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숲, 끝없는 통로, 걸음걸음마다 울리는 희망의 소리. 눈먼 자가 되어 손을 뻗으면 평화를 얻을지니, 영웅이 남긴 의지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리라.]
뒤집힌 숲이라는 단어는 폐탄광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단어를 직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아귀는 들어맞는다. 이곳은 에메랄드를 캐내던 탄광. 푸른 초목이 가득한 숲처럼, 초록빛 에메랄드가 잔뜩 자라난 동굴이라면. 그 모습을 숲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한 예측으로 결정된 탐색 장소였다. 그러니 붕괴 위험으로 방치되었던 탄광을 폭파해서라도 뒤엎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곳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카델의 설명에도 반은 걱정을 내려 두지 못했다. 만에 하나 카델이 암석에 깔려 위험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의 말을 끝맺기도 전.
“카델 경!”
내내 조용하던 그림자 기사단 사이로, 다스토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스토 경?”
급박한 부름에 카델이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앞에 있던 카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걸음이 느려졌던 터라, 두 기사단 사이는 제법 벌어진 상태였다.
“다스토 경! 무슨 일이……!”
빠르게 달려온 카델이 불꽃의 밝기를 키웠다. 그제야 눈앞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의… 습격입니다.”
말을 멈춘 카델이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 없이 행군하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델의 앞에는, 시체가 된 여덟의 기사와 중상을 입은 스물 남짓의 기사가 있었다.
다스토는 그 중심에서 죽은 부하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드라진 턱 근육과 꽉 쥐어 핏줄이 튀어나온 손등이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알게 했다.
“마족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뇨?”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던 카델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다스토를 향한 시선에서 얼핏 의심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적의 정체를 알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이렇게 많은 기사가 죽었는데도 저희는 비명 하나 듣지 못했습니다. 습격이라면 분명 위험한 힘을 가진 적일 거예요.”
“마족의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미리 설치된 함정일 수도 있고요.”
“함정을 감지하지도 못했어요.”
“그것도 아니라면, 단숨에 기사 여덟을 죽이고 대량의 피해까지 끼칠 수준의…… 배신자일 수도 있겠군요.”
절로 날 선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그림자 기사단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한들, 죽어 가는 자의 단말마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뒤쪽에 있던 자신은 그림자 기사단을 습격하는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으니, 적은 앞에서 나타났다는 얘기가 된다. 좌우가 막힌 갱도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최전방에 있었을 다스토가 제 단원이 죽어 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기척을 감지하는 일은 요젠만큼이나 뛰어난 사내였다. 그의 발언엔 설득력이 없었다.
‘이상한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마족이 미리 설치해 둔 덫에 걸려 환각이 보였다거나,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새 조종당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마족 중에선 ‘혼란’ 디버프를 거는 녀석도 있으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덫의 탐색보다는 다스토의 제압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옳다. 그렇게 카델이 다스토의 처우를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드러나는군요.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잔뜩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다스토가 형형한 눈을 빛냈다. 한 발짝 다가온 그에게서 짙은 살기가 풍겼다.
“물러나시죠.”
그에 카델을 뒤따라온 단원들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다스토는 제 목을 겨눈 루멘의 검날을 일별했고, 그림자 기사단은 단장을 위협하는 적린 기사단을 경계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두 기사단은 순식간에 대치 상태로 돌입했다.
갱도 내의 공기가 한층 서늘해지며, 분위기가 팽팽하게 조여졌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금방이라도 피를 볼 태세였다. 그럼에도 카델은 여전히 다스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전면전까지 치를 생각은 없어. 하지만 단장인 다스토를 건드리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제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심증만으로 몰아붙이기엔 위험한 상대였다.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 단서를 얻는 쪽이 낫겠지. 하지만 카델이 두 기사단 사이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전, 다스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부하를 개돼지처럼 죽일 수 있는 냉혈한이었다면, 결코 둥켈하이 왕국의 기사단장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
“제 부하들 역시 이쪽을 습격한 적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죠. 뒤쪽의 부하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단장인 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멍청하게 걷고만 있었다는 걸.”
“……어두운 터널입니다. 걷는 일에만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하죠. 모두가 다스토 경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요.”
“불쾌한 의심입니다.”
“저 또한 그림자 기사단을 습격한 적을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정체를 가늠조차 못하겠다는 경의 증언은 믿기가 어렵군요.”
