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라진 요젠이 그림자 기사단의 단원을 만나 그를 죽이려 한다니. 요젠에게도 뭔가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유추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박했다.
이곳에서 단원이 죽어 버린다면 다스토는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려 할 테다. 그렇게 되면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요젠은 물론, 산책을 핑계로 그림자 기사단을 몇 번이나 마주친 자신 또한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모두가 위험해지는 일을 두고 볼 순 없었다.
“그만둬!”
때문에 카델은 이름 모를 기사에게 바람 장막을 둘러 주며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난데없는 카델의 등장에 기사는 당황한 듯 보인 반면, 요젠만큼은 아무런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셀레브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거리낌 없이 저 남자를 해하려 한 것이다.
“저, 적린 기사단의…….”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카델은 일부러 요젠을 알지 못하는 척 기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이 남자가 요젠의 타깃이라면, 영면의 사자라는 정체도 밝혔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요젠에게 알은 척을 하는 건 곤란했다.
남자는 적린 기사단의 단장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처음보다 안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를 정찰하던 중에 습격을 당했습니다. 조심하십쇼. 제법 오랫동안 암살자로 굴러온 놈인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잘은 모릅니다만……. 과거에 짧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요젠과 연이 있던 사람이라고? 남자의 발언에 카델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듣자 하니 이 기사는 아직 요젠이 영면의 사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요젠은 카델이 등장한 후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여전히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요젠의 살기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사방에 기사들이 깔려 있거든요.”
“…….”
“위험해질 겁니다.”
“비켜.”
그가 하려는 일의 위험성을 돌려 말해 보려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요젠이 한 발짝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발밑에 그림자처럼 아른거리는 검은 자국은 그림자가 아닌 암기. 그는 언제든 소리 소문 없이 눈앞의 남자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곳에서 남자를 도주 시켜 죽음을 막는대도, 요젠은 어떻게든 암살을 성공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젠이 다른 기사단의 단원을 죽여 책임을 물게 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카델은 시선을 요젠에게 고정한 채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뭡니까?”
“제프리 홀리벤입니다.”
“장막을 강화해 줄 테니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도망치세요, 제프리 경. 대신 누구에게도 이 일을 알리면 안 됩니다.”
“예……? 하지만 지원을 불러야…….”
“발설한다면 저 역시 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나, 제프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복수하겠다면 덤비라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의 본능은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저 암살자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제프리는 카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제프리를 감싼 장막의 바람결이 더욱 거세졌다.
“가세요!”
기분 나쁜 기시감이 들었다. 케인슈타인 백작의 도주를 도왔을 때처럼, 자신은 이번에도 요젠의 타깃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요젠의 타깃은 언제나 인간 이하의 짐승이었다. 그러니 제프리 홀리벤이라는 자 역시 돼먹지 못한 인간이리라.
자신의 선택에 요젠이 화내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은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카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요젠을 가두는 바람 장벽을 만들었다.
요젠은 제프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 우뚝 멈춰 있었다. 그를 가둔 바람결은 함부로 건드렸다간 피를 볼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카델과 요젠 사이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카델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뿐.
“……요젠.”
카델은 굳은 것처럼 선 요젠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가 살의를 완전히 거뒀다는 판단이 서기 전까지 장벽을 치우지 않을 셈이었다.
카델이 장벽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요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던 입꼬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프리 홀리벤은 내 오랜 타깃이야. 아주 오랫동안, 완벽한 때를 노리고 있었거든.”
“…….”
“내가 이곳에서 제프리를 죽인다면 네가 곤란해진다는 걸 알아. 알면서도 죽여야 하는 쓰레기였어. ……너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중얼거리듯 뱉은 말에는 숨기지 못한 실망감이 고여 있었다. 그에 카델은 왠지 모를 다급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요젠. 여기서 제프리를 죽이면 네가 위험해져.”
“난 언제나 위험한 삶을 살아왔어. 그러니 내겐 문제 될 게 없지. 문제는 카델, 네게 생기겠지만, 그건 네가 나를 모르는 척하고 잘라 내면 될 일이야.”
