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날 며칠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기만 해도 절대 지겹지 않으리라고 자신했건만. 전투에 익숙해진 몸은 의외로 이어지는 게으름을 견디지 못했다. 카델은 뻐근해진 몸을 풀어 줄 겸, 부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방을 나섰다.
“……뭐야. 다들 어디 있대?”
하지만 근방을 제법 오래 배회했음에도 부하들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단원이 다섯이나 되는데 한 명도 마주치지 못하다니. 평소엔 고개만 돌려도 볼 수 있던 부하들이 보이지 않자 묘한 쓸쓸함마저 느껴졌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다고 빈자리를 느끼는 건가. 이건 조금 위험할지도. 독립성의 하락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카델이 머리를 털었다.
‘됐어.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북적거리는 걸 좋아했다고. 혼자 놀면 돼.’
마침 부하들이 매번 찾아와 귀찮게 구는 게 지겨운 참이었다. 다 같이 몰려다니는 것보단 혼자 여유롭게 쏘다니는 게 취향에 맞다. 그들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근데 생각할수록 웃기네. 평소엔 그렇게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지더니. 이젠 또 개인 시간을 갖고 싶어? 참나.”
단원들끼리의 맹약을 알지 못하는 카델로서는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부하 찾기를 그만둔 카델이 괜한 분노로 씩씩거리며 가까운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빵 냄새와 원두 냄새가 진동했다. 부드러운 온기에 시큰둥했던 마음이 슬쩍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카델은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빈자리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곧 익숙한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도드라진 존재감을 가진 사내. 홀로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와 함께 신문을 읽고 있는 저 훤칠한 미남자는, 바로 루멘이었다.
그를 발견한 카델이 거침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카델의 기척을 느낀 루멘 역시 신문 위로 눈을 들었다.
“……대장?”
“어디 있나 했더니.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보네?”
“날 찾았어?”
“아니, 딱히 찾진 않았어.”
한껏 평화로워 보이는 루멘의 모습에 절로 뚱한 목소리가 나왔다. 카델이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자, 루멘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심심했나 보군.”
“별로. 그냥 산책 겸 들른 건데. 커피 마시고 싶어서.”
“아, 그래?”
“어, 그래.”
괜히 가게를 둘러보는 척 딴청을 피우던 카델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루멘을 돌아보았다. 곧장 마주치는 시선에 게슴츠레 눈을 뜬 그가 톡 쏘듯 말했다.
“하던 거나 마저 해. 난 잠깐 들른 거라니까.”
“신문이나 읽으라는 건가?”
“그래. 방해 안 해.”
“대장을 앞에 두고 읽을 만큼 재밌는 내용은 없던데.”
“…….”
“이렇게 단둘이 카페에 있으니, 그날 생각이 나는군.”
“그날?”
“마밀 님을 만났던 날 말이야.”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던 카델이 이내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카델은 처음 만난 마밀을 꼬셔 내기 위해 카페 ‘당근과 쉬폰’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루멘과 조우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심장 졸였는지 알기나 해? 마밀 님이 너 보고 다시 도망갈까 봐 신경 쓰여서 머리털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고.”
“날 따돌리는 게 괘씸해서 말이지. 그때 대장의 반응이 굉장히 재밌었던 기억이 있어.”
“난 재미없었거든.”
“우리가 처음으로 친우가 된 날이기도 하잖아.”
“……아.”
찬찬히 기억을 더듬던 카델이 헛웃음을 뱉으며 뺨을 쓸었다. 확실히 그랬다.
“라이토스가의 재기를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태 주기로 한 제 소중한 친우예요, 마밀 님. 초면에 큰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이 친구도 반성하고 있답니다. 그렇지, 루멘?”
어떻게든 마밀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하러 온 루멘까지 끌어들였지. 떠올릴수록 과거의 루멘이 참으로 얄미워 한 소리 하려는데, 루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분 좋았어. 티는 안 냈지만.”
한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이가 자신이라는 것에 괜스레 몸이 꼬일 만큼. 급격히 쑥스러워진 카델이 말없이 뒷덜미를 문질렀다. 왠지 제대로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고마워.”
뜬금없는 감사에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가볍게 눈을 휜 루멘이 말했다.
“몇 번이고 날 받아 줘서.”
“……새삼스럽긴.”
“난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모자란 사내놈을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줬으니, 항상 고맙게 생각해.”
