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6화 (35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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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는 쓰러진 요젠을 마을에 데려다 아무 길목에나 내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젠 또한, 앤디의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가 입고 있던 옷을 팔아 낡은 천 옷을 사고, 남은 돈으로 제프리 홀리벤의 뒷조사를 진행했다. 일평생을 빌어먹으며 살아온 그에게 길거리 생활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프리 홀리벤의 신원과 사는 곳까지 알아냈으나, 요젠은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온종일을 수련에만 매진했다.

카델은 빠르게 흘러가는 장면 속, 짙은 우울에 물들어 가는 요젠을 지켜보았다. 그는 매번 밤길을 돌아다니며 수련의 성과를 확인하려 했다. 주로 약자와 동물을 괴롭히는 불한당을 상대했다. 요젠은 그들의 피를 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그의 체술은 능숙해졌고, 감정도 무뎌졌다. 그리고 요젠이 기어코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 가는 날이 찾아왔다. 대상은 램프. 그가 괴물로 자랄 것을 예견한 용병단장이었다.

“난… 컥……. 난 언젠가 네놈이, 이런 괴물이 될 줄 알았어…….”

램프는 쓰러진 채 헐떡이면서도 표독스럽게 요젠을 노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에선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쏟아질 듯했고, 왈칵 차오른 피가 입술과 턱을 붉게 물들였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요젠의 표정에선 일말의 통쾌함도 비치지 않았다. 그를 학대하고 사지로 내몰았던 램프를 죽음의 목전까지 데려다 놓았음에도. 대신 그는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램프는 꼭 철천지원수를 보듯 요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괴롭혔던 어린 소년이 복수를 위해 나타나 기어코 피를 봤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에선 죄책감이나 후회의 기미가 없었다. 되레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굴었다.

“거슬려.”

“개, 같은… 자식……!”

“너 같은 놈들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구나. 평생 원망 살 짓을 해 놓곤, 죽을 때는 남을 원망하면서 가는 거야. ……난 네깟 놈들의 원망을 기억하며 살고 싶지 않아.”

요젠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빳빳한 램프의 머리통을 한 손에 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짧게 경련하던 램프의 몸뚱이에 힘이 풀렸다.

죽은 것이다.

“네깟 놈들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요젠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램프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경직된 얼굴에 살벌한 표정이 떠오르고, 거세지는 움직임을 따라 피가 튀었다. 가빠지는 호흡은 요젠의 동요를 증명했다.

“너희가 있으면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해. 헬레나도, 앤디도, 너희 같은 놈들만 없었다면……. 내가 지켜 줘야 해. 불행한 건 나 하나로 족해. 그러니까…….”

램프의 머리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요젠은 피가 튄 눈꺼풀을 짧게 깜빡이다, 램프의 등허리에 꽂힌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제 눈을 찔렀다.

왼쪽 눈을 찌르고, 거침없이 오른쪽 눈을 노렸다. 울컥 피가 쏟아졌다. 괴로운 듯 어깨를 움츠린 요젠의 입새로 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이지 마, 보이지 마, 보이지 마…….”

구걸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그의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음에도, 카델은 아무런 감상을 내놓지 못했다. 너무나 처절했다. 세상을 더럽히는 기름 막을 한 겹 걷어 낸 것처럼 상쾌했다던 요젠의 첫 살인은, 이리도 끔찍했다.

요젠이 스스로 눈을 찌른 이유는 단순히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제가 죽인 이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들의 원망을 버티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요젠의 간절함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시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악인을 처치하려 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온정을 베풀었던 젊은 부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말해 주었던 인간의 ‘선함’을 믿기 위해서.

악인을 죽임으로써 앤디와 헬레나 같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요젠이 가진 삶의 이유였다.

‘그건 너무 쓸쓸하잖아.’

찰나의 선의를 움켜쥔 채 평생을 고독한 어둠 속에 빠져 살아야 한다. 너무한 일이었다. 스스로에게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가 오래도록 좇았던 삶의 목적을 한순간에 내버리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하지만 카델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고통받던 과거를 떨치고, 행복만을 기억한 채 더 큰 행복을 향해 손을 뻗기를 바랐다.

너의 행복이 누군가에겐 더 바랄 것 없는 기쁨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더 이상 고통에 숨지 말고 마음을 열어 달라고.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과거의 요젠에겐 닿지 않는다.

