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쿨럭!
격한 기침을 따라 턱 아래로 핏줄기가 흘렀다. 전류라도 흐르는 듯 전신이 욱신거렸고, 온 혈관이 쥐어짜이는 격통이 느껴졌다. 마력 고갈 상태에 진입한 탓이었다.
“마밀! 그 이상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되네!”
“그럼 사용하지 않을 만한 상황을 만들어 보지 그러나!”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카델과 그를 쫓아간 단원들의 부재. 주요 전력의 이탈로 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세 고위 마족을 선두로 차례차례 등장한 적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기세로 불어나고 있었다.
지원군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도착한대도 그들은 마법진의 파괴가 아닌 전투에 투입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친 아군을 둔 마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혹사해 마법을 짜내는 것뿐.
그가 피워 낸 불꽃이 적이 선 땅을 불태우고 있었다. 초록색과 보라색, 푸른색이 섞인 다채로운 불꽃은 적군이 아군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아슬아슬하게 방어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상공의 적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래서 날개 없는 것들이랑 진격하기가 싫었는데. 쯧.”
신경질적인 인상과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고위 마족. 에드워드는 양팔에 휘감긴 칠흑의 사슬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어진 사슬이 늘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날카로운 창처럼 꼿꼿하게 서 기사들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사슬에 꿰뚫린 시체는 불구덩이 속으로 끌려가 수습할 새도 없이 타올랐다.
마밀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아무리 대마법사인 그라도 마력 고갈 상태에서 다수의 적과 아군의 보호를 한꺼번에 도맡을 수는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카델.’
적린 기사단. 그들의 조력이 절실했다.
“크하학! 여기 다 죽어 가는 마법사 한 마리가 있구만. 쓰레기들을 보호하느라 진이 빠진 건가? 그래, 그래. 마법사는 아군을 잘 만나야 실력 발휘가 편하지. 운이 나빴어.”
마밀의 위에서 또 다른 고위 마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목덜미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뱀 문신이 인상적인 사내. 디포렉이었다. 비행 중인 디포렉의 발밑으로 발판처럼 자리한 마법진이 일렁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마밀이 그를 공격하려 했으나.
“날 죽이는 것보단 보호에 전념하는 게 나을 텐데? 물론 어느 쪽이든 성공하진 못하겠지만.”
그의 공격보다 아군의 비명이 빨랐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것은,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허공에 생성된 무수한 마법진. 그리고 그 속에서부터 빠져나오는 괴수들이었다.
괴수는 사자나 늑대, 곰 따위의 짐승과 비슷한 형태를 띠었으나, 그 몸체는 뼈와 살이 아닌 마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괴수들이 지면으로 착지하며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상대해야 할 적들이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다. 그 절망적인 장면을 응시하며, 마밀은 직감했다. 만약 5분 내로 적린 기사단이 복귀하지 않는다면. 마이뉴 왕국은 함락당할 것이다.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살, 높게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을 따라 나부끼는 잎사귀. 이 모든 숲의 속삭임이 카델의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졌다.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그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폐부 가득 공기를 들이켰다.
“이제 진정이 되느냐?”
쿤라는 옆에서 그런 카델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한이 든 것처럼 벌벌 떨리던 몸도 차분해졌고, 끊임없던 울음도 그쳤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델을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으며 아래쪽을 눈짓했다.
“그럼 슬슬 이것 좀 놓아 주지 그러냐.”
카델이 움켜쥔 옷자락이었다. 숲에 도착한 이후, 겁이 난 어린아이처럼 꼭 붙들고선 도통 놓아 주질 않았다. 평소라면 민망함을 분노로 표출하며 앙칼지게 옷자락을 놓았을 테지만, 그는 고집스러울 만큼 꿋꿋하게 손을 풀지 않았다. 결국 그를 놀려 먹는 것을 포기한 쿤라가 옷자락 대신 제 손을 쥐여 주었다.
“……돌아가야 해요. 부하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잔뜩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린 카델이 눈꺼풀을 들었다. 조용한 환경에 머물며 사라졌던 현실감은 차근차근 되돌아왔고, 복잡하게 뒤섞인 머릿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단장의 부재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전투에 집중하고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전투에서 빠지게 된다면, 그 부담은 전부 혼절을 목전에 둔 청혈 기사단과 마밀의 몫이 될 터.
