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라의 힘을 대폭 끌어온 마법진 해제 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세 명의 고위 마족, 에드워드, 샌디, 디포렉은 절명. 지휘관을 잃은 마물들은 남은 기사들이 착실하게 정리해 나갔다.
이후 도착한 지원 마법사들은 전부 마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작업을 끝마친 카델 또한 모든 지휘를 청혈 기사단의 단장, 아드몬에게 맡긴 뒤 마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카델이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지원 마법사들은 치유사와 더불어 폭주 마법사들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중 2/3가 사망했다. 폭주 상태가 오래도록 유지된 탓이었다. 폭주 마법사를 제어하던 지원군 중 다수도 심한 내상을 입었다.
그리고 마밀 키파. 마력 고갈 상태에서도 끝까지 다수의 마법사를 제압했던 그는, 지원군이 도착한 지 30분 만에 결국 의식을 잃었다.
“…….”
마밀의 막사 안. 카델은 낡은 침상 옆에서 어두운 낯으로 제 스승을 응시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선 제법 평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으나,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나 간헐적으로 발작하는 몸뚱이는 그의 상태가 심각함을 알리고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카델의 뒤편에 선 아드몬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역시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상태였다. 부하들에게 치유술을 우선 양보한 탓에, 아직까지 붕대 하나 제대로 감지 못하고 있었다.
아드몬의 의연한 위로에 카델이 머리를 숙였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스승님이 다치셨고, 청혈 기사단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면목이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드몬의 입장에선, 겨우 데려온 지원군이 어떠한 의논도 없이 통째로 전장에서 이탈한 끔찍한 사고였을 것이다. 전투가 마무리된 뒤, 카델을 찾아왔던 아드몬은 실제로 몹시 화를 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정확한 전말을 알릴 수 없던 카델은 자신의 이탈을 적룡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었다는 변명으로 무마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카델의 힘 덕에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아드몬도 카델을 계속 몰아붙이기엔 곤란한 입장이었다.
“잘못의 인지는 중요하나, 과거의 잘못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마밀은 질긴 인간이죠.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 걱정은 잠시 멈추고 경도 이만 쉬십시오. 평화의 돌 수색에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가장 큰 문제였던 마법진은 정리했으나, 진짜 목적인 평화의 돌은 여전히 찾아내지 못했다. 적린 기사단에선 심각한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청혈 기사단이 수색대를 추리는 대로 작전에 합류하기로 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마밀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에게는 뜬금없던 단장의 도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단원들도 있었으니.
‘……진실을 말할 수는 없겠지.’
반복되는 빙의 속에서, 오로지 승자의 세계만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세계가 소멸한다는 게 그런 의미였을 줄은 몰랐는데.’
마계 전쟁 퀘스트의 실패 페널티는 세계 소멸. 그것은 전쟁으로 인한 멸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아온 그들의 기억이, 추억이. 모두 사라진 채 또 다른 전쟁을 반복해야만 하는 끔찍한 절망이었다.
정신없는 전투가 마무리되고, 그의 생각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럴수록 마주한 현실에 착실하게 무게감이 더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큰 부담을 지고 있는지, 얼마나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지. 절절히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막사에서 빠져나온 카델이 갑갑한 가슴 가득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
“……적룡의 기운을 받는 부작용이었다고?”
단원들이 모인 막사 안. 카델은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침묵 속에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루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룡의 힘을 사용하는 데 대가가 따른다는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설마 우리가 걱정할까 봐 위험 요소를 숨겼던 건가?”
“아니야. 나도 쿤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뿐이야. 내 마력과 쿤라의 힘이 과하게 얽히면서 일시적인 부작용이 생겼던 모양이야. 다행히 쿤라가 빨리 알아채 줘서, 안전한 곳에서 수습할 수 있었어.”
그럴듯한 변명을 짜내려 노력했다. 그들에겐 무엇도 알려선 안 됐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홀로 부담을 짊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하들은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어 왔다. 그런 그들에게 이 세계가 사실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고,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의 승패에 존속이 갈린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이 스스로의 삶에 허무를 느끼지 않길 바랐다.
그들은 그저 여태껏 해 왔던 대로, 자신의 곁에서 함께 싸워 주면 된다. 알아봤자 고통밖에 늘지 않을 진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카델은 덤덤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의심의 눈초리도, 미심쩍은 시선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쿤라 님이 예상하지 못하는 일도 있네요.”
“뭐, 적룡이라고 전지전능하진 않을 테니까. 인간 하나에게 이만한 힘을 나눠 준 적도 없었다고 하니.”
