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던가. 암흑 마력을 남발하며 혼신을 다해 적 팀의 탐색을 방해하는 카델 못지않게, 그의 부하들 역시 치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아하하! 안 넘어지겠다고 버티는 꼴 좀 봐! 너무 하찮아서 카델이랑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하기도 싫어지는걸!”
라이돈은 마물을 잡는 것보다 인간들 괴롭히기를 더욱 즐거워했다. 그는 호계 기사단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지면을 빙판으로 뒤덮었고, 맥없이 미끄러지며 바둥거리는 기사들을 비웃었다. 간신히 빠져나온 몇몇 기사들의 앞에 친히 얼음벽을 세워 주기도 했다.
참다못한 기사들이 라이돈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으나, 눈발이 추가되는 부작용만 얻을 뿐이었다.
그렇게 알차게 호계 기사단을 괴롭히는 라이돈의 반대편. 반은 다른 기사들을 모조리 밀쳐 내며 독보적인 질주 중이었다.
그는 접근하는 기사들에겐 주먹을 먹이고, 자신을 앞지르는 기사에겐 오라를 밧줄처럼 뻗어 결박한 뒤 저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져 대는 기사에게 그가 건넨 말은 간단했다.
“이래서 곱게 큰 놈들이란.”
반에게 있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귀족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카델이 아니었다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도련님들. 가뜩이나 여기저기서 조금씩 말을 얹어 오는 게 짜증 나던 참이었는데, 마침 서로를 적으로 두고 내기를 한다니. 거슬리는 도련님들을 후려치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반에게 있어 가장 짜증 나는 도련님이자, 그럼에도 부지런히 상종해야 하는 사내. 루멘은 기사단의 누구보다 얍삽하게 마물을 처치하는 중이었다.
“찾았다! 서둘러, 적린 기사단이 오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적린 기사단의 치졸한 방해 공작에 넌더리가 난 호계 기사단은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며칠 굶은 걸인처럼 호들갑스럽게 달려들었다. 언제 어디서 방해받을지 모른다는 강박으로 눈빛에는 광기마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눈앞의 마물을 베어 내기 직전.
사악—.
한 줄기 섬광이 한 발짝 먼저 마물의 몸뚱이를 갈라냈다. 그 섬광이 사라지고, 잔상을 따라 마물이 갈라지는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푸른 섬광을 발견한 호계 기사단은 곧장 우렁찬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을 걷어찼다. 몇몇은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또야! 또라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직도 우릴 쫓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루멘 경? 나오십쇼! 당장 나오시라고요!”
한 기사가 그 짧은 시간 동안 피로로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참으로 애처로운 장면이었으나,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던 루멘의 심금을 울리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한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한 그가 무감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쪽은 마물 탐색 속도가 너무 느리군. 다른 무리를 쫓아가 볼까.”
루멘의 능력이라면 숲에 있는 마물의 기척을 감지해 빠르게 처치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마물을 찾는 대신, 호계 기사단이 찾아낸 마물을 훔치는 방법을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간단한 데다, 상대의 의욕과 실적을 가로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그 또한 그의 대장 못지않게 효율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이렇듯 각자의 방식으로 호계 기사단을 괴롭히고 있는 동료들 사이, 가르엘만이 홀로 억울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봐, 여기 마물의 흔적이 있어. 조금만 가면 나올 것 같은데…….”
사실 가르엘은 이번 내기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야, 그의 능력은 밝혀져서 좋을 것이 하등 없으니까. 내내 카델과 붙어 다닐 것이 아니라면 마기를 개방하지 못한다. 남은 빛 마력은 아무리 조심해도 눈에 띄기 십상이다. 정신없는 전장의 한복판이라면 몰라도, 이런 사소한 내기에서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자, 잠깐. 저쪽에 있는 저 사람…….”
그랬기에 가르엘은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며 숲을 활보했다. 일종의 산책이었다. 내기가 시작된 후로, 그가 한 일이라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젠장, 저거 흑마법사지?”
“어떻게 잘 피해서 돌아가면 마물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됐어. 괜히 얽혔다가 원망이나 산다.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발견한 기사들은 일찌감치 겁을 내며 돌아가기 십상이었고, 가르엘에겐 있지도 않은 암흑 마력을 욕하며 시력을 빼앗기기 전에 도망가자고 숙덕거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이 억울함을 토로할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으니.
“서러워서 목이 타네…….”
결국 가르엘은 어느 한적한 그늘을 찾아 아껴 두었던 술병을 열었다. 어차피 승리는 적린 기사단의 몫일 테니, 한 명 정도는 농땡이를 부려도 될 것이다. 이미 의도치 않게 상대편의 사기를 꺾어 둔 것도 같으니.
