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봐요. 그냥 빵 먹고 싶어서 찾아온 거죠?”
“인간의 음식 같은 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아. 누굴 너 같은 먹보로 아느냐?”
“그럼 건들지 말고 놔둬요! 부하들 먹이려고 가져온 건데.”
요젠은 이리저리 이동하는 빵의 움직임을 읽으며 낮게 침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텐데. 카델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혹해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 적룡, 쿤라.
물론 카델의 방에 나타난 적룡은 요젠이 산에서 느꼈던 것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껄끄러운 것은 여전했다.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그가 쿤라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저 암기가 있는 곳에서 작업을 시작할 순 없으니,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아니냐. 이 몸더러 그동안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으란 말은 아니겠지?”
“왜 사람 이름을 그따위로 불러요? 얜 암기가 아니라 요젠이에요. 그리고 기다리기 싫으면 나중에 다시 오면 되잖아요.”
“이 몸은 그리 한가하지 않아. 네게만 집중할 시간이 없단 말이다. 시간이 날 때 네가 맞춰야지.”
“아직도 바쁘다고요? 결계 강화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결국엔 시원찮았던 모양이죠.”
“……좋다. 반쪽이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저 암기가 보든 말든 내 마음대로 굴어 주마.”
마계의 동태를 파악하느라 안 그래도 예민해진 쿤라였다. 보통이라면 힘을 나눠 준 데에서 도리를 다했다 여기고 방치했겠다만, 카델과는 특별한 약속을 한 바가 있으니. 친히 관심을 두어 찾아왔건만 태도가 아주 건방졌다.
카델은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쿤라의 모습에 주춤하며 의자를 뒤로 뺐다. 아무리 요젠이 앞이 안 보인다지만, 그의 앞에서 쿤라와 딱 붙어 기운을 받고 싶진 않았다.
“아, 알겠어요! 요젠, 미안한데…….”
“그 ‘작업’이 앉아서 기운을 주입받는 일이라면 난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응?”
“네 그림자 분신을 통해서 종종 지켜봤거든.”
생각지 못한 답변에 카델의 표정이 굳었다. 평소 요젠이 그림자 분신을 통해 제 위치를 알아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일상에서도 지켜보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그런 것까지 봤어?”
“응. 분신은 꾸준히 신경 써 줘야 오래 유지할 수 있거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기운을 보충하면서 지켜봐. 가끔 너무 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으면 놔두고 다른 일을 하기는 하지만.”
“너무 사적인 일? 그게 뭔데?”
“갑자기 춤을 춘다든가, 다 벗고 목욕을 한다든가, 혀를 내밀고 키스를 한다든가…….”
“와아악! 그만! 그만 말해!”
태연한 목소리로 떠벌려지는 사생활에 기겁한 카델이 요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뻘게진 얼굴로 씨근덕거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는 쿤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론 그냥 유지만 하고 뭐 하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마! 그냥 꺼내 놓고 방치해. 알겠어?”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 보는 게 전부라면서 대체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모습만 골라 봤단 말인가. 카델이 수치심에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단장의 명령을 강조하자, 처음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던 요젠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카델이 능욕당하는 꼴을 지켜보던 쿤라. 그는 요젠의 입이 자유를 얻자마자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기보다 신사적인 인간이로군. 내가 너였다면 분신에 대고 이런저런 짓을 해 봤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이미 해 봤는데 비밀로 하는 건가?”
“넌 내가 본 인간 중 가장 미쳐 있다, 반쪽이. 특별히 인정해 주지.”
“시끄러워요!”
요란스럽게 문을 닫은 카델이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살짝 부어오른 오른뺨을 감싼 쿤라가 있었다. 그는 카델이 다가오자 보란 듯이 뺨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감히 이 몸의 얼굴에 손을 대?”
“진짜 몸도 아니잖아요. 회복할 수 있으면서 왜 놔두는 거예요?”
“황당하고 괘씸해서다. 이 몸의 긴 생에 인간형 모습을 보여 준 인간도 몇 없다만, 그 인간에게 손찌검을 당한 적은 아예 없어. 네가 처음이다. 훌륭한 인성을 가졌군.”
“그러게 왜 그딴 헛소리를 해요. 이런저런 짓? 요젠은 당신 같은 변태가 아니거든요.”
