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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켈하이 왕국은 대마법진 발동의 시작점이었다. 가장 먼저 마계 도시가 출현했던 곳이니, 그 피해는 다른 국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폐허가 따로 없네.’
수도인 스코타비는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다. 그들이 이동 마법진을 타고 도착한 마을, ‘베리오’는 곳곳이 허물어진 건물과 타들어 간 목재로 난잡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이 마을과 이어진 숲이 첫 번째 수색 장소였으므로, 카델과 부하들은 조각난 자재를 지르밟으며 착실하게 나아갔다.
“당장 유령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을 분위기네요. 며칠 전까진 사람이 살고 있었을 텐데.”
삶의 흔적이라곤 없는 황량한 풍경에 가르엘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반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유령은 이미 앞에 있는 것 같은데.”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앞서 행군 중인 그림자 기사단이 있었다. 황폐한 마을을 가로지르는 검은 망토의 향연은, 확실히 기사보단 죽음의 사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디 상복 같은 걸 주워 입고선 소리도 없이 걸어가는 꼴이라니. 기분 나빠서 같이 있기가 싫어지네.”
반은 진심으로 소름 끼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카델은 혹시라도 그림자 기사단이 들을까 주의를 두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저들은 꼭 요젠의 분신들 같았다.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요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요젠으로 단련된 단원들에게까지 기괴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계속 걷기만 하냐. 입을 가리고 있어서 말을 못 하나? 숨은 안 막혀?’
따지자면 더 위험하고 살벌한 쪽은 요젠일 테지만, 저들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요젠은 잘 따라오고 있는 거겠지?’
이동 마법진을 타고 온 뒤에도 요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슬쩍 다가와 존재감을 표출하는 일도 없었다. 그가 갑자기 이탈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일부러 불러내진 않았지만, 모습을 감추기로 한 이유가 모호해 걱정이 들었다.
‘확실히 저쪽 단장은 요젠의 정체를 눈치챌 가능성이 커 보이긴 하지. 요젠도 다 생각이 있을 거야.’
무턱대고 행동하는 녀석은 아니니 알아서 잘 처신할 것이다. 괜스레 주변을 훑어 요젠의 흔적을 찾아본 카델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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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숲, 끝없는 통로, 걸음걸음마다 울리는 희망의 소리. 눈먼 자가 되어 손을 뻗으면 평화를 얻을지니, 영웅이 남긴 의지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둥켈하이 왕국이 보관하고 있던 글귀였다. 다스토에게 전해 들은 글귀는 제국의 것보다 훨씬 애매하고 막연해서, 그들이 왜 수색 지원을 요청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마을을 벗어난 두 기사단은 이어진 숲으로 빠져나갔다. 이곳부터가 수색의 시작점이었다. 글귀의 ‘뒤집힌 숲’에 초점을 맞춘 결과로, 이곳에는 마계 전쟁 당시 어느 마족의 공격으로 휘어진 나무가 엎어진 그대로 성장 중이라고 했다.
완전히 뒤집혔다고는 볼 수 없지만, 90도 정도는 회전했을 터. 둥켈하이 왕국은 애매한 글귀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소를 찾기는 힘드니,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탐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두 기사단이 수색에 열중하며 우거진 숲을 헤쳐 나가고 있을 무렵. 홀로 모습을 숨긴 요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림자 기사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감시하던 타깃이었다. 제프리 홀리벤. 그는 그림자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까지 살인청부업자로 일하며, 돈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죽일 수 있는 사내였다. 의뢰인이 원한다면 이미 시체가 된 인간도 능욕했고, 돈만 더 얹어 준다면 목표물의 가족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 주기도 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 제프리는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신분을 세탁하고 그림자 기사단에 지원했다. 뛰어난 체술을 인정받은 그는 단박에 시험을 통과했고, 어느덧 6년 차 기사가 되었다.
두꺼운 나뭇가지 위. 나뭇잎의 그림자에 숨은 요젠이 제프리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완벽하게 기척을 죽인 요젠과는 달리, 제프리의 발걸음에는 찌꺼기 같은 소음이 남았다.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장인 다스토 살라웰을 제외한다면, 요젠에게 있어 그들은 쿵쾅거리며 전진하는 황소 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멀어지는 기사단을 따라 나무를 넘어가면서도 요젠은 부스럭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가 남기는 것이라곤 땅에 비친 그림자뿐. 그마저도 나무 그림자에 교묘히 가려져 요젠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오늘 밤에 처리하겠어.’
