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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환진 재생이 시작됐다. 카델은 모든 빛을 흡수할 기세로 암울하게 일렁이는 마기를 주시했다. 마기의 양이 늘어날수록 더 넓은 곳에서 소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군은 대낮이나 돼야 도착할 것 같다더군. 별 기대는 말고, 일단은 이쪽에서 해제와 분석을 도맡자꾸나.”
그의 옆으로 다가온 마밀이 피곤한 낯으로 투덜거렸다. 카델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원군이 일찍 도착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마법진이 바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지원이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
“……몸은 괜찮은 게냐? 내 앞에선 멀쩡한 척 굴더니 나가자마자 골골거리기나 하고. 이래서야 마음껏 부려 먹기 힘들어지지 않느냐.”
“걱정 말고 마음껏 부려 먹으세요. 지금은 완전히 회복했으니까요.”
오늘 하루 걱정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막사에서 나오자마자 부하들을 마주쳤던 카델은, 추궁과 다를 것 없는 그들의 걱정에 일일이 대꾸하며 건강을 증명해야 했다. 덕분에 왕성했던 기력이 절반은 깎여 나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시작하죠, 스승님. 소환진 해제는 저희 쪽에서 전담할 테니, 스승님은 분석에 전념해 주세요.”
“그러마.”
마법사들이 소환진 해제를 진행하는 동안, 나머지 기사들은 소환된 마물을 처치하기로 했다. 카델은 가장 가까운 소환진을 찾아 곧장 해제 작업에 착수했다. 아직 마력은 충분하니, 장기전을 고려해 배분에만 신경 써 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소환진 위로 마력을 불어넣은 순간. 무언가 이상을 감지한 것처럼, 카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왜 이러지?’
익숙한 마력이다. 지금껏 수도 없이 사용했고, 수도 없이 느꼈던 기운.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마법을 전개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해졌다.
그런데 어째서.
“카델?”
갑자기 경직된 카델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라이돈이 다가왔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을 말없이 올려 보았다. 평소처럼 해사한 얼굴.
“왜 그래? 또 몸이 안 좋아?”
속이 좋지 않았다. 라이돈의 얼굴을 오래 볼수록 속이 더부룩하게 울렁거렸다. 라이돈의 탓은 아닐 것이다. 설마 다시 몸에 이상이 생기려는 걸까. 곤란하다. 여기서 자신이 쓰러진다면, 소환진 분석은 물론 해제 작업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흐음…….”
“정말 괜찮아, 라이돈. 어서 소환진 해제하러 가.”
겨우 라이돈을 돌려보낸 후에도 요란하게 들썩이는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느낌이었다. 제 것임이 분명한 마력의 존재가 생소했고, 질리도록 본 얼굴들이 낯설었다. 꼭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격리되어 붕 뜬 듯한 기분이었다.
“뭐가 문제인 거야.”
이를 갈 듯 중얼거린 카델이 다시금 소환진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의 사용법은 똑같다. 언제나처럼 몸 안의 마력을 방출하면 됐고,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카델은 쉬이 소환진 해제를 진행할 수 없었다.
“왜…….”
마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몸 안의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기묘한 감각. 반사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쥔 카델이 쿤라의 이름을 불렀다. 이 모든 이상 현상이 쿤라와 관련 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역겨운 감각을 감내하며 아무리 마력을 불어넣어도, 쿤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의 대꾸조차 없었다.
식은땀이 났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호한 죽음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제대로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해제하지 못한 소환진에서 점점 짙어지는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대로라면 코앞에서 등장하는 레드 맨 군단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아프더라도 전부 끝내고 아프란 말이야.’
이런 곳에서 허둥댔다간 모두가 위험해진다.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마밀은 여전히 평소의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여기서 자신이 물러난다면 라이돈과 가르엘, 두 명이서 소환진 해제를 전담하게 될 것이다. 실질적으론 라이돈 홀로 무리하게 마력을 쥐어 짜내야 하겠지. 그런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정신 차려.’
스스로를 채찍질한 카델이 크게 심호흡했다. 쿤라의 기운을 받은 부작용이든, 지금껏 쌓인 피로의 결과물이든. 지금 이곳에서 쓰러질 순 없다.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뜬 그가 소환진 위로 있는 힘껏 마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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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이 들어맞았다. 이것은 단순한 소환진이 아니다. 마법진에 포함된 방대한 술식의 일부. 인간의 마력에 반응하여 차례차례 깨어나는 특수한 술식이었다.
소환진을 없애야만 마물의 등장을 저지할 수 있지만, 마력으로 소환진을 없애는 순간 새로운 마법진의 발동이 진행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술식을 구상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으나,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마법진의 발동이 코앞이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소환진을 해제했다. 마법진은 이미 발동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발동을 막기 위해선 소환진 해제를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군은 끝도 없이 몰려드는 레드 맨 군단을 상대해야 할 터.
소환되는 마물의 총량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장기전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마족이 등장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평화의 돌 수색이 이보다 늦어져선 안 됐다.
‘이젠 정면 돌파밖엔 답이 없다. 이 마법진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꼼짝없이 지켜봐야 하는 꼴이 돼 버렸어.’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법진의 발동이 조금만 더뎠다면. 분명 마땅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마법진의 원리를 밝혀낸 시점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마밀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우선 카델에게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드몬을 포함한 나머지 기사들에게 알려 봤자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등장하는 모든 적을 섬멸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임무.