“적룡의 기운이 네 기운을 흩뜨리는 것 같진 않았는데. 갑자기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그래. 애초에 이상한 기미가 보였다면 쿤라가 가장 먼저 알아챘겠지. 아무런 전조가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던 거야.”
“그 도마뱀이 카델 몰래 이상한 제약 같은 걸 걸어 둔 거 아니야? 날 심부름꾼으로 쓰려던 때처럼!”
“그런 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가는 무수한 추측 속에서, 딱 한 명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델은 자신을 걱정하는 단원들 틈에서 조심스레 시선을 옮겼다.
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말없이 카델을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하나, 쉽게 입을 뗄 수 없는지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했다. 모두가 있을 때는 말하기 곤란한 얘기인 걸까.
차분하게 부하들의 걱정을 덜어 주던 카델은, 이내 피곤하니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내보냈다. 그에 반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등을 돌렸다. 모두가 나갔음에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길 택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카델이 반의 팔을 붙잡았다.
“……단장?”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대답해 줄게.”
평소였다면 가장 먼저 이것저것 질문하며 제 상태를 살폈을 사내였다. 그런 그가 답지 않게 소심하게 굴며 망설이니. 생각해야 할 것이 넘쳐나는 와중에도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반은 카델에게 잡힌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좀 전보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카델과 시선을 맞췄다. 오라가 사라진 황금색 눈동자는 묘한 씁쓸함을 품고 있었다.
“빙의와 관련된 문제, 맞죠?”
조심스러운 질문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반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낸 그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맞아. 너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내가 카델 라이토스의 몸을 빼앗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야.”
자신이 신여환임을 알고 있는 반이었기에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이었다. 어쩌면 반이라면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세계의 운명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끝까지 함께 싸우자며 용기를 불어넣어 줄지도.
“조금 성가셔질 뻔했지만, 아까 말한 대로 쿤라가 잘 처리해 줬어.”
하지만 카델은 말하지 않았다. 반이 의지할 수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의지하고 싶은 남자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자신은 분명 나약해질 것이다. 그에게 기대고, 징징거리고, 힘겨워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되겠지. 그런 것을 원하진 않았다.
패배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 싸움이었다. 믿음과 의지는 엄연히 다르다. 카델은 자신의 부하들을 믿고, 그들을 위해 싸우고 싶었다. 그들에게 매달려 부담을 덜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결코 패배해선 안 되는 싸움을 치르기에, 카델은 스스로를 몰아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은 전부 끝났다는 듯 태연하게 구는 카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몸은 카델 라이토스의 것이지만, 내가 사는 몸이기도 하니까. 함부로 굴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
“뭔가 더 있잖아요.”
“…….”
“그런데도 말을 안 해 주는 건, 이 비밀을 알고 있는 게 나이기 때문이에요?”
슬프게 굳어 있던 반의 눈빛이 떨리고, 표정은 점점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는 당황한 채 멈춰 있는 카델의 어깨를 그러쥐며 틀어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떠난 뒤에 죽을 뻔했다는 거. 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거…… 왜 숨긴 거예요?”
말하지 않은 이유야 간단했다.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를 속이고, 기만하고, 우롱했다. 반의 부재에 한참을 방황하다 겨우 기회를 얻었고, 간신히 그를 되찾았다.
배신감에 절절매며 괴로워하는 상대에게, 과거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라고? 투정 따윌 부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반에게 자신의 지나간 고통을 일일이 되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으스대듯 상처를 들이밀고, 어서 위로해 달라며 어리숙하게 사랑을 갈구하기도 싫었다.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 지금의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지, 그걸 증명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어서.”
굼뜬 대답에 반의 눈빛이 떨렸다. 카델의 속내를 모르는 그에게 있어, 이 대답은 회피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신에게 털어놓아 봤자 실망밖에 얻을 수 없으니 말하지 않는 것인가.
“여환아.”
“…….”
“나는, 나는 지금껏 네 괴로움을 모른 척하고 살았어. 날 기다리는 동안 빈자리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 고통에 비할 바는 못 됐을 거라고.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 내 갈등에 비하면 가벼운 감정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던 거잖아. ……힘들었던 거잖아.”
“이미 지나간 일이야. 지금 그때 감정을 끄집어낸다고 뭐가 달라지는…….”
덤덤하게 말을 끊어 내려는 카델의 반응에, 불쑥 다가온 반이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흥분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호흡이 목덜미를 뜨끈하게 달궜다.
“위로해 주고 싶으니까. 내 감정에만 집중하느라 널 방치했던 과거를 만회하고 싶어.”
“……반.”
“기회를 줘요.”
