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3화 (36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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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산맥.

어두운 공동 안, 어둠과 어우러진 탁한 불꽃이 일렁인다. 불꽃의 주인은 쿤라. 정좌를 틀고 앉은 그의 몸 위로 쉬이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색깔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눈을 감은 쿤라의 표정은 평온했으나, 그를 감싼 불꽃의 움직임은 그렇지 못했다. 불꽃은 크게 솟았다가 사그라지고, 넓게 퍼졌다 좁혀들기를 반복했다. 웃통을 벗어 드러난 탄탄하고 매끈한 상체 위로 드문드문 붉은 비늘이 돋아났다.

마계 전쟁이 발발한 후, 산맥 보호에 집중하며 기운을 쏟았다. 카델에게 나누어 준 힘도 있으니, 장막을 유지하는 데에는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피로가 쌓이기라도 한 걸까.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두통의 주기와 빈도가 잦아졌다. 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과도한 힘의 남용으로 가벼운 두통을 느낄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신경이 거슬릴 정도의 두통은 처음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도 불쾌하군. ……역시 시스템의 농간인가.’

어쩌면 카델의 운명에 개입한 대가의 일부인지도 몰랐다. 성가신 고통이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렇게 쿤라가 애써 몰려드는 두통을 무시한 채 기운을 갈무리하려던 때였다. 감긴 눈꺼풀 아래, 영문을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무분별하게 떠올랐다.

“……?”

당황한 쿤라가 반사적으로 눈을 뜨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그의 눈꺼풀은 풀이라도 바른 듯 꼼짝하지 않았고, 장면들은 뒤죽박죽 섞여 그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초면인 얼굴의 인간들이었다. 스쳐 가는 여러 장면마다 대여섯의 사내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마물과 전투를 하기도, 서로 떠들기도, 우애를 쌓기도 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사내들의 얼굴 또한 바뀌었다. 하지만 총 인원수는 언제나 비슷했다. 또한 딱 한 명. 장면마다 바뀌는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어느 장면에서도 똑같이 등장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쿤라가 당혹감을 드러냈다.

“카델 라이토스……?”

그 사내는 분명 카델이었다. 밀색의 머리칼과 부드러운 인상,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까지. 장면마다 카델에게선 제각기 다른 분위기가 풍겼으나, 외관만큼은 확실히 똑같았다.

그리고 쿤라가 난데없는 장면의 소용돌이 속 카델의 존재에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뭣……!”

또 다른 장면들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순차적으로 스쳐 가는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카델의 죽음. 카델 라이토스임이 확실한 사내는 수십 개의 장면 속에서 수십 가지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마물의 공격에 몸이 찢기고, 뚫리고, 으깨지고, 쥐어짜이며. 혹은 인간에게 배신당하기도 했고, 절벽에서 미끄러지기도, 마력 폭주를 이겨 내지 못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쿤라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눈앞의 장면들에선 부정할 수 없는 현실감이 있었다. 환상이 아니다. 이 세계의 그 누구도 감히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잔혹한 환상이나 안타까운 계시가 아니다. 그것을 깨달은 찰나.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열렸다.

가장 먼저 평화의 돌을 찾아낸 둥켈하이 왕국과 겉핥기 수색밖에 할 수 없는 오스마 제국. 이 두 국가를 제외한 동맹국에서는 마족의 끈질긴 수색 방해와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중 현재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국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이뉴 왕국이었다. 마이뉴 왕국은 평화의 돌 수색 돌입 20일 차가 되는 시점, 동맹국을 포함한 인근 국가에 다발적으로 마법사 지원을 요청했다.

“대규모 소환진의 증식이라…….”

전보를 읽는 카델의 표정에 근심이 어렸다. 황제는 적린 기사단에게 마이뉴 왕국의 수색 작업을 지원하라 명했다. 바로 이어지는 파견에 불만을 품지는 않는다. 문제는 전보에 적힌 마이뉴 왕국의 현 상황.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맞은편에 루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옆으로 돌아앉아 검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카델의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상황이 꽤 심각한 모양이지?”

“그래. 대규모 소환진을 발견한 건 10일 전. 발견 즉시 해제 작업에 착수했지만, 아무리 파괴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소환진이 재생됐대. 마법사들의 마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매일 모든 소환진을 해제할 순 없어. 그렇게 남겨진 소환진이 증식하는 중이고.”

“쑥대밭이 됐겠군.”

“아직 왕국은 무사하대. 소환진은 국경선 바깥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니까. 게다가 그곳엔 대마법사도 있잖아.”

“……마밀 님인가. 도착한다면 오랜만에 얼굴을 뵐 수 있겠어.”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에선 반가운 인연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이 비쳤다. 카델은 그런 루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테이블에 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것뿐이야?”

“뭐가 말이지?”

“마이뉴 왕국이잖아. 네 고향. 좀 더…… 불안해할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여서 아쉬워?”

“그런 건 아니지만.”

루멘이 개의치 않는다면 자신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혹시나 루멘이 고향의 안전을 염려함에도 티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을 뿐이었다.

루멘은 깔끔하게 손질한 검을 납검하곤, 한숨과 함께 카델을 마주 보았다.

“내겐 의미 없는 고향이야. 그곳엔 더 이상 내가 지킬 것도, 미련이 남은 것도 없어.”

“…….”

“이젠 전부 여기 있거든.”