예상치 못한 말에 어떤 대답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차에, 타이밍 좋게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다. 열 오른 잔을 감싸 든 카델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 부끄럼 타는 거야?”
“아니거든.”
“……알아줬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생각해 보니 직접 표현한 적이 없던 것 같아서.”
그렇긴 했다. 루멘은 항상 표현에 서툴러서, 그와의 관계는 초반부터 많은 오해와 충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속내를 밝히기 시작하더니, 이젠 대놓고 애정을 표현할 줄도 알게 됐다.
이런 걸로 감동해도 되는 걸까. 카델은 묵묵히 커피를 홀짝이다,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루멘과 시선을 맞췄다.
무감하던 표정에 다채로운 눈빛이 깃드니, 그의 모습이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게 그 잘난 얼굴을 응시하던 카델이 짧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고마우면 앞으로도 잘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순순한 수긍에 루멘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은근한 긴장감이 풀어질 즈음이었다.
“단장?”
뒤쪽에서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껏 놀란 얼굴의 반이 성큼성큼 다가와 앞에 섰다.
“여기서 뭐 하세요?”
“보면 모르나? 나랑 시간을 보내는 중이지.”
“너한테 안 물었어, 도련님.”
카델은 서로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리기 바쁜 둘 사이를 가르며 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연히 만났어. 너도 같이 앉을래?”
“좋아요.”
“난 싫은데.”
“싫으면 네가 꺼져.”
좁은 자리를 비집어 굳이 카델의 옆을 차지한 반이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카델은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투기 시작하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희도 참 한결같다. 사이좋네.”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두 번 말해 봤자 더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 뻔해, 카델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두 남자는 첫 만남부터 유구하게 서로를 공격하며 다퉜지만, 카델은 그들이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어떻게 안 그러겠는가. 그간 수없이 힘을 합쳐 싸워 왔고, 앞으로도 등을 맞대며 싸울 소중한 동료인데.
“이쪽 쳐다보지 마. 밥맛 떨어진다고.”
“자신감이 과하군. 내가 너한테 눈길이라도 한 번 줄 것 같나? 난 대장을 보고 있었던 거야.”
“단장은 왜 쳐다보는데? 엄한 사람 보지 말고 그 앞에 널브러진 종이 쪼가리나 읽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본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지?”
“함부로 좋아하지 마. 단장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너 같은 기생오라비 취향이 아니라고. 상처받기 전에 하루빨리 마음 접는 게 좋을 거다.”
“글쎄. 대장은 항상 내 얼굴에 약해지던데.”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네 착각은 범죄 수준이군. 자중해, 도련님.”
소중한 동료……가 맞는 거겠지?
카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싸워 대는 두 남자를 뒤로한 채 점원에게서 음식을 받았다. 반은 주문한 디저트가 나오자 잠시 말을 멈추곤, 빵의 모양이 으깨지지 않게 신중히 잘라 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전부 카델의 앞으로 밀어 두었다.
“드세요.”
“응? 너 먹으려고 시킨 거 아니야?”
“아뇨. 처음부터 단장 먹일 간식 사려고 들렀던 거라.”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듯, 예쁘게 눈을 접은 카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정하네, 반. 고마워.”
“……뭘요.”
자신의 실체를 밝힌 뒤에도, 반은 예전처럼 곧잘 이것저것을 챙겨 주곤 했다. 천성이 그런 거라고 하기엔 다른 동료들을 챙겨 주는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 그의 배려가 카델 라이토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데에 매번 안도감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진 카델이 먹기 좋게 잘린 빵을 입안으로 나르는 동안에도, 둘의 다툼은 끊임이 없었다. 카델은 그들의 말싸움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조금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를 회상했다.
셋이 함께 다니던 용병단 시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는 가진 돈도 없어 루멘에게 마차 값을 빌려 다니곤 했는데. 처음 빙의했을 당시의 맹탕 수프를 떠올리면, 지금은 정말 행복한 일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차근차근 떠오르는 추억들을 음미하던 카델이 문득 먹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라이돈은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라이돈이 카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다른 부하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옆자리를 파고들던 요정까지 보이지 않다니. 괜히 걱정이 들었다.
어디서 거하게 사고라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게 물어 오는 카델에게, 루멘이 던진 대답은 간단했다.
“요 며칠 어떤 남자랑 붙어 다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