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4화 (364/521)

마이뉴 왕국.

마밀은 수척하게 메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충혈된 눈을 굴렸다. 며칠째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선잠과 쪽잠을 합쳐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쉬는 것이 전부였고, 물약이란 물약은 모조리 퍼다 마셨다.

처음에는 조금 무리해서 마력을 빼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규모 소환진은 국경선을 징그럽게도 채워 갔으나, 이곳의 전력으로 막지 못할 양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이 총출동해 해제한 소환진은, 날이 바뀌자마자 재생성됐다.

날마다 새롭게 생겨나는 소환진은 그 마력의 근원조차 특정할 수 없다. 마법사들은 극도의 피로와 밑 빠진 독처럼 빠져나가는 마력에 점점 지쳐 갔다.

그리고 소환진 발생 13일 차가 된 오늘. 절반 이상의 마법사가 마력 고갈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서 마밀이 굳건하게 버틸 수 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가진 마력의 총량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기나긴 싸움에서 마법사로서의 요령이나 재능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밀 님! 바깥에서 대량의 레드 맨 군단이 소환됐습니다!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천막을 나서자마자 꾀죄죄한 몰골의 기사 한 명이 달려들었다. 마밀은 건조한 눈빛으로 기사를 훑어 내곤, 시선을 옮겨 너머를 보았다. 연기와 폭음, 고함이 난무하는 전장이 코앞이었다.

“마밀 님!”

대답 없이 멈춰 있는 마밀의 모습에 기사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오랜 싸움에 마법사들만큼이나 기사들도 지쳐 있었고, 치유사의 도움은 한정적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뛰어난 재능을 갖춘 전투 인력의 개입이 절실하다.

“……마족도 이 정도로 쥐어짜이면 피 한 방울 한 나올 거다.”

“예……?”

“그만 징징거리고 빌어먹을 기사단장에게 안내해. 이 불쌍한 노인네의 마력관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써먹을 모양이니, 소원대로 해 줘야지.”

앞장선 기사의 뒤를 따르는 마밀의 걸음은 재빨랐으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비쳤다.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왕국에서 대대적인 지원 요청을 보낸다고 했으니, 자신이 쓰러져 명을 다하기 전까진 마법사들이 도착할 것이다. 문제는 깐깐한 동맹국들이 쓸 만한 인력을 넘길 것이냐인데…….

쭉정이 같은 마법사들의 대거 등장을 상상한 마밀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주둔지를 벗어난 그의 눈앞으로 그새 양을 불린 소환진과 붉은 개미처럼 아군 사이를 파고드는 레드 맨 군단이 들어찼다.

“아드몬! 이게 무슨 개난리지? 그만큼 소환진을 줄여 줬으면 마물은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줄이긴 뭘 줄여 줘! 노안이 왔으면 말이라도 조심히 하게!”

청혈 기사단의 단장, 아드몬 키토. 그는 마밀의 신경질을 받아치며 적진의 한가운데로 검기를 날렸다. 마이뉴 왕국 대표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답게 그에게선 여전히 활력과 독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밀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드몬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임박했다는 것을.

“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나. 국왕 폐하께 새로운 기사단을 설립하자 제안하자고. 그게 싫다면 호계 기사단처럼 머릿수라도 무식하게 늘렸어야지. 그것도 아니라면 루멘 도미닉 같은 인재라도 훔쳐…….”

“정신 공격을 할 거면 적에게 하게!”

“자네가 싼 똥 치우면서 이 정도 잔소리도 못 하나?”

짜증과 심술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드몬은 그런 마밀을 일별하며 질린다는 듯 몸을 털었다. 한때 마법사를 동경했던 아드몬이 마법사의 ‘마’ 자만 들어도 치를 떨게 된 것은 전부 마밀 때문이었다.

영창을 해야 하니 입을 꿰맬 수도 없고. 저런 정신 나갈 것 같은 잔소리를 전장에서까지 들어야 한다니. 이보다 통탄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아드몬이 폭풍 같은 잔소리를 감당하는 동안, 마밀은 허공으로 마력을 불어넣어 술식을 생성했다.

