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1화 (361/521)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변은 온통 기분 나쁜 암기로 떡칠이 됐고, 동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떤 공격으로도 자신을 가둔 이 감옥을 부술 수 없었으니. 요젠이 등장하기 전까지, 제프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득한 공포감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는 것뿐이었다.


“너, 너는……!”


요젠은 검을 뽑아 든 채 자신을 경계하는 제프리 앞에 마주 섰다. 굳이 암기를 묻히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떨리는 호흡과 정갈하지 못한 움직임, 불규칙한 심박수는 그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렸다.


“설마……! 분명 적린 기사단의 단장은 곧 포트의 위치를 파악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했어. 이게 그 기회인 건가? 전부 계획됐던 거지!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래, 이것이다. 익숙한 두려움이다. 자신의 앞에선 모두가 이랬다. 두려워했고, 움츠러들었고, 때때로는 분개했다.


“네가 카델 단장의 수하였던 거야! 그 녀석이 도운 건가? 네 하찮은 복수를 도우려고 일부러 일을 벌인 거군. 포트고 뭐고, 마족이 등장했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야! 모두를 함정에 빠뜨린 뒤 날 죽이려는 거였어! 들키지 않을 것 같나? 너희들은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너무도 익숙한 감정임에도 잊고 살았다. 심장에 새겨진 듯 지워지지 않던 것을 너무도 쉽게 떨쳐 냈다. 카델의 옆에 있어서. 조금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저 연민과 사랑만을 보여 줄 뿐인 그 남자의 곁에서. 착실히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순순히 죽어 주진 않을 거다. 어떻게든 네놈들의 악랄한 계획을 방해해 주―”


“내가 누구인지 끝까지 알려 주지 않으려 했어.”


요젠은 자신을 겨누는 검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제프리에게 다가갔다. 그 느리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에선 사냥감을 코앞에 둔 포식자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알려 줄 가치가 없으니까. 넌 그냥, 누구보다 괴롭게 죽어 주면 됐으니까. 원하는 만큼 유린하려 했어. 네 비명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게, 온종일 비명만 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오랜 세월 험한 꼴을 보며 살아온 제프리조차 위축될 만큼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스스로 물러서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경직된 몸뚱이가 암기의 벽에 튕기듯 가로막힌 후였다.


“하지만 말해 줄게. 여전히 넌 뭔가를 알 가치도, 살아남을 자격도 없지만…….”


제프리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요젠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 간신히 겨누고 있던 검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암기에 잡아먹힌 검날은 부식되듯 녹아내려, 그의 손안에 남은 것이라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손잡이뿐이다.


당황한 제프리의 들숨과 동시에, 불시에 뻗쳐 온 요젠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바짝 힘을 주어 목을 조른 그가 제프리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너에 대한 기억을 그럴듯하게 마무리 짓고 싶어졌거든. 그래야만 내가 그 남자에게 동정을 받고, 애정을 받고……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까.”






[암흑 도시]는 오로지 요젠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 [암흑 도시]에 들어섰다는 것은, 요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적린 기사단조차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으니. 고작 제프리 홀리벤이 이렇다 할 반항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끄으윽…! 끄억…!”


제프리는 꿰뚫린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요젠에게 목을 졸린 탓에 제대로 몸을 굽힐 수 없었다. 요젠은 빨갛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얼굴로 바둥거리는 제프리의 반응을 즐기며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이스틱 가문을 기억해?”


“으윽…….”


“이것마저 기억 못 한다면 곤란한데. 살려 주기 싫어지잖아.”


“기, 억……. 기억해. 기억, 한다고…!”


“거짓말.”


냉랭한 대답에 제프리의 몸부림이 더욱 격해졌다. 그는 제 목을 조르는 요젠의 손목을 사정없이 긁어 대고, 어떻게든 밀쳐 내려 애썼다. 그럴수록 몸을 타고 흐르는 암기가 그의 피부를 녹여 끔찍한 고통을 안길 뿐이었다. 결국 반항을 포기한 제프리가 안간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애, 앤디… 제이스틱……!”


확실한 이름을 듣고서야 요젠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요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제프리가 바닥에 쓰러진 채 힘없이 꿈틀거렸다.


