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9화 (349/521)

황제의 앞에 선 세 남자는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 엑토 엔티는 짐짓 근엄한 척 얼굴을 굳혔으나, 눈빛에서는 어서 본론을 꺼내라는 재촉의 기미가 가득했다.

반면 천시 기사단의 단장, 모리톨 아낙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언제고 황제의 발언을 기다리겠다는 듯 고요히 인내했다.

마지막으로 적린 기사단의 단장, 카델 라이토스. 그의 표정은 셋 중 가장 복합적이었다. 이미 미래를 짐작하고 있으니 어서 결론이나 내 달라는 듯한 무료함과 피로감은 물론, 때때로 다른 생각에 빠져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지기도 했다.

제국의 황제, 데릭 오스마는 그런 세 남자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마계의 봉인이 결정됐네.”

짧고 간결한 회담의 결과였다. 물론 회담 자체는 늘어질 대로 늘어져 군살이 잔뜩 붙었지만, 전쟁으로 피로한 단장들에게 모든 정보를 구구절절 나열할 필요는 없었다.

데릭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엑토였다.

“드디어 폐하께서 감춰 두었던 황가의 보물, ‘평화의 돌’을 꺼낼 때가 온 겁니까? 크크, 기대되는군요. 폐하는 항상 ‘평화의 돌’의 위치 따윈 모른다고 역정을 내셨지만, 전 믿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선 충신에게마저 숨길 만큼 중요한 보물을 간직하고 계신다는 걸!”

흥분으로 커진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새로운 장난감을 코앞에 둔 아이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이 데릭을 향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대의 망상은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질 줄을 모르는군. 황가에 숨겨 둔 ‘평화의 돌’ 따위는 없네.”

“이런 때까지 농담하시는 겁니까, 폐하!”

“정말이지 피곤하군. 농담이 아닐세. 내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세븐 나이츠의 전설에서 전해지는 ‘평화의 돌’이 실존한다는 것뿐이야. 그 위치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네.”

“돌이 실존한다는 건 저 같은 아저씨도 실제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폐하나 저나, 처지는 똑같았군요. 실망스럽게도.”

엑토가 대놓고 혀를 차며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에 데릭은 제법 황당한 모양이었지만, 모리톨이 이 이상 한심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저지했다.

“다른 국왕들도 ‘평화의 돌’의 위치는 알지 못하던가요, 폐하?”

“그렇네. 그들이 가진 것도 돌이 있다고 추측되는 장소가 묘사된 석상뿐이더군. 그 단서를 통해 장소를 유추하는 작업이 진행될 걸세. 자네들은 직접 그 장소들을 찾아가 돌을 수색해야 하고.”

묵묵히 데릭의 말을 경청하던 카델이 되물었다.

“장소가 묘사된 석상이라뇨?”

“마계 전쟁이 끝난 후, 세븐 나이츠를 수호하던 신들은 자신들을 조각한 석상을 찾아가 ‘평화의 돌’의 위치를 묘사한 글귀를 새겼다고 하네. 당시의 국왕들은 그 신성한 석상을 옮겨 따로 보관하거나, 글귀만 가져다 기록해 뒀지. 전설로도 전해지지 않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던 비밀일세.”

“미리 찾아보진 않으셨던 겁니까? 마계 전쟁이 일어난 후를 생각하면 봉인도 염두에 두셔야 했을 텐데요.”

타박과도 같은 말투에 모리톨의 시선이 움직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당돌한 태도의 카델을 훑었으나, 카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데릭 역시 카델의 지적에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염두에 두지 않았네.”

“어째서죠?”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를 꼽아 보지. 안타깝게도 제국에 남은 글귀는 오로지 ‘죽음’만을 가리키고 있었거든.”

죽음이라니.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서, 데릭은 품속에 있던 양피지를 꺼내 카델에게 넘겨주었다. 카델은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끼며 양피지 속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악귀의 땅이오. 떠오르지 않는 태양, 영면에 든 희망. 그들의 저주 속에 우리의 영웅이 묻혔네. 저주를 삼킨 심장은 죽지 않고 뛰어 대니, 푸른 하늘의 영혼은 쉬지 않고 행복하리라.]

“이게…….”

“마계라고 짐작하네. 마계의 어디쯤인지는 전혀 짚이는 바가 없지만.”

다른 단장들에게 양피지를 넘기며 글귀의 뜻을 곱씹던 카델이 이내 낮은 탄식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래서 셀레브가…….”

“셀레브?”

“아아, 그렇군!”