“내가 졸도한 동안 도착한 전보는 없나? 지원 오는 마법사들의 실력 정도는 미리 알아 두고 싶은데.”

“실력이 어떻든 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 아닌가?”

“쭉정이들 데리고 소꿉놀이나 할 바에는 손잡고 사이좋게 지옥에나 떨어지는 게 낫지.”

“전장에서 그런 재수 옴 붙은 소리를 하고도 칼침을 맞지 않는 건 자네뿐일 걸세.”

마밀은 아드몬의 경악에 찬 목소리에도 꿋꿋하게 술식을 완성해 갔다. 그의 정면으로 성인 남자의 손바닥만 한 붉은색 마법진이 여러 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마법진은 중앙에서 마밀의 마력을 흡수했고, 그 주변으로 마력을 분산시키는 다수의 마법진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걱정 말게. 걱정하는 쭉정이만 오진 않을 테니.”

“자네의 희망 사항을 말하라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쓸모없는 소리 대신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는 법을 배우게.”

“젠장! 나도 저렇게 늙어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처럼 늙지는 않겠어!”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게, 아드몬. 마법사들의 실력을 아냐고 물었네.”

그렇게 아군의 평정심을 착실하게 무너뜨리던 마밀이 마지막 술식을 완성할 무렵. 쏟아지는 잔소리에 맥을 못 추리던 아드몬이 발악처럼 외쳤다.

“자네 제자가 성질머리만 전수받은 게 아니라면 실력이야 좋겠지!”

*

“이야, 역시 스승님이네.”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린 카델이 맞은편을 향해 감탄사를 뱉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광대한 범위를 아우르며 솟구치는 불기둥. 푸른색과 자주색, 붉은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깔의 불길이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비치는 빛깔과 열기가 저 안에 담긴 마력의 농도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정제된 화염 마력만을 이용한 마법은, 다속성 마법사인 카델에게 선망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법을 보기만 해도 주인을 구분할 수 있는 겁니까?”

그의 옆에서 함께 불기둥을 지켜보던 가르엘이 물었다. 그러자 카델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내 스승님의 마법이니까 알 수 있는 거야. 저 정도로 농축된 마력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하긴 그렇네요. 대마법사 마밀 키파의 마법이니, 어중간한 마법사들은 흉내도 못 내겠죠.”

자신이 아무리 재능 있는 인간의 몸을 빌리고, 쿤라의 힘을 끌어 주인공의 특전을 있는 대로 사용해 봤자다. 마밀에게는 그런 주인공의 스승만이 가질 수 있는 격이 있었다.

잠시 마밀의 그칠 줄 모르는 마법을 감상하던 카델이 햇빛을 막던 손을 내려 부하들을 불렀다.

“서두르자. 나서기 싫어하는 스승님이 저 정도 마법을 사용할 정도면, 상황이 꽤 심각한 거야.”

카델이 아는 마밀이라면 아무리 전쟁 중이더라도 시답잖은 일에 마력을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마법사인 그가 전면으로 나서야 할 때는 얼마 없다. 그를 보조하는 마법사들이 무너졌거나, 마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적을 밀어 내지 못할 때. 이미 마이뉴 왕국은 마법사들을 대거 요청한 상황이니, 마밀에게 얹어진 부담이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동 관문을 넘어 동맹군의 주둔지로 넘어간 카델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했음을 깨달았다.

“……지옥이 따로 없는데요, 단장.”

반의 말대로였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전투의 열기로 가득 찬 전장이 아니다. 지칠 대로 지쳐 쇠약해진 몸뚱이를 어디에도 뉠 수 없는 환자들로 인해 마치 형무소처럼 보였다.

부상자들은 천막의 안팎으로 널브러졌고, 아무 데나 몸을 기댄 기사와 마법사들은 물약을 잡히는 대로 털어 넣으며 헐떡댔다. 그들은 싸움이 아닌 고문을 당하는 사람 같았다.

“전투는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 소환진이 주둔지 앞까지 밀고 들어온 것 같아.”