웅크린 요젠이 상처 난 눈꺼풀을 긁듯이 문지르며 울음 섞인 신음을 흘렸다. 외로운 짐승이 울부짖듯, 고독하고도 쓸쓸한 소리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요젠의 모습이 멀어졌다.

「요젠 바르딕타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의 시청을 완료하였습니다.」

「피로 회복도가 50% 감소합니다. 육체 피로도에 유의하십시오.」

*

그의 과거는 유독 길게 느껴졌다. 차례차례 이어지는 요젠의 과거엔 지독한 어둠 속 희미한 촛불 하나만이 있었다. 그 미약한 불꽃은 얼마 일렁이지도 못한 채 꺼져, 다시금 어둠만이 남았다. 그가 움켜쥔 것은 사라진 온기가 남긴 짧은 추억뿐.

“…….”

카델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힘주어 얼굴을 문지르고, 가방을 뒤져 기력 물약을 들이켰다. 축 늘어졌던 몸에 조금씩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했던 것만큼 근육통이 심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카델은, 이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널 막아서는 안 됐나 봐.”

제프리 홀리벤을 도주시킨 자신을 보며 요젠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 악마를 보호하며 너를 위한 것이라 지껄이던 모습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단장이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던 너는, 얼마나 애정에 목말랐던 걸까.

몰아치는 감정을 다스리듯 크게 숨을 골랐다. 당장이라도 요젠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으나, 그는 탐색이 끝나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제프리를 본다면 살인 욕구를 참기 힘들 테니, 아예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해도 나무랄 자격은 없었다.

‘일단은……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어.’

요젠의 과거는 단순하면서도 몹시 복잡했다.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선택은 무엇인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는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내기 전까진, 섣부른 판단은 보류였다.

환복과 짐 정리를 마치고 막사를 나서자, 막 앞에 도착한 루멘과 마주쳤다. 정면으로 카델을 맞닥뜨린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잘 잤어?”

“……응.”

잘 자긴커녕 요젠의 생각으로 평소보다 배는 컨디션이 저조했다.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빤한 시선을 보내던 루멘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악몽이라도 꾼 모양인데.”

“무슨 소리야. 잘 잤다니까.”

“그래, 알겠어.”

“……왜 찾아온 건데?”

“남의 단장은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 중인데, 우리 대장만 느지막이 일어나면 체면이 안 살잖아. 늦잠꾸러기가 되기 전에 깨워 주려고 왔지.”

“참 고맙네.”

“별말씀을.”

루멘과 붙어 걸어가면서도, 카델은 종종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혹여라도 요젠의 모습이 보일까 봐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요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마 걷지 않아 다스토가 보였다. 그는 루멘의 말대로 일찌감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듯, 부하들을 점검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카델이 다가가자 다스토의 시선이 움직였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다스토 경의 기준에는 못 미치겠습니다.”

“제 기상 시간이 유별날 뿐이니 괘념치 마시죠.”

“폐탄광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죠?”

“예. 급한 것 없으니 여유롭게 정비하고 출발합시다.”

카델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정을 조율하던 다스토는, 문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열을 맞춰 서고 있는 제 부하들을 향해서였다. 카델이 그를 따라 눈길을 돌리자, 곧 얼굴을 가린 복면 사이로 익숙한 눈매가 보였다.

“……뭘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지? 할 얘기라도 있나? 제프리 홀리벤.”

요젠의 행복을 앗아 가고, 그가 암살자의 길을 걷게 한 장본인. 제프리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며 카델을 살피고 있던 듯했다. 다스토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제프리는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부터 수련을 게을리했다는 증거다. 분발하도록.”

“네!”

다스토는 주의를 주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끝마쳤으나, 카델은 그러지 못했다. 제프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젯밤 자신의 행동이 떠오르며 혼란스러워진 탓이었다. 순수하게 제프리를 향한 적의가 차오르기도 했다.

빠르게 감정을 억누르긴 했으나, 얼핏 드러난 적의를 감지한 듯 다스토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제 부하가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예?”

“제 눈 밖에서 무례를 범했다면 대신 사과드리죠.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십시오. 경도 이 협력 관계에 균열이 생기길 바라는 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제프리가 거슬리는 짓을 했더라도 관계 유지를 위한다면 그냥 넘어가라는 소리였다. 카델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스토를 응시하다, 이내 본래의 여유로운 표정을 꾸며 내며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감정이 우선시 되어선 안 되죠. 물론 경의 부하가 무례를 범한 적도 없고요.”

