 홀로 팔자 좋게 저녁노을을 감상하고 있기에, 그의 마음은 뒤숭숭하기만 했으니.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실속 없는 일도 없는데 말이지.”

아직까진 자신이 참여한 탐색 작전에서만 봉인석을 획득했으나, 곧 타국의 기사단도 하나둘씩 봉인석을 찾아낼 것이다. 그들이 모든 봉인석을 모으면, 연구를 끝낸 포탈을 타고 마계로 입성하게 될 테지.

쉽지 않은 전쟁일 것이고, 위험한 싸움이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변수에 대비해 두어야 승리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209명이나 되는 빙의자가 전부 실패한 전쟁이야. 그걸 내가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내가 뭐라고.’

가진 것이라곤 단원들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맹목적인 사랑밖에 없다. 시스템이 부여한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라는 버프가 사라지면, 제대로 마족을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무조건 승리해야 했으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그를 위축시켰다. 앞선 이들의 실패가 겹겹이 쌓여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으로 누군가의 윤곽이 들어찼다.

“쿤라?”

난데없는 등장에 카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쿤라는 그런 카델을 내려보며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세계를 구해야 할 녀석이 이렇게 축 처져 있어서야.”

“……저녁 먹기 전 정도는 처져 있어도 되잖아요. 항상 의욕 넘치게 있을 수는 없다고요.”

“의욕을 잃더라도 자신감은 잃지 마라. 이 몸이 곁을 지키는 한, 네가 쉽게 무너질 일은 없으니.”

그는 담벼락에 기댄 카델의 앞에 우뚝 섰다. 자신을 향한 당당한 시선에, 카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자신감을 1/10만 떼어 줘도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네요.”

“그 정도로 되겠느냐? 내려간 어깨를 올리려면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만.”

“왜 남의 어깨 각도에 참견이에요.”

“새침하게 구는 걸 보니 아예 무기력한 건 아닌가 보군.”

“누가 새침하게 굴었다고!”

짜증스레 눈을 흘기자, 쿤라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접혔다. 그는 카델의 머리칼을 헤집듯 쓰다듬고는, 담벼락에 기댄 등에 손을 끼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뭐예요?”

“따로 이야기 좀 하지.”

“여기서 해도 상관없잖아요. 애들은 다 집 안에 있는데.”

“듣는 귀 좋은 놈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벌써 이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녀석도 있으니,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동하자는 소리다.”

부하들이 들어서 귀찮은 일이 생기는 이야기라면, 분명 시스템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델은 곧 쿤라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

쿤라가 카델을 이끈 곳은 마을 초입에 자리한 어느 대장간 앞이었다. 카델은 차갑게 식은 용광로나 벽에 걸린 도끼 등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왜 하필 대장간이에요? 앉을 곳도 없어 보이는데.”

“네 성가신 부하들의 귀를 피할 거리를 셈하니 이곳이 적당했어. 앉고 싶다면 바닥에 앉거라. 허약한 하체를 가졌으니 어디든 널브러지고 싶겠지.”

“뭐라고요? 왜 갑자기 시비예요?”

“사실을 말한 거다만. 배려를 해 줘도 난리군.”

쿤라는 카델의 헛웃음을 못 들은 체하며 큼직한 모루를 찾아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고 씩씩대는 그의 면전에다 툭 던지듯 말했다.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또 다른 기억이라니. 빠르게 굳은 낯이 쿤라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쿤라는 분명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고 했어. 나한테 말해 줬던 게 잊힌 기억의 전부가 아니었던 건가.’

지금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건만. 혹시 해내야 하는 임무가 추가되려는 걸까. 긴장하며 경청하는 카델에게, 쿤라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 기억 속엔 카델 라이토스가 등장하지 않았어. 전쟁이란 거창한 단어로 불리기엔 부족함이 있는 기억이었다. 그저 인간과 마족의 전투였을 뿐이지. 그리고 그 전투 역시 반복됐다.”

“카델 라이토스가 없는 전투라면……. 다른 인간의 몸에 빙의자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그 인간이 누구였는지, 어떤 생김새를 가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아주 흐릿하게 존재만이 떠오를 뿐이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인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중요한 건 반복되던 전투, 그 자체야.”

쿤라의 기억 속 인간과 마족의 전투는, 지금의 마계 전쟁보다 훨씬 보잘것없었다. 쿤라 역시 매번 전투가 되풀이될 때마다 똑같은 감상을 내놓았다.

‘허약한 것들의 전투로군. 시시하다.’

전투만 본다면 별것 없는 사소한 다툼일 뿐이다. 하지만 그 전투는 이번 마계 전쟁처럼 되풀이되며 세계선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 반복이 끝난 시점. 쿤라는 세계 소멸의 굴레를 끊은 그 시점에 주목했다.

“전투는 ‘인간이 승리함’과 동시에 종료됐다. 인간이 승리하고서야 세계는 이곳의 생명에게 ‘미래’를 허락했지. 마치 이번 마계 전쟁처럼 말이다.”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던 쿤라는, 자신을 향한 혼란한 눈빛을 마주하며 결론을 내렸다.

“널 이 세계에 보낸 ‘시스템’이란 녀석은, 세계의 소멸과 재생을 통해 뭔가를 ‘시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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