그리고 가르엘의 예상대로, 내기는 그 압도적인 인원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린 기사단의 승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남은 마물은 애들이 알아서 처치해 줄 거고. 나는 슬슬 엑토 경한테 돌아가 볼까.’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무수한 기사들을 방해하고, 먹잇감을 빼앗으며 철저하게 상대를 농락했다. 호계 기사단과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도 상대의 자존심이 상할 수 있으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할 것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처음 내기가 시작되었던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쯤이었더라.”
하도 사방팔방을 쏘다녔더니 방향 감각이 무뎌졌다. 카델은 왔던 길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숲속을 가로질렀다. 승리를 확신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근질거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어쩐지 길을 잘 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곤혹감이 차오를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필요 없으니까, 다른 데 가서 마법사 한 마리만 불러오라니까?”
“마법사가 왜 필요한 건데?”
“꼬치꼬치 캐묻지 마. 피 냄새 맡으려고 올라온 거 아니거든.”
“캐묻지 않으면 죽인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아.”
“하!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하여튼, 건방진 종족인 건 알아줘야 해.”
조금씩 소리의 근원지와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카델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미간을 좁혔다.
‘요젠 목소리잖아.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여자 목소리도 묘하게 익숙한데…….’
제가 아무리 기척을 죽였다 한들, 요젠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그런데도 요젠은 정체불명의 여성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카델이 도착하기 전에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평소와 달리 말투에선 조급함마저 묻어났다.
“마법사를 불러내려는 이유를 말해.”
“바보 같긴. 왜 불러내겠어? 필요하니까 불러내지.”
“해칠 건가?”
“그건 내 마음이야.”
“정확하게 말해.”
“……계속 성가시게 하네. 죽여 버린다?”
“덤벼.”
요젠의 싸늘한 대답에 카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덤비라니?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나? 물론 하는 말이 조금 거칠고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기세에 카델은 조심스러운 접근을 멈추고 다급히 움직였다. 좁은 나무 틈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오자, 작은 공터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것은.
“셀레브?”
“……허?”
짙은 보라색의 단발머리와 대칭을 이룬 눈물점,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에 작은 날개까지. 한쪽 다리에 찬 의족과 땅을 짚은 지팡이의 존재를 제외하면, 그녀는 제국 관문에서 처음 맞닥뜨렸던 고위 마족. 셀레브가 틀림없었다.
셀레브 역시 카델을 기억하는지, 난데없이 등장한 그의 모습에 와락 인상을 구겼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카델은 셀레브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요젠의 위로 비늘 갑옷을 둘러 주었다. 이미 요젠의 손은 암기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으나, 카델의 등장에 싸움을 보류하기로 한 듯 섣불리 행동하진 않았다.
“아, 젠장……. 하필 이 자식이 여기서 나온단 말이지. 다른 마법사는 없는 거야?”
“듣자 하니 아까부터 계속 마법사 타령을 하던데. 한쪽 다리로는 만족을 못했나 봐?”
“……성질 긁지 않는 게 좋아. 예전처럼 쉽게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니까.”
“자꾸 내가 할 말을 가로채지 말아 줘.”
셀레브는 한계까지 차오른 분노를 다스리듯 크게 심호흡했다. 카델의 등장에 차마 숨기지 못한 살기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흥분을 참아 내려 했다.
그녀의 이마에 돋은 핏줄을 일별한 카델이 바람을 일으켜 요젠을 건드렸다. 묵직한 풍압이 본인을 밀어 내자, 셀레브의 정면에서 버티고 있던 요젠이 조용히 거리를 벌렸다.
‘싸우려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속셈이지?’
셀레브의 성격이라면 전투를 목적으로 등장해 쓸데없는 말만 떠들어 댈 리 없다. 싸울 심산이었다면 자신이 요젠을 찾아내기도 전에 숲을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마법사만 죽일 생각이었대도 일단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봤을 여자야. 인간 마법사의 존재가 필요한 거다. 마법사를 불러내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정도면 인간에게도 뭔가의 이득이 있는 행동을 하려는 걸 텐데…….’
마족이 인간에게 이득 될 만한 거리를 내어 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카델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셀레브의 의도를 고민하던 때. 간신히 분노를 삼켜 낸 그녀가 이를 갈 듯 말했다.
“지금부터 좋은 걸 보여 줄 테니까, 그 작은 머리통에 제대로 새겨 두라고.”
셀레브는 마기를 개방하고 있었다. 금세 넘실대기 시작하는 보랏빛 마기에 카델과 요젠 모두 경계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의 마기는 둘 중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 다만 지면으로 흡수되듯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 일관적인 기운의 흐름을 지켜보던 카델의 눈이 게슴츠레 접혔다.
‘마법진?’
마기가 스며든 맨땅으로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수채화처럼 조금씩 번지며 모습을 드러내는 마법진. 그것은 막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존재했던 무형의 마법진에 마기가 색채를 더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리 설치해 두었던 마법진을 마기로 발동시키는 것이다. 셀레브는 이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해 애타게 마법사를 찾고 있던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굳이 인간 마법사까지 찾아가며 마법진의 발동 장면을 보여 줘야 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건 소환진인가? 대놓고 적을 소환해서 엿 먹여 보려는 의도?’