일단은 탐색부터 진행해야 했다. 돌을 찾아내 그림자 기사단과 엮일 일이 없어지면, 요젠의 안위와 그의 케케묵은 원수의 처리를 고민하리라.

시시때때로 차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카델은 폐탄광으로의 이동을 준비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피부에 스미는 찬기에 야무지게 망토를 여민 카델이 공중에 뜬 불꽃의 화력을 높였다.

“생각보다 입구가 넓네요. 엉겨 붙어 갈 일이 없어서 다행……. 조심해요, 단장. 바닥이 울퉁불퉁하다고요.”

아무리 탄광의 입구가 넓다고 한들, 성인 남성 여럿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좀 더 넓은 내부 터널로 진입하기 전까지 세 명씩 열을 맞춰 나아가야 했다. 반은 넘어질 뻔한 카델을 제 앞에 세우며 언제든 잡아 줄 수 있도록 바짝 붙어 섰다.

“흐응, 천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날아서 갔을 텐데.”

카델의 양옆으로는 라이돈과 가르엘이 있었다. 가르엘은 한껏 귀찮음을 뽐내며 설렁설렁 걸어가는 라이돈에게 말했다.

“작게 변해서 날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봤자 이 정도 높이면 가르엘의 짜증 나는 정수리를 가까이서 보게 될 뿐이야. 상상만으로도 기분 나빠.”

“이상하네요. 전 정수리도 잘생긴 편인데.”

“정수리가 잘생겨? 머리가 어디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라이돈 경에게 그런 소릴 들을 줄이야. 제 언행에 문제가 큰 모양이에요.”

점점 나사가 풀리기 시작하는 라이돈과 그런 그를 살살 긁어 대는 가르엘의 사이. 묵묵히 그들의 쓸데없는 대화를 듣던 카델이 두 남자의 팔을 후려치며 인상을 구겼다.

“시끄러워. 너희는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헛소리할 마음이 드냐?”

앞서 행군하는 그림자 기사단에게선 탄광에 진입한 후 단 한 마디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칙칙한 분위기가 폐탄광의 어둠과 어우러져 마치 유령과 함께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쨌건 산 사람이다. 이쪽의 시시콜콜하고 유치한 잡담이 갱도에 울려 퍼지는 건 원치 않았다.

카델은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라이돈을 무시한 채 걸음에만 집중했다. 터널 중앙에 깔린 철로는 오래되어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암벽을 지탱하는 구조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녹슬어 있었다. 오래 방치된 폐탄광이라 그런지 붕괴의 위험이 커 보였다.

다행히 이쪽엔 마법사도 있고, 위급 시를 대비한 마도구도 충분하다. 사고가 일어난대도 어느 정도는 수습이 가능할 테다.

‘무탈하게 다녀오는 게 최고이긴 하지만……. 왠지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요젠의 과거를 봐서인지, 그저 감일 뿐인지. 한껏 예민해진 신경이 갱도의 곳곳을 미심쩍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맑지 못한 정신에 습한 공기까지 섞이니, 기분이 점점 저조해졌다.

‘……아니야. 괜히 재수 옴 붙는 생각 하지 말자. 당장 여기서 마족이 나타난대도 내 부하들이 다칠 일은 없어.’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길한 상상들을 떨쳐 낸 카델이 부러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긍정적인 사고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툭. 투둑.

갱도의 안쪽으로 진입하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자잘한 흙먼지에 불과했으나, 걸음이 이어지니 이따금 주먹만 한 돌덩이가 떨어지기도 했다.

“불안한데. 조심하는 게 좋겠어, 대장.”

루멘은 카델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돌멩이를 빗겨치며 짧게 혀를 찼다. 심상치 않은 갱도의 상태에 카델은 부하들의 위로 비늘 갑옷을 둘렀다. 그림자 기사단 역시 다스토의 명령을 따라 보호 마도구를 발동하여, 그들의 주위로는 투명한 장막이 둘렸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요, 단장? 슬슬 터널에도 끝이 보일 것 같은데.”

“저쪽은 터널 내부를 폭파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이던데.”

“암벽이 이렇게 불안정한데요?”

“먼지 한 톨 없이 털어 봐야 만족하고 물러나겠다는 거지.”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매달려야 조금이라도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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