한 손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한 손으로는 목을 감싼 그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요젠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남기지 못할 만큼 흔해 빠진 반응이었다.


“난 그때 네가 죽인 앤디 제이스틱과 그의 부인이었던 헬레나……. 그들과 함께 살았던 꼬마야. 기억이 날지 모르겠네.”


요젠이 바로 앞에 쭈그려 앉자, 제프리가 발작하듯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조금만 잘못 행동해도 꼼짝없이 암기에 찢겨 버린다. 요젠이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프리는 처음보다 훨씬 순종적인 태도로 바닥을 기었다.


“기, 기억나. 기억납니다.”


“그래. 그럼 내가 왜 널 죽이려고 하는지도 알겠네?”


요젠의 고개는 제프리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제프리가 가리고 있는 허벅지의 상처를 확인하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을 치워 상처를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덜덜 떨리는 제프리의 팔을 떨쳐 낸 그가 단숨에 단검을 상처 위로 쑤셔 박았다. 찢어지는 비명이 암기의 공간을 울렸다.


“너의 죽음은 내 안의 두 가지를 충족해 줘. 앤디와 헬레나의 복수.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깨끗하게 만들었다는 만족감.”


“사, 살려 줘…….”


“하지만 너의 생존은 고작 한 가지를 충족해 줄 뿐이야. 카델의 평화. 나의 카델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만들지. 대신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돼. 네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지 못했다는 분노, 회의, 죄책감, 어쩌면 후회도 하겠지. 어딜 봐도 그다지 도움 되는 선택은 아니야.”


상처에 꽂은 단검의 손잡이를 뱅글 돌리며 살점과 근육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구멍 속으로 조금씩 암기를 흘려보냈다.


“그런데도 나는 널 살리겠다는 선택지를 골랐어. ……내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흐으… 뉘, 뉘우치겠어. 뉘우치면서, 속죄하듯이 살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악인까지 용서하는 자비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건 아니야. 내가 택한 건 카델과 어우러지는 삶일 뿐이거든. 동등하게 옆에 서지 않아도 돼. 그 남자의 그림자로만 살아도 충분해. 그리고 그 아름다운 남자의 그림자 정도는…… 조금 잔혹해도 되지 않을까.”


요젠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제프리의 고개가 꺾이며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요젠이 박아 넣은 단검. 그 끝에서부터 촉수처럼 퍼져 나간 암기가 제프리의 다리를 완전히 잠식한 것이다. 다리에 침투한 암기는 이내 뜨겁게 끓어오르며 살가죽과 근육을 터뜨렸다.


“기사 생활은 그만둬. 의족을 달아 재활을 시도한대도 소용없어. 그 즉시 네 안에 심어 둔 암기가 차례차례 사지를 터뜨릴 거거든. 누군가에게 나와 카델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도 마찬가지. 그러니 허튼 생각은 말아.”


얼굴에 튀어 오른 피와 살점을 닦아 낸 요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정한 속죄를 하며 살도록 해. 네 남은 평생을 바쳐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 네가 죽였던 선인들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라고. 네 목숨을 걸고 죗값을 치러. 아주 오랫동안, 착실하게.”


제프리는 고통과 충격으로 반쯤 정신을 놓은 듯했지만, 요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널 지켜볼 거야. 만약 내 성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 터뜨려 죽일 거고. 너 같은 재기 불능의 쓰레기가 카델과 같은 공기를 맡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니까.”


카델의 옆에서 그와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까지의 일을 모두 청산한 채 카델만의 충직한 개가 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카델은 약속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면 된다. 자신은 그런 그의 옆에서, 그에게 해가 되는 모든 악을 처단해 줄 테니.


‘……개운함은 없네.’


벼르고 별렀던 제프리를 손봐 주었으나, 짐작한 만큼의 홀가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제프리를 살려 두었기 때문인지, 복수라는 행위가 생각보다 가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 죽어 가는 제프리보다 바깥에 있을 카델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






*






카델은 요젠이 들어간 건물을 지키던 중, 단원들을 끌고 온 다스토를 마주쳤다. 하지만 엉성한 연기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들과 대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젠의 [암흑 도시]가 해제된 것이다.


암기가 사라지자 다시금 갱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피워 두었던 불꽃이 은은하게 내부를 밝히며, 기사들과 쓰러진 포트의 시체를 비췄다.