하지만 카델은 달랐다. 그는 곧 발동될 마법진 파괴를 위한 마력을 비축해야 했고, 단원들을 통솔해 전략을 구축해야 했으며, 이후 도착할 지원군과의 협력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마밀이 카델에게 정보를 전달하려던 순간이었다.
키이잉―
내내 마기만 뿜어 대던 소환진에서부터, 날카로운 공명음이 퍼졌다. 하나의 소환진에서 시작된 공명음은 차례차례 번져 나갔고, 이내 귀를 틀어막지 않고는 못 버틸 만큼 강력한 진동을 일궈 냈다.
마밀은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꿋꿋이 사위를 살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원인이 마법과 관련되어 있다면 마법사는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이내 마밀은 이 어마어마한 진동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새로운 마법진이 나타났다!”
직전까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소환진은 말끔히 자취를 감췄다. 대신 나타난 것은, 소환진이 있던 범위를 아우르며 등장한 거대한 마법진. 그것은 아군이 선 땅을 뒤덮은 채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명 마법진의 발동이 코앞이긴 했다. 그래도 약간의 여유는 남아 있었어. 소환진을 한 번에 10개씩 해치운 게 아니고선 이렇게 빨리 마법진이 발동될 리 없건만.’
이리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나 많은 양의 소환진을 단번에 해제할 순 없다. 해제에 필요한 마력의 양도 모르는 어느 얼간이가 마력을 무식하게 쏟아부은 것이 아니라면, 마법진이 그토록 많은 마력을 단번에 흡수할 일은 없었다.
마밀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혹감을 느꼈으나, 그 감정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우와아, 맑은 하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죠? 좋아요, 너무 좋아요!”
“시끄러워, 샌디. 어차피 앞으로 질리게 보게 될 하늘인데. 촌스럽게 정신 팔리지 말라고.”
“크크, 그렇게 말하는 너도 잔뜩 들뜬 것 같다만.”
점점 사그라지는 진동 사이로 낯선 음성들이 파고들었다. 마밀은 대지를 뒤덮은 마법진에서 방대한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마치 연기처럼 바닥을 휘감은 마기는, 빠른 속도로 마족과 마물을 생성해 냈다.
“에드워드, 봐요! 저 새파란 하늘! 저 구름은 에드워드의 엉덩이를 닮은 것 같은데요!”
“눈앞의 인간들에게나 집중해.”
“어디 봐. ……크하학! 정말 똑같군그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란히 등장한 세 명의 고위 마족. 두 남성과 한 여성의 조합이었다. 그들은 우후죽순 생겨나는 적들 틈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것은 그들의 화려한 외모나 거대한 몸집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렇게 큰 날개는 처음 보는군.’
그들에게는 여타 고위 마족에게선 볼 수 없던, 박력이 느껴질 만큼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박쥐의 날개 같던 다른 고위 마족의 것과는 달리, 그들의 것은 흑조의 날개처럼 거대하면서도 부드럽고 촘촘한 깃털로 뒤덮여 있다. 그 새까만 깃털에선 윤기마저 흘렀다.
타락 천사를 연상케 하는 퇴폐적인 날개. 그 특징적인 날개는 그들을 마족이 아닌 죄악의 심판자처럼 보이게 했다.
날개의 크기가 전투력과 비례하는가. 그런 연구 결과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오히려 그가 상대했던 까다로운 고위 마족들은 전부 체구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심코 압도되어 버릴 만큼, 녀석들의 날개는 독보적이었다.
‘어디부터 공격할 셈이지? 아직까지 보이는 고위 마족은 셋이 전부.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위 마족이 등장할지는 모른다. 마족보다 심각한 것들이 등장할 수도 있고, 위험한 마법이 발동될 수도 있지.’
마법진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소환되는 적의 수는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할 정도. 마계 도시의 일부쯤은 소환되지 않을까, 절로 불길한 가정을 세우게 될 만큼 아득하기만 했다.
일단은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방어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 낫겠지. 그리 판단한 마밀이 카델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
카델이라면 마법진이 발동된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제가 죽고 못사는 부하들에게 장막부터 두르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마밀의 눈에 비친 카델은 예상과 한참은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우뚝하게 선 채, 새롭게 등장한 고위 마족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둘러진 장막은 없고, 마력을 끌어모으는 낌새도 없다. 그는 꼭 겁에 질린 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무언가의 책략일까? 아니다. 마족을 바라보는 카델의 얼굴에선, 마밀조차 놀랄 만큼 극명한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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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마법진 발동이 현실이 되고, 마족과 마물, 고위 마족까지 속속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이른 등장이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사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카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소환진 위에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마력을 우악스럽게 불어넣고, 어렵사리 해제를 완료한 순간 떠오른 시스템 창.
「시스템 오류! 허락되지 않은 외부의 힘이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손상되었습니다. 복구가 필요합니다.」
「자가 회복 모드 돌입. 시스템이 일시 차단됩니다.」
「시스템 고유 버프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가 해제됩니다.」
「복구까지 남은 시간 : ???」
이 세계에 빙의된 뒤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시스템이, 처음으로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