이대로 전장에 복귀한다면 다시금 고장 난 로봇처럼 굳어 버릴지 모르나, 그렇다고 단장인 자신이 안전한 곳에 눌러앉아 벌벌 떨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카델의 마음을 알아챈 듯, 묵묵히 그를 응시하던 쿤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에 널 데려오기 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당신이 했던 말이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자신을 찾아왔던 쿤라가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뭔가를 말했던 것 같기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어깨를 으쓱하자, 쿤라가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중요한 얘기다. 이번엔 잘 새겨듣도록 해.”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지금이어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네가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해 줄 테니.”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이유. 그런 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진즉에 깨닫고 있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카델의 앞에서, 쿤라는 맞잡은 그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며칠 전, 나는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209번의 마계 전쟁을 치렀지. 전부 똑같은 전쟁이었다. 마계의 하나뿐인 공주, 에밀리아 스웰르가 일으킨 전쟁이었어. 또한 그 무수한 싸움에서, 카델 라이토스 역시 209번의 패배를 거듭했다.”
“……네?”
절로 얼빠진 반문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눈빛이 쿤라의 흔들림 없는 시선과 굳은 표정을 훑어 내렸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런 때에 시시한 농담을 할 자도 아니고.
부산스레 눈을 깜빡이며 쿤라의 말을 되새기던 그가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전 209번이나 전쟁을 치른 기억이 없어요. 이건 제가 처음 겪는…….”
“그래. 네겐 처음이 맞아. 지금 너와 함께하는 인간들 역시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더군. 몇몇은 가끔 겹치기도 했다만, 그마저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카델 라이토스의 곁을 지킨 녀석은 없었다.”
“잠깐만요.”
쿤라는 카델의 이해를 재촉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마주 보며, 눈앞의 인간이 자신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니까 쿤라,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건…….”
“…….”
“나 이전에도 ‘카델 라이토스’의 몸에 빙의했던 인간이 있었다는 말 같은데요. 제 생각이…… 맞아요?”
“그래.”
곧장 돌아온 긍정의 대답에 카델이 탄식 같은 숨을 뱉었다. 자신이 첫 번째 빙의자가 아니라고? 쿤라의 말에 의한다면, 첫 번째는커녕 무려 210번째 빙의자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앞선 209명의 빙의자가 모조리 전쟁에서 참패했다니. 그렇다면 패배한 빙의자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시스템은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조차 클리어의 특전으로 내걸었어. 그렇다면 실패한 영혼은…….’
지금껏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실패했을 때의 일을 상상해 봤자 의욕만 떨어질뿐더러, 부하들의 존재가 자신을 실패의 늪에 발끝 하나 들이지 못하도록 이끌었으니까. 자신이 걱정한 것은 오로지 부하들을 놔둔 채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승리의 미래뿐이었다.
심각한 낯으로 뺨을 쓸던 카델이 쿤라에게로 떨리는 시선을 두었다.
“당신은 왜 이제야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거죠?”
“이 세계의 누구도 내 기억에 함부로 손을 댈 순 없다. 그러니 이 몸의 기억을 억누르고 있던 건, 이세계의 힘이겠지.”
“시스템이 당신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고요?”
“기억뿐만이 아니야. 녀석은 몇 번이고 이 세계의 시간선을 통째로 지워 버렸다. 빙의자가 실패해 죽음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 세계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소멸해 버려. 미래를 빼앗기는 거야.”
“말도 안 돼……. 어째서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카델 라이토스가 없는, 마계 전쟁에 실패한 세상은 유지할 의미가 없다는 거겠지. 나 역시 시스템이 이 세계에 그렇게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 쿤라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끝까지 이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카델에게, 아니, 신여환이라는 인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의 영혼에 간섭해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210번째 싸움에서도 사라진 기억을 되찾지 못한 채 이 삶이 온전하게 지속되리라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시스템은 그의 생각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강력한 존재가 ‘카델 라이토스’에게 집착하는 이유와 계속해서 빙의자가 생겨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니 내가 모든 걸 기억해 낸 이 시간선에서, 넌 승리해야만 한다. 네가 승리해야만 이 세계는 미래를 얻을 수 있어.”