그것이 요젠이 모습을 숨긴 진짜 목적이었다. 가장 오랜 표적이었음에도 여태껏 죽이지 않았다. 딱히 제프리가 너무 강하다거나, 그의 뒷배가 상당해 건드리기 까다롭기 때문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렸다. 악귀 같던 암살자가 과거를 청산하고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삶을 누리는 순간. 그 삶이 당연시되어 더러운 과거가 꿈결처럼 느껴질 때,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리고 싶었으니까.
문득, 제프리에게 집중하던 요젠의 감각이 분산되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뒤편에서 그들을 쫓는 분주한 발소리. 부지런한 걸음과 종종 부하들에게 말을 거는 잔잔한 음성. 조금 가쁜 듯한 숨소리와 약하게 들려오는 한숨.
‘……카델.’
나뭇가지를 넘나드는 요젠의 움직임이 살짝 둔해졌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려는 것을 빠르게 다잡은 그가 의식적으로 카델의 존재를 밀어 냈다.
자신이 이곳에서 그림자 기사단의 단원을 암살하면 카델이 곤란해진다. 하지만 제프리 홀리벤은 이곳에서 죽어야 했다. 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늦는다. 요젠은 제프리가 참전 용사가 되어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고작 수색 작업을 하던 중, 마족도 아닌 인간에게 죽은 얼간이로 남아야 했다.
카델의 이해를 바라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가 이해해 주지 않는대도, 그는 자신을 막아서선 안 됐다.
한층 짙어진 암기가 요젠을 감싸며, 숲에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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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저녁을 먹고, 다스토와 다음 날 계획에 대해 논의한 뒤, 부하들과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곧장 막사에 복귀했다.
“아, 진이 다 빠지네.”
카델은 반이 직접 설치해 준 막사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미미한 근육통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다음 날이 되면 걷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될 것이었다.
“체력도 재능이야. 그렇게 운동을 했는데도 여전히 이따위 몸인 걸 보면.”
자조하듯 웃은 그가 두툼한 모피 위에서 가볍게 뒤척였다. 생각보다도 수색이 고됐다. 처음엔 바닥을 훑으며 자라난 기묘한 나무를 구경하며 제법 흥미롭게 돌아다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도 없이 펼쳐진 숲길에 진저리가 났다.
두꺼운 나무줄기가 바닥에 널브러진 탓에 제대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거의 구르듯이 나무를 넘어 틈새를 꼼꼼히 헤집고, 조금씩 마력을 흘려보내 뭔가의 장치가 없는지 탐색까지 해야 했다.
‘숲만 돌아다녀도 이렇게 힘든데, 내일은 폐탄광이라니. 상상만 해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다. 물약 좀 마시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기력 물약을 챙겨 왔다. 부하들을 생각해 가져온 것이었는데, 보아하니 녀석들은 일주일을 밤낮없이 탐색만 한대도 멀쩡할 것 같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건지. 나나 잘하자. 빨리 마시고 자 버리자고.’
카델은 가방을 뒤져 기력 물약을 꺼내곤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씁쓸한 뒷맛을 느끼며 곧바로 몸을 뉘려던 그가 멈칫하며 허리를 세웠다. 잠들기 전에 확인하려던 인물이 떠오른 탓이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듯 주위를 둘러보던 카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요젠, 있어?”
동그란 눈이 조심스레 굴러갔다. 카델이 혼자 있을 때, 이름을 부르면 요젠은 그가 어디에 있든 금세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몇 번을 불러도 요젠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뭐지?”
분명 다스토의 눈을 피해 적당한 곳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누구의 앞에도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개인 막사 안이라면 다스토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을 거다.
‘밥도 제대로 안 먹었을 텐데. 어디서 다른 일이라도 보고 있나?’
요젠이 불쑥 사라진 적은 많아도, 그전에 행선지 정도는 미리 말해 주는 편이었다. 말해 주지 않는 경우라곤, 그가 아주 사소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났을 때뿐. 하지만 지금처럼 기사단이 단체 행동을 하는 때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리다니.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설마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거 아니야?”