포트의 시체는 관절이 꺾여 차곡차곡 접혀 있었으나, 그럼에도 갱도의 한쪽을 꽉 채울 만큼 거대했다. 포트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반이 대검의 끝으로 질척한 시체를 건드리며 인상을 구겼다.


“이런 몸으로 기척을 숨기고 인간들을 암살했단 건가.”


“암살에 특화된 고위 마족이니까. 투명화 능력까지 있으니, 요젠이 없었으면 지금보다 피해가 컸을 거야.”


요젠이 없었다면 어떻게 포트를 공략했을지. 상상만으로 골치가 아팠다. 카델은 포트의 시체에서 시선을 떼어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훑었다.


‘……없어.’


요젠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생각이 있으니 모습을 숨긴 것일 테지. 그는 이곳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 사건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금세 시큰둥해진 눈빛이 그림자 기사단을 향했다.


“포트를 상대했던 건가, 제프리?”


“……예.”


“지독하게 당했군. 기다리게. 적린 기사단의 치유사를 불러 치료를…….”


“괘, 괜찮습니다, 다스토 단장님! 저는……. 이 다리는 이미 끝났습니다. 아무리 치유사라도 죽은 다리를 살려 낼 수는―”


“죽은 사람도 아니고 다친 다리 하나 살려 내지 못할 것 같나?”


“필요 없습니다!”


“……뭐 하자는 짓이지?”


요젠은 제프리의 한쪽 다리를 불구로 만들었다. 슬쩍 살피는 것만으로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기괴하게 망가진 다리. 하지만 가르엘 정도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 복구는 시켜 줄 수 있을 테다. 그런데도 제프리는 치료를 거부했고, 다스토는 그런 부하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대로 기사 생활을 끝내고 싶은 건가?”


“……예. 끝내고 싶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무, 무섭습니다! 더는 마족들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우지 못하겠습니다! 저, 저는 살고 싶단 말……!”


제프리의 발악이 끝나기도 전, 다스토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울렸다.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지며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자신들의 집단에서 벌어진 연속된 비극에 말을 잇지 못했고, 적린 기사단은 심상치 않은 동맹군의 분위기를 주의 깊게 살폈다.


“긍지를 잃은 기사에게 이어 가야 할 목숨은 없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두려워할 죽음이 없도록 만들어 주지.”


다스토는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그가 풍기는 살기는 진짜였다. 그는 기사단 이탈을 위해 치료를 거부하는 부하를 직접 처리하려 했다.


그때까지 모든 것을 지켜만 보던 카델은, 다스토가 과격한 일을 벌이기 전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만하시죠, 다스토 경.”


제프리는 복면까지 벗어 던진 채 패닉에 빠진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카델은 그런 제프리를 일별하며 다스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스토는 답지 않게 흥분한 기색이었다. 고위 마족에게 수십의 부하를 잃고, 겨우 살아남은 부하까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상심이 클 만도 했다.


“……경이라면 기사의 긍지를 잃은 자를 수하로 둘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그런 자를 용감하게 싸운 부하들의 시체와 함께하도록 두지도 않을 겁니다.”


사실상 카델은 제프리가 이곳에서 다스토에게 죽든, 과다 출혈로 죽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제프리는 요젠이 살리기를 택한 목숨. 아무리 가치 없는 쓰레기일지라도, 그가 어렵사리 기회를 내어 준 인간이다. 그러니 요젠이 인내한 복수를 다른 이의 손으로 망치게 놔둘 순 없었다.


카델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다스토가 느리게 검을 움직였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다스리듯 천천히 납검을 마친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탐색을 재개하는 건 어렵겠군요.”


“먼저 복귀하십쇼. 저희는 조금 더 탄광을 둘러보다 합류하겠습니다.”


“또 다른 마족을 발견한다면 [울로]를 사용하시죠.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그림자 기사단이 생존자를 끌고 행군을 이어 가는 건 무리한 선택이었다. 반면 적린 기사단은 이렇다 할 부상자가 없었으니. 가능한 만큼은 탐색을 이어 가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그림자 기사단은 동료의 시체와 부상자들을 옮겨 갱도의 출구를 향했고, 적린 기사단은 평화의 돌 수색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그림자 기사단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 요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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