“……잘라 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요젠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장벽 너머에 있는 카델을 향해서였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요젠의 손끝이 거침없이 장벽을 뚫으려 하자, 카델은 반사적으로 마법을 풀어 버렸다. 그러나 요젠의 손은 카델을 어루만지지 않았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 떨어질 뿐이었다.
“넌 나를 꿈꾸게 만들어. 너무도 허황된 꿈을.”
“요젠.”
“너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달라. 넌 모두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나는 알아. 행복을 위해서는 사라져야 할 사람도 있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인정할게. 네 정의는 옳아. 너라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어. 하지만 덕분에 내 정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거든. 날 양지로 끌어올릴 필요는 없어, 카델. 내 자리는 이곳이야. 내가 네 옆에 있으면,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우리는 불행해져. 그렇지?”
“틀려!”
요젠의 말은 온통 덤덤했다. 꼭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던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것이 카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 오지 않았는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챙겨 주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제야.
카델은 화가 난 것처럼 요젠의 팔을 단단히 쥐고 흔들었다.
“네 타깃을 건드린 건 미안해. 하지만 널 막은 건 내가 그 사람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야. 이제 그딴 건 안중에도 없어! 난 오로지 네 안위만을 생각해서 제프리를 도망 보낸 거라고. 알겠어?”
“…….”
“넌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의 방식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지. 미안한데 난 아니야. 내 방식이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해도, 그 대가로 내 사람들을 잃게 된다면 난 주저 않고 포기할 거야.”
“……그래선 안 돼.”
“네가 떠난다면 전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널 찾으러 갈 거라고. 이러면 안 돼? 수만 명의 사람 대신 너 하나를 선택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이상한 소리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
이제 부하를 잃는 것엔 넌더리가 났다. 그들이 나름의 사정이 있든 말든, 더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제 옆에만 있으면 된다. 행복하게 해 준다는데 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고, 누구보다 풍족한 삶을 살게 해 준다는데 어째서.
“그렇게 인간이 좋다면서 왜 나는 좋아해 주지 않는 거야.”
“…….”
“난 너 없으면 안 돼. 내가 꿈을 꾸게 만든다고? 그럼 계속 꿔. 네가 언제 어디서 무슨 꿈을 꾸든, 내가 지켜 줄 테니까.”
“……난 제프리를 죽여야 해.”
“네가 곤란해질 타이밍만 아니면 제프리를 죽이든 국왕을 죽이든 상관 안 해! 아직도 모르겠어? 난 지금 네 안전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위험해질 일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거라고!”
답답했다. 요젠은 본인의 행동이 기사단에 끼칠 영향을 염려하면서도, 본인이 궁지에 몰리게 될 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본인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악인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본인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왜 그렇게까지 악인을 처단하는 데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 영웅이 되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얌전히 제 옆에서 싸우면 될 일이다.
요젠은 한결같이 침착했으나, 카델은 점점 더 격양되어 갔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 갈 수 없다. 카델은 흥분을 짓씹듯 턱에 힘을 준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아프도록 쥐고 있던 요젠의 팔을 살살 달래듯 문지르며 말했다.
“나 아직 네 단장이지?”
“……응.”
“좋아. 그럼 명령이야. 이번 작전이 끝나기 전까지 제프리를 죽이는 건 보류야.”
“…….”
“대답해.”
한참 동안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던 요젠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델이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며 요젠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을 토닥이자, 요젠이 어설프게 그를 마주 안았다. 엉성한 자세였으나, 온기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요젠의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앞에서는 매번 순한 양처럼 굴던 녀석이 표적만 나타나면 곧장 살기를 뿜어 대는 것도, 세상을 ‘정화’하는 데에 비정상적일 만큼 과도한 희생을 바치는 이유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다행히, 카델에겐 상대를 이해할 마지막 수단이 존재했다.
짧았던 포옹이 끝나자마자 요젠은 곁을 떠났다. 불안감을 밀어 둔 카델은 거침없이 천막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곧장 잠을 청했다.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시청 가능한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가르엘 몬자시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요젠 바르딕타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마침 최근 요젠의 호감도가 70을 찍었다. 조금만 부족했어도 가장 필요할 때에 요젠을 알아 가지 못할 뻔했으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카델은 망설임 없이 요젠의 과거 스토리를 열람했다. 익숙한 어둠이 그를 덮쳤으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산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