카델의 중얼거림에 데릭과 엑토가 연달아 반응을 보였다. 엑토는 데릭에게 자신이 며칠 전 전달했던 기묘한 마법진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은 이미 마계에 ‘평화의 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마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미리 방법을 알려 준 거죠. 젠장,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알고도 걸려야 하는 덫이었다니!”

“어차피 인간계에 남은 ‘평화의 돌’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테니, 마족들은 병력을 충당하고 전열을 다듬는 데 충분한 여유가 있을 겁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마계에 도착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면, 마족들의 긴장감이나 전의가 하락할 테죠. 오래 기다려 봤자 좋을 게 없으니 먼저 수를 쓴 겁니다.”

글귀를 읽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셀레브의 행동도 조금씩 아귀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스토리의 마지막을 알리는 퀘스트가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마계 전쟁 - 후後편’ 수락 완료!」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스토리를 진행하십시오. 보상이 주어집니다.」

「해당 퀘스트에는 필수 충족 조건이 존재합니다.」

「보유 봉인석 : 0/7」

「봉인 진행도 : 0%」

「모든 봉인석을 모아 봉인을 성공시키십시오.」

「실패 시, 세계 소멸.」

*

카델은 본래 머물고 있던 마을, ‘온드’로 복귀했다. 이동 마법진을 타고 온 그의 뒤에는 데릭이 붙여 준 황실 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려 드린 위치로 가시면 고위 마족이 남긴 마법진이 보일 겁니다. 곧바로 분석 작업에 착수해 주세요. 저도 곧 합류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을 보낸 뒤엔 자신의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을 모았다. 카델은 그들에게 황제에게서 들은 회담의 내용과 결론, ‘평화의 돌’의 존재와 제국에 남은 글귀에 대해 알렸다.

“제국의 글귀는 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인간계에서 그 글귀와 부합하는 장소를 찾지 못하는 이상, 마계로의 침입은 불가피할 거야.”

봉인을 위해서는 직접 마계로 내려가 정면충돌을 감행해야 했다. 아주 위험한 전투가 될 것이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카델이었다. 그는 이번 싸움이 스토리의 마지막임을 알았다. 이곳에 빙의한 뒤 가장 손꼽아 기다렸고, 또한 두려워했던 퀘스트.

완벽하게 끝마쳐야 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이 더없이 슬픈 이별과 절망이래도,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위해서. 단 한 명도 잃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지켜 내야 했다.

“왜 벌써 죽상이야, 대장.”

카델이 느끼는 부담감을 눈치챘는지, 이야기를 듣던 루멘이 장난처럼 말했다. 다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단장님. 지금 당장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내려가게 된대도 죽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걱정하긴 이르답니다.”

“자기,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다른 인간들은 무능할지 몰라도 난 아닌걸!”

“무슨 일이 있대도 제가 지켜 줄게요, 단장.”

“마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온통 적일 테니 전부 죽이면 되잖아. 쉽고 편해.”

카델이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만큼, 부하들 역시 카델을 걱정했다. 그들은 카델을 믿고 의지했으나, 그가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불안을 공유하고, 행복을 나눈다. 그들은 카델의 지휘 아래 그렇게 뭉쳐 왔다. 이제 와 카델이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도록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델은 금세 소란스러워진 부하들의 틈에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지금까지 혼자 싸워 온 게 아니잖아. 이 녀석들이 없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그러니 마지막도 마찬가지야. 다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어.’

그들이 있기에 몇 번을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희망이었고, 이 세계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다.

“질까 봐 걱정한 적 없거든! 내가 걱정하는 건, 제국이 돌의 위치를 마계로 특정한 순간부터 제국 기사단은 동맹국의 수색 작전에 투입될 거라는 부분이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충 인력 될 생각에 벌써 피곤하다고.”

카델은 두려움을 털어 내듯 되레 큰소리를 냈다. 마계와의 정면충돌을 감행하기 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평화의 돌’ 수색을 돕는 일부터 마계 마법진의 분석까지. 주어진 시간은 충분했으니, 무거운 결심은 그때로 밀어 두어도 좋았다.

셀레브가 남겨 둔 마계 마법진을 연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탓에 겉으로 드러난 술식이나 비슷한 원리를 투영하여 발동법을 지레짐작할 뿐.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타국의 궁정 마법사들까지 연구를 위해 파견됐다.

마법진 주변이 비는 일은 없었으므로, 몰래 가르엘을 데려와 마기를 주입해 볼 틈이 없었다. 어차피 마기를 불어넣는 순간 마법진에 이상이 생겨 의심을 사게 될 테니, 별 소용없는 짓이기는 했다.