카델이 나지막이 반박하자, 다스토의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뚫어질 듯 카델을 응시하던 그가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경이 보지 못한 건 저희를 습격한 적의 정체만이 아닐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어디 있습니까? 경의 자랑거리인 그 유능한 암살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카델의 표정이 경직됐다. 다스토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의심에는 의심으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죠. 경의 숨겨진 부하는 당장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겁니다.”
요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죽은 이가 제프리 홀리벤뿐이라면 몰라도, 무려 여덟의 기사가 죽었다. 요젠은 연관 없는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죽여 대는 살인귀가 아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제프리는 부상 하나 없이 멀쩡히 살아 있고.
‘이번 탐색이 끝날 때까진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범인은 요젠이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 다스토에게 요젠과의 은밀한 약속을 들먹일 수는 없다. 그의 의심은 타당했다. 협력 기사단의 암살자가 작전 내내 모습을 비치지 않았고, 암살자가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은신 능력으로 단숨에 기사 여덟을 죽였다.
‘……거기다 내 의심이 다스토에게 불을 붙여 버렸지.’
다스토에게 가진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스토가 품은 의문도 해소해 주어야 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카델은 요젠을 부를 수 없었다.
요젠이 지금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제프리가 요젠의 모습을 본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카델은 요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요젠을 숨긴다면, 되레 기사단 전원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방금까지 신나게 떠들더니, 불리해지는 것 같으니 바로 입을 다무는 겁니까?”
“……그림자 기사단을 습격한 건 제 부하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당연합니다.”
단호하게 일갈한 다스토가 자신에게 겨눠진 루멘의 검을 손마디로 툭 건드렸다. 카델은 루멘에게 눈짓해 검을 거두게 한 뒤, 짧게 숨을 골랐다.
‘어쩔 수 없지. 안됐지만 너희 앞에 요젠을 세워 둘 수는 없어.’
목덜미를 문지르는 듯하던 카델의 손이 자연스럽게 펜던트를 쥐었다.
‘내 부하들조차 적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기사들을 죽인 게 마족도 아니고 요젠도 아니라면, 남은 놈이야 뻔하잖아. 진짜 범인을 색출하면 가벼운 충돌쯤이야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어.’
결국 카델의 선택은 강압적 제압이었다. 카델의 행동을 예상한 듯 부하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뒤바뀐 공기를 감지한 그림자 기사단 또한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감당이 가능하리라 자신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만.”
더없이 살벌하게 가라앉은 다스토의 눈빛이 번뜩이고. 카델은 대꾸 없이 펜던트 위로 소량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가 쿤라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도 전.
“다, 다스토 단장님!”
“단장!”
적린 기사단과 그림자 기사단, 양측의 부하들이 다급하게 그들의 단장을 불렀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카델의 시야 속으로, 다친 왼팔을 부여잡은 반과 상처 난 뺨을 문지르는 라이돈이 들어찼다.
“뭐야……?”
뿐만 아니었다. 그림자 기사단 측에도 다섯의 부상자가 늘어났고, 개중엔 급소를 가격당한 기사도 있었다. 당혹에 찬 정적 속으로 부상자들의 괴로운 신음이 뒤섞였다.
“너희 괜찮아?”
카델은 굳은 낯으로 두 부하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에겐 비늘 갑옷이 둘려 있었기에 상처는 깊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장한 비늘 갑옷을 뚫고 상처를 남겼다는 점. 대체 누가, 어디에서 이들을 공격했단 말인가.
혼란한 눈빛으로 두 부하를 번갈아 보았지만, 그들 역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반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마땅한 단서를 찾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왼쪽에서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각이 느껴져서 확인했지만, 보이는 건 없었어요. 왼팔에 통증이 느껴진 건 그 직후였고요. ……저 그림자 기사단장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아요.”
직감이 발달한 반조차도 불쾌함을 느끼기만 했을 뿐, 확실한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부하들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다스토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다시 그림자 기사단 쪽을 바라보자, 위급한 부하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다스토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그의 등을 응시하던 카델이 가르엘을 불렀다.
“암흑 마력을 뿌려 둘 테니까, 가서 치유술 좀 써 줘.”
“몰래 다스토 경의 상태도 확인해 볼까요?”
“……아니. 예민한 인간이야. 수를 쓴다면 바로 알아채겠지. 그리고 이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그림자 기사단에게 가르엘을 보낸 카델이 여전히 상처 난 뺨을 문지르고 있는 라이돈에게 다가갔다. 억지로 팔을 끌어 내려 상처를 확인하자, 피가 번진 얕은 절상이 보였다.