“모르는 일이지. 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음침한 인간이 정말 분신에조차 손을 대지 않았을까?”
카델은 반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주먹에 힘을 주며 쿤라를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요젠의 발언에 정신이 없었는데, 쿤라까지 헛소리를 하며 자극해 대니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 버린 것이다. 적룡의 얼굴을 쳐 버린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상당히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설마 마계 전쟁이 한창일 때에 힘을 나눠 준 인간을 해코지하겠는가.
‘저 미친 용대가리 때문에 괜히 요젠만 내쫓아 버리고. 나중에 잘 달래 줘야겠어.’
그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같이 있는 시간을 내기도 힘들던 차였는데, 직접 밖으로 내쫓아 버리기까지 했으니. 혹시라도 상처받은 요젠이 다시 거리를 두진 않을까 걱정됐다.
“됐고, 기운이나 넣어 줘요. 빨리 끝내 버리자고요.”
여전히 구타의 충격에 빠진 듯한 쿤라를 옆으로 밀치고,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쿤라는 그런 카델이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찼지만, 카델에게 집중할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타박할 시간이야 언제든 생길 테니. 지금은 이 건방진 인간의 말에 따라야 했다.
“제대로 돌아앉거라.”
자연스럽게 자세를 튼 카델이 옷을 들쳐 하얀 등허리를 드러냈다. 그러자 쿤라의 큼직한 손이 미지근한 살갗을 훑어냈다. 금세 붉은 기운이 맺힌 손끝에 힘을 주어 가볍게 누르자, 뜨끈한 열기가 몸속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변화를 느끼진 못하는 모양이지?”
“무슨 변화요?”
“네 영혼 분리 작업이 절반 이상은 진행됐다. 미세한 변화 정도는 감지할 줄 알았건만, 꽤나 둔감한 모양이야. 아니면 이미 다른 영혼이 너무 익숙해진 탓에 완전히 분리하기 전까진 실감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다행이죠. 전쟁 중에 혼란해 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요.”
“하루빨리 분리되길 바라는 줄 알았다만.”
“……글쎄요.”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를 받아들인 지는 꽤 됐다. 어쩌면 쿤라의 말대로 이미 그와 뒤섞인 삶이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내 감정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용쓰지 않으니, 훨씬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하들과 보내는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싸움에도 더욱 전투적으로 임했다.
물론 여전히 카델 라이토스가 사라진 ‘신여환’이 무엇을 느낄지 두렵기는 하다. 불쑥불쑥 그런 공포감이 차올라 곤란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부하들의 존재가 그를 달래 주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가진 유일한 꿈. 그들의 행복을 생각할 때면, 자신의 암담한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니까.
“특별한 변화가 감지된다면 바로 말할게요. 아직까진 평소랑 똑같……. 쿤라?”
온화하게 퍼져 나가던 기운의 흐름이 뚝 끊겼다. 이상을 감지한 카델이 쿤라를 부르자, 잠시 조용하던 뒤편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말거라.”
“뭐예요, 갑자기.”
고개를 돌리니 잔뜩 인상 쓴 얼굴이 드러났다. 기운의 흐름은 재개되었지만,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카델이 계속해서 추궁하며 작업을 방해하려 들자, 참다못한 쿤라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최근 들어 네게 기운을 불어넣을 때마다 두통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래도 그 시스템이란 녀석이 이 몸의 간섭에 반발하면서 생긴 부작용인 것 같아.”
“……괜찮은 거예요?”
“가벼운 두통일 뿐이야.”
그리 말한 쿤라가 카델의 자세를 억지로 교정하곤,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더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기에, 카델 또한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쿤라가 두통을 느낄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아무리 쿤라라도 시스템을 거스르기 위해선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몰랐다. 급속도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힘을 나눠 주는 일이라면 몰라도, 영혼을 분리해 주는 것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쿤라의 배려였으니.
그렇다고 작업을 멈추라 할 수도 없는 처지다. 카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반항을 줄인 채 얌전히 쿤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였다.
“……다 됐다. 이만 가 보지.”
“네? 벌써요?”
“아쉬운 척하지 말거라, 반쪽이.”
