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0화 (370/521)

“내 부하들이 멀쩡한데 인간들이 밀리고 있다고요? 말도 안 돼요. 전술 아니에요?”

[적의 수가 상당해. 이 정도 인원으로 지금껏 버텼다는 것 자체로 칭찬할 만하다. 보아하니 저 마법진도 소환진의 일종인 것 같군. 서둘러 부수지 않으면 전멸할 거다.]

쿤라의 말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자신과 마밀은 마법진을 해제하며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건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도착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고요의 산맥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원군의 도착이 너무 느렸다.

“쿤라, 느껴지는 마력은 없어요? 마법사의 수를 파악해 줘요.”

최대한 많은 마법사를 모아 힘을 합쳐야 했다. 다급히 물어 오는 카델에게, 쿤라는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곳엔 마법사가 없다.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군.]

“단 한 명도……?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전장의 후방, 이곳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 모여 있어. 그곳에서 상당한 마력이 느껴진다.]

최전선도 아닌 후방? 파괴해야 할 마법진도, 보호해야 할 아군도 전부 이곳에 있다. 그런데 왜 마법사들이 물러났단 말인가? 혹시 그곳에 마법진을 파괴할 해결책이 있는 것일까.

쉬이 납득 가진 않았지만, 그곳에 마법사들이 전부 모였다는 말은, 마밀 또한 함께 있다는 소리였다. 마밀이 허튼 일에 힘을 낭비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 판단한 순간.

쿠과광!

먼 곳에서부터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은 카델이 인상을 구기며 폭음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돔 형태의 불 장막. 멀리서 보아도 그 크기가 범상치 않은 불의 장막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하고 있었다. 폭음은 장막 내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연달아 울려 퍼지던 폭음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완전히 멎은 정체불명의 폭발과 함께, 장막 역시 자취를 감췄다.

저곳에 마밀이 있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카델이 쿤라에게 비행을 부탁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밀 님은 저기서 뭔가를 막고 있느라 발이 묶인 거야. 다른 마법사들도 힘을 보태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엔 마밀 님 혼자 만든 장막 같았는데.’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마밀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자신이 전장을 벗어난 후로는 홀로 아군의 방어를 전담해야 했을 테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정도 수준의 장막을 만들 수 있다는 데에 감탄이 나오면서도, 불안한 걱정이 들어찼다.

“쿤라, 당신은 돌아가서 마물을 견제해 줘요. 가능하다면 부하들에게도 곧 돌아갈 테니 전투에 집중하라는 말을 전해 주고요.”

[이 몸을 전서조로 사용할 셈인가 보군.]

“내 승리를 도와야 하잖아요. 어서요.”

땅으로 내려온 카델이 불만에 찬 적룡의 콧잔등을 두드리자, 강하게 콧김을 뿜은 그가 묵직한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쿤라가 떠나는 모습을 일별한 카델이 등을 돌렸다. 너머에서부터 괴상한 비명과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게 숨을 고른 카델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내달리고. 얼마 안 가, 트인 시야 속으로 당혹스러운 장면이 드러났다.

“이게 무슨…….”

그곳에는 양손이 포박된 채 널브러진 수십의 인간이 있었다. 격리된 것처럼 한곳에 둥글게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교도관처럼 인간들을 감시하고 있는 한 남자. 그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마밀 님!”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온 게냐.”

잔뜩 지친 목소리였다. 서둘러 마밀의 상태를 살핀 카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코와 턱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지저분하게 뭉쳤고, 그 위로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흘렀다. 붉게 충혈된 눈가로도 조금씩 피가 차오르고 있었다. 붉은 피로 난잡하게 더럽혀진 그의 얼굴에선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밀은 대답 없는 카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 앞의 마법사들은 지원군이다. 전부…….”

제 앞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던 마밀이 일순 크게 비틀거렸다. 빠르게 그를 낚아채 부축한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죄송해요, 스승님.”

마력 고갈 상태였다. 돌입한 지 얼마 안 된 상태가 아니다. 마력 고갈 상태에 진입하고도 한참이나 무리하게 마력을 짜낸 것이 틀림없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행위였고, 대마법사인 마밀이 그 위험성을 간과했을 리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본인의 목숨을 걸어 왕국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

마밀은 카델의 부축을 받으며 거칠어진 숨을 고르더니, 이내 날카로운 어투로 대꾸했다.

“전장에서 사과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도 없지. 감성적으로 굴지 마라.”

“하지만…….”

“이 앞에 있는 마법사들은 전부 폭주 상태에 돌입했다.”

“……네?”

“마법진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어. 마력이 역류해 집단 폭주에 걸린 거지. 난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폭주하는 이놈들의 마력을 억눌러야 한다. 남의 나라의 귀한 인력이니 함부로 죽일 순 없지 않으냐.”

집단 폭주라니. 그렇다면 하늘에서 보았던 불의 장막은 전부 이 마법사들의 마력으로부터 근방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던 건가. 얼핏 봐도 50명이 넘는 대인원이다. 이만한 인원의 마력을 지금의 마밀이 홀로 통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제가, 제가 할게요. 스승님은 어서 치료부터 받으세요.”