“피 나는데 왜 자꾸 만져.”
“……뭘 좀 생각하느라.”
“생각?”
“아까부터 계속 기분 나쁜 냄새가 풍기거든. 가르엘 건 아니야. 그런데 다른 마족의 구린내라기엔…….”
라이돈은 제가 감지한 마족 냄새를 증명하고 싶은 듯했지만, 반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물증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래된 갱도이니 예전에 있던 마족의 잔향이 남은 것일 수도 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형체도 보이지 않으니.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무엇도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낼 수 없는 기이한 습격에 골머리가 썩고 있을 무렵. 카델의 뒤로 다스토가 다가왔다.
“카델 경.”
“부하들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경은 기사들이 공격당하는 순간까지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제게 이상한 낌새가 보였습니까?”
“……아니요.”
“저 또한 누구의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불쾌한 것이 이 갱도를 채우고 있습니다.”
카델은 다스토에게 두었던 시선을 옮겨 뒤편의 가르엘을 보았다. 그는 어둠과 암흑 마력에 보호받으며 다친 기사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동료의 회복을 지켜보는 그림자 기사단원들이 있었다.
“단지 기분만을 말하는 거라면 저 역시 찜찜함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암살자의 짓이 아닙니다.”
“…….”
“암살자라면 굳이 타깃 외의 대상에게까지 상처를 입혀 경계심을 자극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곳의 전원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더더욱.”
“내부의 적이 아니라면, 외부에서 들어온 적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굳이 이 폐탄광까지 찾아와 두 기사단을 습격할 명분을 가진 적이라면.”
“마족밖에는 없죠.”
누구의 눈에도 포착되지 않을 만큼 재빠르거나, 몸집이 아주 작은 마족. 혹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족. 팽팽 머리를 돌리며 현 사태를 일궈 낼 수 있을 만한 마족의 목록을 추렸다. 그리고 이내 가장 유력한 후보를 떠올린 순간.
푸슈슉!
가르엘의 주변에 있던 다섯 기사의 목이 동강 나며, 절단면에서부터 피 분수가 솟구쳤다.
“뭣……!”
멍하니 가르엘의 뒷모습을 담아내던 카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스토는 카델의 반응을 따라 한 박자 늦게 부하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당황할 새도 없이 달려 나갔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태세를 갖춰! 방심하지 말고 방어를 최우선으로 해라!”
가르엘은 갑작스러운 떼죽음에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부상자의 치유를 중단한 그가 누구보다 빠르게 시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스토가 도착하기 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희미한 기운을 감지했다.
“……마기다.”
절단면에 희미한 마기가 맺혀 있었다. 기운은 증발한 것처럼 단숨에 흩어졌지만, 같은 기운을 사용하는 가르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것은 마족의 힘.
“단장님! 마족입니다!”
가르엘의 외침에 갱도가 고요해졌다. 마족이라는 그의 말이 믿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다. 적이 마족임을 알아냈음에도 여전히 위치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공포. 그 위험한 감정이 전염되듯 퍼져 나가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 사방을 돌아보며 바닥을 긁는 발소리, 중얼거리는 욕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폭풍의 눈 같은 혼란 속에서, 카델의 목소리가 똑똑히 울려 퍼졌다.
“투명화 능력을 갖춘 마족입니다. 이름은 포트. 전신 투명화 능력을 제외해도 암살자만큼이나 완벽하게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놈이에요.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한데 뭉쳐서 사위를 경계하는 편이 낫습니다. 장막을 둘러 드릴 테니, 공격받은 방향에선 곧바로 신호를 주세요.”
이제껏 마족의 출현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 왔던 터라, 곧장 떠올리지 못했다. 포트. 투명화 능력으로 타겟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위 마족. 이처럼 좁고 어두운 공간은 녀석에게 있어 최적의 전장이었다.
카델은 기사 전원을 보호하는 바람 장막을 생성한 뒤, 대치하며 떨어져 있던 그림자 기사단 틈에 섞여 들었다.
‘게임 속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해치웠다지만, 현실에선 이 녀석만큼 힘든 놈도 없을 거다. 우선은 위치를 알아내는 게 중요해.’
마른 입술을 축인 카델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포트의 공략법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공략의 성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