딱히 아쉬운 것은 아니었으나, 쿤라가 이리 급히 돌아가는 일은 평소에도 드물었다. 역시 부작용이 심해져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든가, 혹은……. 살짝 불안해진 눈빛으로 쿤라를 바라보자, 그대로 사라지려던 쿤라가 주춤하며 멈춰 섰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혹시 무리하고 있는 거라면 말해요. 중단……까진 힘들어도 천천히 하면 되는 거니까.”
“……웃기는군.”
진심이 담긴 걱정이었으나, 쿤라는 피식 웃고 넘길 뿐이었다. 여전히 앉은 채인 카델의 앞에서 허리를 굽힌 쿤라가 그의 이마를 짓누르듯 제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무게에 밀려 기울어진 카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수많은 걱정거리에 나까지 포함시키지 마라. 작은 인간에게 걱정받을 만큼 나약하지 않거든.”
“그건 알고 있지만요.”
“알면 됐다.”
시큰둥하게 답한 그가 이마를 떼어 내곤, 카델의 얼굴을 장난처럼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카델이 짜증스레 팔을 휘저었으나, 닿는 것은 없었다.
“……뭐야. 기껏 사람이 걱정해 줬더니.”
카델은 단번에 자취를 감춘 쿤라의 빈자리를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쿤라의 일부는 여전히 제게 묶여 있으나, 최근 그가 말을 걸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설마 나빠진 몸 상태 때문은 아닐까. 다시금 쿤라의 건강을 의심하던 카델이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쿤라의 말대로였다. 이미 쌓일 대로 쌓인 걱정거리에 적룡의 안위까지 얹을 필요는 없다. 그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이니.
*
적린 기사단에게 주어졌던 꿀 같은 휴식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4일째 아침. 카델은 여관을 찾아온 황실 정찰병에게서 서신 하나를 전해 받았다. 안에는 회담이 끝났으니 제국의 기사단장들은 속히 성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얼마 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지.”
다 읽은 서신을 힘주어 접은 카델이 시야 구석에 자리한 시스템 창을 일별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00%」
「인간계 침략 진행도 : 02%」
‘아무래도 다음 퀘스트는 회담 내용을 전달받은 뒤에나 시작되겠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침략 진행도가 수월하게 감소했다. 적린 기사단이 직접 나서 곳곳을 헤집을 필요도 없었다. 성에 도착해 전쟁의 다음 목표를 구체화한다면, 자연스럽게 퀘스트와 연계될 것 같았다.
이번 메인 퀘스트가 마계 전쟁의 전편이었으니, 이다음은 후편. 최종 퀘스트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적들이 떼거리로 쏟아졌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여러 사고가 발생했던 것치곤 무난하게 헤쳐 왔다고 볼 수 있지.’
수련의 결과가 빛을 발한 듯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스토리의 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마계의 몰락이 다가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동족이, 터전이 무너지는 것을 얌전히 보고만 있을 종족은 없다. 마족들은 최후의 발악을 할 테고, 예측하지 못한 무수한 사고들이 발생할 것이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셀레브가 남기고 간 마법진인가.’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덫. 그 덫의 정체를 파악하고 위험에 대비하는 일이 우선이다. 쿤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가 그럴 만한 여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슬슬 지원을 요청한 마법사들이 이동할 때가 되었으니, 하루빨리 그들과 힘을 합쳐야 했다.
‘성급하게 굴지 말자. 일단은 회담 결과를 듣고, 메인 퀘스트의 내용을 확실하게 확인한 뒤에 해결 보는 거야.’
부지런히 옷을 갖춰 입은 카델이 큰 들숨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마침 노크를 하려던 듯 주먹을 들고 있는 엑토와 마주쳤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주먹을 치켜든 우람한 사내를 목도한 카델이 반사적으로 물러서자, 엑토가 씨익 웃으며 카델의 어깨를 짚었다.
“폐하의 서신은 받았소?”
“예. 방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엑토 경은 왜 여기…….”
“이동 마법진 좀 얻어 타려고 말이오. 그간 편히 쉬었을 테니, 그 정도 마력은 남았지 않겠소?”
“그러죠. 어려운 일도 아니니.”
“크하하! 역시 사람은 마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해. 나에게도 재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오.”
엑토는 자신에겐 재능이 없으니 마법사들만 보면 영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며, 은근슬쩍 라이돈과 제 대원을 교환하자 들러붙었다. 그에 카델은 깔끔한 무시로 화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