이번 카델은 죽어선 안 됐다. 210번째 카델이 죽고 211번째 카델이 찾아온다면. 자신은 또다시 모든 기억을 잃을 것이다. 새로운 카델이 자신의 기억을 되찾도록 도우리란 기대는 망상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전쟁을 이끌어 왔던 209명의 빙의자 중 그 누구도 ‘영혼 분리 작업’ 같은 행위를 원하지 않았어. 그들은 처음부터 고요의 산맥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날 만나 진실을 들은 인간은 널 포함해 단 두 명. 하지만 널 제외한 인간은 자신의 진짜 감정이 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만을 원할 뿐이었어. 그 녀석은 나의 힘을 요구했고, 나는 내어 주지 않았다.”
“…….”
“내가 시스템에 간섭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 인간은 네가 유일해. 다른 시간선에서 똑같은 기회가 찾아올 확률은 지극히 낮다.”
쿤라는 겹친 손에 힘을 주었다. 고려조차 해 보지 않았던, 황당한 진실에 일그러진 표정을 응시하며,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제 진심을 전했다.
“네가 나의, 이 세계의 마지막 기회다.”
이미 충분히 거대한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다. 그 무게에 짓눌려 아이처럼 울었던 것이 고작 1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더욱 거대한 운명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전부 이 작은 인간의 몫이었다. 그의 어깨에 전능하다 여겼던 자신의 미래까지 얹어야 한다는 현실은,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깊은 무력감마저 안겼다.
“……그러니 날 도와주거라.”
*
「시스템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 버프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 재가동.」
말썽을 부렸던 시스템은 걱정과 달리 금세 복구되었다. 무사히 카델 라이토스의 영혼이 돌아와 평소와 같은 사고가 가능했으나. 머릿속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지러웠다.
‘이전 빙의자들이 고요의 산맥을 돌아보지 않았던 건, 쿤라의 입지를 그저 이벤트 NPC 정도로 봤기 때문일 수 있어. 아니, 애초에 정상적으로 메인 퀘스트를 진행했다면 고요의 산맥을 넘을 일은 없지. 내가 쿤라를 만난 것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요젠을 찾으러 가기 위해서였으니까.’
‘히어로 오브 나이츠’에는 무수한 기사들이 존재한다. 게임처럼 간단하게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넓은 세계를 누비는 동안 모두가 같은 기사를 만날 일은 없다. 다른 빙의자들은 전부 다른 경로,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며 다른 기사들을 영입했을 것이다. 자신 또한 요젠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고요의 산맥을 넘지 않았을 것이고, 쿤라를 만나게 될 일도 없었겠지.
‘확실히 다음 빙의자가 쿤라를 만나고, 쿤라가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도록 몸을 내어 줄 확률은 낮겠어.’
쿤라의, 이 세계의 마지막 기회. 카델은 전신을 할퀴는 세찬 바람 속에서 긴 숨을 내쉬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짐을 떠안아 버린 기분이었다. 급격히 막중해진 임무에 얼떨떨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목표는 같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세계는 부하들의 세계. 부하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싸우는 한, 승리의 결과는 같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묘한 찜찜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조금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이 애매한 기분의 원인을 찾아내고 싶었으나, 지금은 세계의 비밀보단 당장 패배할지도 모르는 전투가 급했다.
때문에 카델은 복잡한 생각을 접어 둔 채 쿤라의 등에 납작 엎드렸다. 적룡의 속도라면 아주 늦기 전엔 전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룡의 뜨거운 숨결이 허공을 가르며 대지를 강타했다. 지면과 부딪힌 불꽃은 바람과 섞여 팽창했다. 더욱 강력해진 화염은 불순물을 제거하듯 무더기로 마물을 쓸어 갔고, 스치듯 지나간 불꽃에도 마물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갑작스러운 적룡의 지원에 아군은 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다.
‘부하들은? 마밀 님은 어디 있지?’
상공에 있는 탓에 아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물의 수보다 인간의 수가 월등히 적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을 뿐. 줄어든 인원이 사망한 것인지 후퇴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중 부하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이곳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테다.
눈에 불을 켜고 지면을 훑는 카델을 태운 채, 쿤라는 자유롭게 하늘을 활보했다. 그는 솟구치듯 날아드는 매서운 창을 피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 부하는 전부 멀쩡하다. 아무래도 인간들이 밀리는 형세인 것 같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