“네 부하들이 마물을 잘 막아 주고 있다만, 이대로 간다면 결국 최후의 보루를 내어 주게 될 거다. 마법진을 파괴해. 너 혼자 해결하기엔 벅차겠지만, 나머지 지원군이 도착하는 덴 시간이 걸릴 거다. 네가 해내야 해.”

“하지만 여기서 계속 폭주를 막다간 스승님이……!”

죽을지도 모른다. 당장 쓰러져 사경을 헤맨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발을 구르는 카델의 옆에서, 마밀은 묵묵히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몇 차례 힘주어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겐 지키고자 맹세한 미래가 있다. 그건 나의 미래가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조국의, 그곳에 사는 젊음의, 그리고 너의 미래지.”

“스승님…….”

“쉽게 죽진 않는다. 그러니 걱정 말고 가 봐. 네게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마밀은 게임의 주요 NPC다. 메인 스토리에서 마밀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게임 속 상인이 죽으면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아이템을 교환하겠는가.

그러니 괜찮다. 마밀은 절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지막까지 자신의 스승으로서 있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은 그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서두르거라. 시간이 많지 않아.”

마밀은 발을 떼지 못하는 카델을 가볍게 밀치며 중심을 잡았다. 자신에게 남은 힘은 얼마인가. 얼마나 더 정신을 잡고 설 수 있는가. 몸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목구멍에서부터 울컥울컥 차오르는 죽음의 향기가 낯설었다. 당장 마법을 멈추지 않으면 내일의 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마밀은 카델을 떠나보내길 택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친우의 소중한 혈육.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세상 어디에 제자의 발목을 잡는 스승이 있단 말인가.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구차하게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도착하는 대로 이곳에 보내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빨리… 어떻게든 빨리 돌아와서 스승님을 도울게요.”

“그래.”

우선순위는 명확하다. 이곳에서 마밀을 배려한답시고 폭주 마법사들을 상대한다면, 최전선의 기사들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들이 밀린다면 다음은 마이뉴 왕국의 차례. 결국 카델은 마밀을 뒤로한 채 걸음을 돌려야 했다.

“절대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정말이지, 무리한 걸 요구하는 덴 도가 텄지.”

마지막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마밀을 확인하던 카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마밀은 다시금 번지기 시작하는 마력의 파장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젠가.”

주문처럼 그리운 이름을 읊조린 그가 주먹을 그러쥐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충혈된 눈 위로 맑은 안광이 맺혔다.

“나는 아직이다.”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 자신이 지켜 낸 미래가 꽃피우는 것을 볼 때까지. 그때까지 오랜 친우와의 만남은 보류하겠노라. 다짐한 그가 쇠 맛 나는 입 안을 훑어 냈다.

“얘들아!”

가까운 곳에 있는 이동 관문을 타고 단숨에 주둔지까지 이동했다. 도착한 주둔지는 절반 이상이 허물어진 막사와 마르지 않는 불꽃, 괴로운 비명으로 처참하게 물들어 있었다.

카델이 소리 높여 부하들을 부르자,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무언가가 카델을 와락 감싸 안았다.

“어딜 다녀온 거야, 카델!”

라이돈이었다. 맞닿은 가슴 위로 쿵덕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델은 미안함을 담아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 없이 버텨 줘서 고마워. 다른 애들은?”

“몰라.”

“라이돈.”

“알아서 오겠지!”

짜증스럽게 대꾸한 그가 몸을 떼어 내곤 카델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지, 눈물을 흘리진 않았는지. 정성스러울 만큼 유심히 훑어 내던 라이돈이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건너편을 일별했다.

“단장!”

“단장님!”

반과 가르엘, 루멘과 요젠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카델은 한달음에 달려온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크게 다친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잘한 생채기나 그을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가르엘이 치유술을 아꼈을 리는 없으니, 제법 지독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난 지금부터 마법진 파괴에 집중해야 해. 다른 마법사들이 지원 온대도 전부 마밀 님 쪽으로 보낼 거야. 그러니 라이돈, 네가 아군 보호를 전담해 줘. 가르엘, 넌 광역 치유술을 준비해 주고.”

걱정하는 부하들에게 거짓으로나마 부재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카델은 요젠에게 자신의 개인 호위를, 반과 루멘에게는 청혈 기사단과의 협동을 이어 갈 것을 명령했다.

한차례 숨을 고른 그가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죽지 않은 세 고위 마족이 쿤라를 추격하며 맹렬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쿤라의 힘은 슬슬 회수해야곘어. 내 마력과 합친다면 마법진 파괴 속도를 높일 수 있을 테니까.’

쿤라가 고위 마족을 묶어 두지 못한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군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버텨 줘야 했다. 마이뉴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버티는 수밖엔 없다.

‘다음 지원군이 제때 도착해 줘야 할 텐데…….’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그가 서둘러 마법진 내부로 파고들었다. 우선 마법진을 덮는 대량의 마력을 퍼뜨린 뒤, 어딘가에 있을 핵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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