갑갑해진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켜자, 익숙한 체향이 한가득 들어찼다. 숨을 쉴 때마다 반의 체향이 아른거려, 눈을 감으면 꼭 그와 둘뿐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끝을 두려워하는 나약함도 없는 안락한 세계.
그리고 카델은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애정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끝이 찾아왔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남김없이 사랑을 퍼 주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들이 내미는 애정을 인지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큰 애정을 주어야 한다며 크기를 재단하기 급급했다.
애정을 받는 것 또한 사랑의 일종이었다. 애정을 되돌려 주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그 소중한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자신의 애정에 집중하지 않는 상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일 것이다. 자신의 애정을 알아주지 않아 몇 번이고 외쳐 보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다, 결국엔 지쳐 버릴지 모른다.
이 모든 생각이 결국 그에게 투정 부리고 싶어 지어낸 비겁한 변명이 아닐까. 그리 고민하면서도, 카델은 반의 목을 끌어안고 따뜻한 온기에 기댔다.
“당장은 말해 줄 수 없지만, 나에겐 특별한 힘이 있어. 그 힘으로 네가 떠났다는 걸 알았지. 운 나쁘게도 한창 전투 중이던 때였거든. 결국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순간 넋이 나가 버렸고……. 공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어.”
“……얼마나 크게 다쳤던 거예요.”
“음……. 다른 애들 말로는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다더라. 가르엘이 아니었다면 분명 죽었겠지.”
넓고 단단한 어깨에 뺨을 기대자, 투박한 손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몸의 통증보다도, 네가 떠났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어. 혼수상태였지만, 쿤라의 도움으로 의식은 깨어 있었거든. 쿤라가 만들어 준 공간에 들어가서, 질리도록 울었어. 난 내가 그렇게 오래 울 수 있는 남자였는지도 몰랐어.”
“…….”
“다 끝나고 깨어났을 때도, 뭔가가 무너진 것처럼 허전하고 괴로웠어. 어딜 봐도 네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힘든데도 할 일은 잔뜩 쌓여 있어서, 힘든 티도 못 냈어. 그런데…… 사실 내내 힘들었어.”
힘들었다. 이 한마디를 꺼내 놓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속이 곪을 때까지 꾹꾹 눌러 삼키기만 했다. 투정 부리기 싫었고, 찌꺼기 같은 감정을 내보이며 의지하기도 싫었다. 사랑만 줘도 아까운 사람들이니까. 자신의 지저분한 상념 따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힘들었어, 반.”
“……미안해요, 힘들게 해서. 다신 그럴 일 없어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대도, 꼭 옆에 있을게요. 맹세해요.”
몸을 으스러뜨릴 듯 조이는 압박감이 되레 편안하게 느껴졌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몸이, 진심을 담은 위로가 좋았다.
“힘들면 숨기지 말고 말해 줘요. 난 단장보다 머리도 좋지 않고, 큰 그림을 볼 줄도 몰라요. 그래서 단장의 고민을 멋지게 해결해 줄 순 없겠지만…….”
카델의 머리 위로 입을 맞춘 그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언제든 안아 줄 수 있어요. 기대 주세요. 단장이 기대면, 난 온 마음을 다해 받쳐 줄 테니까.”
“…….”
“이건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라, 신여환한테 하는 얘기예요.”
그의 입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린 제 이름에, 심장이 뻐근하게 조였다. 이 세계에도 여전히 진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붙드는 사람.
반의 존재 자체가 위로였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옆에서, 진짜 자신을 위해 싸워 준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 몇 번이고 다짐할 수 있었다. 이 부족한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너희의 세계를 지켜 주겠노라고.
“내 이름, 다시 불러 줘.”
“……여환아.”
“또.”
“신여환.”
“계속…….”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을 끊임없이 듣고 싶었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받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반은 더 이상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대신 맞물려 있던 몸을 떼어,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췄다.
도장을 찍듯 꾹 눌린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낸 그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생물을 보듯 여환을 응시하며 말했다.
“사랑해, 여환아.”
입밖으로 낸 말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고백보다, 자신을 향한 눈빛이 더욱 열렬했다. 몇 가지 단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은 감정이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출렁였다.
그랬기에 자신 역시 들끓는 대답 대신, 반의 뺨을 쥐고 열 오른 입술을 문댔다. 겹친 입술 새로 달뜬 숨결이 오가고, 서로를 더듬는 손끝에선 떨림 섞인 욕망이 샘솟았다. 서로의 영혼을 쓰다듬듯 깊숙하게 파고드는 손길은 오로지 현재만을 염두에 둔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이 감정은, 분명한 나의 것이다. 확신할 수 없는 일임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감정에 끝은 없다. 하루하루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