코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감지한 요젠이 동맹군의 위치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청혈 기사단장과 마밀은 주둔지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방어전을 유지 중인 듯했다.

“예상보다 더 끔찍하네. 가르엘, 너는 여기서 치유술을 준비해. 루멘, 너는 가르엘을 도와서 치료가 급한 환자들을 찾아 줘. 나머지는 나랑 같이 전장으로 합류한다.”

빠르게 인력을 나눈 카델이 곧장 마밀을 찾아 이동했다. 바로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요젠의 말대로, 그들은 얼마 걷지 않아 소환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이 낭자한 전장. 레드 맨 군단은 근육이 오그라든 몸뚱이로 꾸역꾸역 바닥을 기었고, 기사들은 반쯤 정신 놓은 눈으로 그런 마물을 찍어 눌렀다. 그들은 이미 정신력 싸움에 돌입해 있었다.

무기력과 처절한 생존욕이 뒤섞인 기묘한 전장. 그 속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밀 님!”

여전히 너저분하게 늘어진 백금발의 머리칼과 어깨의 각도만 봐도 느껴지는 권태로움. 그의 정체를 확신하며 달려간 카델은, 자신을 돌아보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새된 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지.

바싹 마른 대답과 함께 마밀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놀란 카델보다 먼저 그를 부축한 이는, 청혈 기사단의 단장. 아드몬 키토였다.

“때맞춰 잘 와 줬소. 방금 마이뉴 왕국의 인재 하나가 골로 갈 뻔했지 뭐요.”

“지금부턴 적린 기사단이 소환진을 관리하겠습니다. 스승님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아드몬 경.”

“알겠소.”

아드몬은 부하에게 마밀을 주둔지까지 데려다줄 것을 명령했다. 기사에게 부축받은 마밀은 카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곤 실려 가듯 떠났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카델이 심각한 낯으로 뺨을 쓸었다.

‘항상 피곤한 안색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힘들어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야.’

창백하다 못해 파랗기까지 한 낯빛, 퀭하게 번진 눈 밑, 탁해진 안광과 여기저기 터진 실핏줄. 반사적으로 생존 여부를 확인했을 만큼 마밀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그간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때라도 제자 노릇을 해야겠지.’

이제껏 마밀에게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그는 이 세계에서 카델이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그런 사람을 전장 한복판에서 쥐어짜인 걸레처럼 무참히 쓰러지게 놔둘 순 없었다.

“마물을 완벽하게 처리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정리해 두었소. 소환진을 빠르게 해제한다면 반나절쯤은 전투를 피할 수 있겠지. 나머지 지원군은 늦을 모양이니, 먼저 작업을 진행해 주시오. 해제 중에 소환되는 마물은 이쪽에서 처리하겠소.”

아드몬은 당장이라도 병상에 누워야 할 것 같은 꼴을 하고서도 꼼꼼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지원군이 적린 기사단인 듯, 일의 진척도가 상당히 더뎌 보였다. 며칠간 뼈 빠지게 노력했음에도 조금도 줄이지 못한 소환진의 개수를 언급할 즈음엔,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격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카델은 그런 아드몬을 다독이며 징그러울 만큼 무수히 펼쳐진 소환진을 훑어보았다.

‘마법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대거 요청해 봤자 제대로 된 인력을 지원받기는 힘들 거야. 오스마 제국이 특수한 경우인 거고.’

앞으로 도착할 지원군은 비교적 격이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경지가 높아 봤자 4성 정도일까. 적어도 마밀이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가 도착할 일은 없다.

원래라면 제국 역시 자신의 정예 기사단을 내어 주는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들의 습격을 받는 것은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였고, 방어를 위해선 항상 최고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으니.

그런데도 데릭 오스마가 선뜻 지원군으로 적린 기사단을 내어 준 이유는 명확했다. 마밀 키파. 그의 존재가 걸렸던 것이겠지.

‘뭐, 나야 덕분에 오랜만에 스승님도 뵙고 좋지만.’

눈대중으로 소환진의 수를 셈한 카델이 아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지원군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선에서 처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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