다정한 눈빛이 걸리는 것 없이 날아들었다. 무뚝뚝한 남자의 진심은 때때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헤매게 될 만큼 영향력이 컸다. 카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하며 눈썹을 문질렀다. 괜스레 열이 오르는 듯했다.

“그럼 됐어. 다른 생각 말고 어떻게 싸울지만 고민하면 되겠네.”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느라 얼굴이 빨개진 건가?”

“……방이 좀 덥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짓궂은 웃음소리를 흘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작전은 마법사들이 핵심인 것 같으니, 나가서 나머지 마법사들을 불러오지. 기다리고 있어.”

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서야 카델은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굳어 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몸이 경직되는 게 이상했다.

“그런 느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카델이 애꿎은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무렵. 제법 오래도록 잠잠했던 펜던트에서 빛이 퍼졌다.

“……쿤라?”

갑작스러운 섬광에 눈을 감고 있던 카델이 쿤라의 이름을 불렀다. 슬쩍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기다란 적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머리칼을 따라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카델이 주춤했다.

적룡의 눈빛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압적인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모든 감정을 잃은 것처럼 공허해 보이기도 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나, 카델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쿤라는 그런 카델을 묵묵히 응시하다, 이내 위험스럽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지? 이 몸의 우월한 미모에 새삼 반하기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만하기 짝이 없는 특유의 미소에 그제야 카델도 긴장을 풀었다.

“갑자기 뭐예요? 심심해서 온 건 아닐 테고. 영혼 분리 작업 때문이에요?”

“그래. 그것 말고 내가 반쪽이 너를 찾아올 이유는 없지. 침대로 가라.”

성큼성큼 걸어간 쿤라가 침대에 앉자, 카델도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쿤라를 바라보던 그가 짧게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 올라갔다. 묘한 이질감이 느껴짐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혹시 결계 유지 때문에 과하게 힘을 쓴 것일까. 걱정하며 묻기에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분리되면 되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힘들면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델은 제 맨살을 훑어 내는 뜨거운 손길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평소에도 쿤라는 영혼 분리 작업을 할 때면 말수가 적어졌다. 그러니 아무 말 없이 작업을 진행한대도 이상할 건 없다.

“요즘 산맥은 좀 어때요? 이쪽은 마족들이 기승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관문 장막을 강화하거든요.”

그럼에도 카델은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시도했다.

“물론 위대한 적룡인 그쪽은 알아서 잘하겠지만요. 요즘 제가 그쪽 힘을 알차게 사용하고 있어서, 혹시라도 영향이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아니면 말고요.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여전히 대답은 없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듯 구는 게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쿤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느꼈던 이질감이 점점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카델은 제 몸속을 파고드는 기운의 흐름을 느꼈다. 언뜻 평소와 같은 온기와 강도를 품은 것 같지만,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잔잔하게 퍼져 나가던 이전의 기운과는 달리, 이번 기운은 거슬리는 가시가 박힌 듯 따끔한 통증이 동반됐다. 워낙 미약한 통증이라 그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인지, 쿤라가 힘 조절을 못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기, 집중하는 중에 자꾸 말 걸어서 미안한데…….”

그러나 카델이 이 애매한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려던 순간.

“크윽……!”

쿤라의 짧은 신음과 함께, 강렬한 기운이 카델의 머리를 꿰뚫듯 솟구쳤다. 일순 비명도 나오지 않는 극심한 통증을 느낀 카델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싼 채 침대 위로 엎어졌고, 끅끅 소리를 내며 웅크렸다. 머릿속에 수십 개의 불덩이가 들어찬 듯 고통스러운 감각이 퍼져 나갔다. 위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아래로 내려갔고, 가슴에 이르러서는 전신이 쥐어짜이는 듯한 극렬한 근육통마저 느껴졌다.

처음 쿤라의 기운을 받아들였을 때와 같은, 아니, 그보다도 기묘한 감각을 동반한 고통이었다. 뒤집힌 시야 속으로 언뜻 쿤라의 모습이 비쳤다. 눈 안 가득 들어찬 쿤라의 모습에, 카델은 혼란한 와중에도 꾸역꾸역 목소리를 냈다.

“쿤, 라……!”

그는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고, 당혹감과 충격이 뒤섞인 표정으로 헐떡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통에 찬 쿤라의 모습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으나, 쿤라에게는 닿지 못했다. 웅크린 몸을 조금씩 들썩인 카델이 어렵사리 거리를 좁히고. 그의 손이 쿤라의 허벅지를 짚었다. 그제야 쿤라의 시선이 카델에게로 움직였다.

정면으로 마주한 쿤라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부정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짙은 두려움을 맞닥뜨린 카델은 고통마저도 멀어질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적룡이었다. 이 세계를 발아래에 둔, 시스템마저 간섭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 그런 그가 고통을 느끼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쿤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짧게 빛나던 펜던트가 어둡게 가라앉고, 카델은 서서히 잦아드는 고통을 삭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쿤라가 힘 조절에 실패했나? 피로의 여파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걸까? 그렇다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쿤라는 이 사태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더럽게 아프네…….”

여전히 욱신거리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른 카델이 침대를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펜던트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쿤라의 기운은 확실하게 감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머릿속에 음성을 남기지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카델은 루멘이 불러온 부하들이 방문을 두드릴 때에서야 펜던트를 놓았다. 몸에선 고통이 사라졌지만, 왠지 모를 이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쿤라가 없는 카델은 그 이물감의 실체를 확인할 방도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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