요젠이 어디 가서 당하고 올 사내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않는가. 몰래 이쪽을 뒤따라오다 함정에 걸렸을 수도 있고, 위험한 마족을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 소란을 피우면 다스토가 눈치챌까 봐 고군분투 중이라든지.
한 번 시작된 망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앉은 자리에서 절절매던 카델은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밖을 나섰다. 다른 부하들도 깨울까 싶었으나, 혼자만의 걱정일 가능성이 컸으니 놔두기로 했다. 정말 심각하다고 느껴지면 그때 깨워도 늦지 않았다.
작은 불꽃을 등불 삼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중에 그림자 기사단을 몇 만나기는 했으나, 잠시 산책 중이라는 카델의 말에 전부 군말 없이 지나갔다. 이럴 때는 단장이라는 위치가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림자 기사단조차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걸어왔을 즈음엔, 사소한 생각들은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요젠에 대한 걱정만이 들어찼다. 이동하며 틈틈이 요젠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당연하게도 느껴지는 기척 역시 없었다.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자기는 내 분신으로 내가 뭘 하든 지켜볼 수 있잖아. 그런데 나는 이렇게 소리도 안 내는 놈을 발품 팔아 찾아다녀야 하다니.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 두든가 해야지.’
한쪽만 상대방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게 그 어느 때보다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카델은 욱신거리는 다리를 두드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제법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기서 무턱대고 더 나아가면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스쳐 가는 나무마다 생채기를 내 두긴 했다만,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 부하들을 깨워 봐야 하나. 전부 움직이면 다스토가 낌새를 눈치챌 테니, 라이돈이나 루멘 정도만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 환혹술을 위해 라이돈은 남겨 두는 게 좋을지도.
그렇게 카델이 들키지 않고 요젠을 찾을 궁리를 하며 걸음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런…… 른다고……!”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려왔다. 숨까지 멈춘 채 소리에 집중하던 카델이 심각해진 낯으로 불꽃을 꺼뜨렸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신중하게 발을 뗐다.
‘여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고 했는데……. 근처 마을도 쑥대밭이라 주민도 전부 대피했다고 하니, 길 잃은 사람일 확률도 낮고.’
그렇다면 기사단의 일원일까? 자신의 부하들은 전부 꿈나라로 떠났으니, 목소리의 주인이 기사라면 그림자 기사단 소속일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 기사단의 단원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의문은, 점점 선명해지는 소리를 따라 해소되었다. 목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던 건 오래전 일이야! 지금은 그림자 기사단의 기사로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단……!”
“지금 네 삶이 속죄라고 하는 거야? 그렇다기에 넌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배부르게 나랏밥을 먹고, 매일 밤 따뜻한 집에서 잠들고, 길거리에 나가면 모두가 널 우러러봐. 이런 삶이 네 속죄야?”
“그, 그건…….”
“넌 그저 더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죽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네가 바라는 건 돈뿐이야. 네가 신경 쓰는 건 그 돈이 더러운지 깨끗한지지. 내가 틀려?”
요젠이었다. 호계 기사단과의 내기 당시, 셀레브와 그의 대화를 훔쳐 들었던 것처럼. 카델은 몸을 숨긴 채 숨소리를 죽였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마족과 싸우고 있다는 거다! 자기 입맛대로 살인이나 하고 다니는 놈한테 날 죽일 자격이 있을 것 같아?”
“사람을 죽이는 덴 자격이 필요 없어. 그러니 너 같은 쓰레기도 돈 몇 푼 받으면서 사람을 죽여 댄 거겠지.”
“그럼 심판하는 것처럼 굴지 말고 덤벼! 헬레난지 뭔지, 그딴 여자 기억도 안 나지만 복수하겠다면 받아 주지. 대신 이곳에서 죽는다고 나를 원망하진 마라!”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가 이상했다. 한 명은 요젠임이 확실했고, 다른 한 명은 그림자 기사단의 기사인 것 같은데. 그 둘이 왜 말싸움을 하고 있으며, 왜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인지.
이어서 들려오는 요젠의 싸늘한 음성에, 당혹감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카델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 요란스러운 입부터 없애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