분석이 진행되는 동안 단원들은 다른 기사들과 근방을 정찰하거나, 조금 더 먼 곳으로 움직여 마물 소탕을 돕고는 했다. 단장이 뛰어난 마법사인 탓에 발이 묶인 셈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그렇게 약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마계 마법진에 매달렸다. 안타깝게도 크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으나, 분석의 갈피는 잡았다. 마계 마법진을 인간들의 마법진으로 치환할 방법. 그 첫 단계인 술식 추출에 성공한 것이다.

남은 것은 추출한 술식을 마력으로 구성한 뒤, 포탈 생성을 실험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카델 같은 고위 마법사의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복잡한 마계 마법진의 술식을 추출하는 데에서 충분히 빛을 발했다.

또한 ‘평화의 돌’ 수색 작전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왔으므로, 카델은 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마법사들을 떨쳐 내며 다시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둥켈하이의 수도, 스코타비.

“의외로 둥켈하이 왕국과 인연이 깊단 말이지.”

약속된 장소로 이동하는 마차 안. 루멘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라이돈이 앓는 소리를 내며 혀를 내밀었다.

“칙칙한 게 꼭 요젠을 닮은 나라야. 왜 하필 둥켈하이에 지원이야? 난 화이트 왕국이 더 좋아. 바다도 보이고, 초콜릿도 맛있다고.”

“화이트 왕국이 지원 요청을 했으면 가르엘 경이 고생했을 거다.”

“알 게 뭐야, 가르엘이 고생하든 말든.”

이번에도 뽑기를 통해 정해진 자리였다. 카델은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를 일별하곤, 다시 손에 든 종이로 시선을 고정했다. 종이에는 둥켈하이로 이동하기 전, 따로 옮겨 둔 마법진의 술식이 그려져 있었다.

“남의 고향 험담하지 마, 라이돈.”

“자기, 지금 칙칙한 요젠을 칙칙하다고 했다고 날 혼내려는 거야?”

“그래.”

“너무해! 내리자마자 요젠을 열 갈래로 찢어 버릴 거야!”

“누가 그런 못된 소리 하래?”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카델이 야속한지, 라이돈은 커다란 몸을 들썩이며 섭섭함을 표출해 댔다. 카델은 흔들거리는 마차에 멀미가 날 즈음에야 대충 라이돈을 달래 주곤, 다시금 마법진에 집중했다.

두 시간가량의 이동 끝에는, 미리 대기 중이던 그림자 기사단과 이동 마법을 위한 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델은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을 찾아 눈을 굴렸다.

‘뭐, 확실히 이쪽은 칙칙하긴 하네. 반박할 수 없겠어.’

온통 새까만 단복에 어두운 머리색. 대부분이 얼굴을 가리는 복면 같은 천을 두르고 있다. 눈만 덜렁 보이는 기사들이 수십씩 모여 있으니, 도저히 음침한 기운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복면을 쓰지 않은 이는 딱 한 명뿐으로, 카델은 그가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임을 알아챘다.

“적린 기사단의 단장, 카델입니다. 잘 부탁드리죠.”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다스토 살라웰입니다.”

맞잡은 손에선 도통 사람 같지 않은 한기가 느껴졌다. 날이 춥기 때문인지, 원래 체온이 낮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까만 눈동자, 선이 굵은 이목구비와 딱딱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어지간히 곁을 내어 주지 않을 것처럼 보여 영 껄끄러웠다.

“그런데…….”

언뜻 날이 선 듯 보이는 시선이 카델의 뒤편을 훑어 내렸다. 짧게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카델을 보며 말했다.

“들었던 것보다 한 명이 적군요.”

“……?”

한 명이 적다니. 설마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 누군가 낙오되기라도 한 걸까. 당황한 카델이 빠르게 뒤를 돌아 단원들의 수를 헤아렸다. 그리고 곧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요젠이 없었다. 그와 같은 마차를 탔던 가르엘은 카델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 그 한 명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합류할 거예요.”

아무래도 그림자 기사단 앞에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럴 거라면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지. 머쓱하게 둘러대며 다스토를 돌아보자, 빤한 시선이 닿아 왔다.

카델의 속내를 들춰 보겠다는 듯 무례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던 다스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꽤 뛰어난 암살자를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함께 마차를 타고 왔을 텐데 아무런 기척도, 흔적도 남지 않았군요.”

“뭐, 워낙 신출귀몰한 친구라.”

“제가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암살자는 몇 없습니다.”

혹시 다스토는 적린 기사단의 암살자가 영면의 사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전쟁 중에 그것을 꼬투리 삼아 싸움을 방해하진 않겠다만, 요젠의 정체가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묘한 긴장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무게를 잡던 다스토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이동하시죠. 이미 전달받으셨겠지만, 저희의 수색 범위는 제법 넓습니다. 체력에 무리가 간다면 참지 말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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