차라리 그런 불순하고 유치한 의도라면 이해라도 갔다. 카델은 조금씩 경직되는 몸을 느끼며 언제든 셀레브의 이상 행동에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 이쪽에는 자신의 부하들과 엑토의 기사단이 있다. 쉽게 당할 걱정은 없었다.
‘방심하지만 않으면 돼.’
그렇게 카델이 셀레브에 대한 의심과 적의를 키워 가고 있을 무렵.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내던 마법진이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 마기를 양껏 머금은 마법진은 독극물처럼 불길한 연기를 폴폴 풍기며 은은하게 발광했다.
“너희 멍청한 인간을 위해 우리 에밀리아가 특별히 편법을 알려 주는 거야. 뭐, 나로서는 무식한 인간들이 과연 이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을까 의구심만 들지만.”
“편법이라고?”
“그래. 그러니 멍청한 머리 열심히 맞대 가면서 잘 분석해 봐.”
한껏 이죽거린 그녀가 손안에 뭉친 마기를 마법진 위로 던지듯 내려쳤다. 그러자 마법진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에서부터 새어 나온 검은 연기가 빠른 속도로 셀레브의 몸을 집어삼키고.
“……아, 맞다.”
몸의 절반 이상이 연기 속에 파묻힌 그녀가 카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 말해 봐.”
연기에 가려진 그녀의 육체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연기 너머로 비치는 실루엣은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기괴하게 흔들렸다. 그 환상 같은 모습을 지켜보며, 카델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에밀리아가 알려 달랬거든.”
“나한테 관심이 있나 봐? 직접 물어보라고 해. 난 적극적인 편이 더 취향이거든.”
“……명을 재촉하는 데 재능이 있구나, 너.”
“칭찬 고마워.”
셀레브는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부분이 연기에 삼켜진 그녀의 육체는 움직일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카델은, 연기가 셀레브의 코끝까지 다다랐을 때에서야 묘한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별로 알려 주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자기 죽일 사람 이름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네. 카델 라이토스. 네 공주님한테 잘 전달해 줘.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당돌한 발언에 셀레브가 분노로 가득 찬 눈을 부릅떴으나, 그뿐이었다. 검은 연기가 그녀의 육체를 몽땅 집어삼킨 순간. 일렁이던 연기는 짧은 충격파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며, 셀레브 또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카델은 순식간에 적막해진 공간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셀레브를 먹어 치운 마법진 앞.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마법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갈한 형태를 되찾았다. 그 위에는 미약한 마기의 잔재가 남아 마법진의 소멸을 막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척이 없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야.”
그의 옆으로 다가온 요젠이 말했다. 카델은 마법진 앞에 쭈그려 앉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이동 마법진이 아니야. 소환진이랑도 조금 다르고.”
셀레브가 가진 의도가 느리게나마 감이 잡혔다. 카델은 마법진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정전기 같은 스파크가 튀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마력을 거부하는 마법진이야. 마기로만 발동이 가능한 건가.’
마기로만 발동이 가능하고, 마법진을 통해 이동한 대상은 요젠조차 기척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곳으로 사라진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던 카델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마 마계로 통하는 일방적인 포탈 같은데.”
“일방적인 포탈?”
“응. 이걸 굳이 나한테, 아니, 마법사에게 보여 준 이유라면……. 이 마법진의 술식을 이용해 마계와 통하는 포탈을 만들어 보라는 게 아닐까.”
일전, 쿤라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있다. 대마법진이 발동되면, 인간 역시 마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방법이 상당히 까다로울 것이라고도 했다. 마침 어떻게 방법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찜찜한 점이라면 어째서 마족이 직접 인간에게 마계 이동의 열쇠를 쥐여 줬냐는 건데.
‘인간이 우세하니 본인들 땅에서 전세를 역전해 보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미 인간들을 마계로 끌어들일 만한 미끼도 준비해 뒀겠지.’
덫임을 빤히 알고도 직접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 만한 미끼. 곰곰이 생각하던 카델이 이내 머리를 털었다. 여기서 혼자 고민한다고 쉽게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엑토 경한테…….”
요젠이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카델의 눈이 작게 벌어졌다. 조금 전만 해도 거리를 두고 서 있던 그가 어느새 자신과 나란히 쭈그려 앉아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보이는 잡티 하나 없이 흰 얼굴에 카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은밀한 움직임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델은 곧장 몸을 일으켜 요젠과 거리를 벌리는 대신, 물끄러미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법진 쪽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있었으나, 딱히 마법진에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오래도록 마법진 앞에 앉아있으니 따라 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셀레브는 어쩌다 상대하게 된 거야? 네가 먼저 들켰을 리는 없고.”
“처음엔 죽이려고 지켜봤어. 그런데 계속 움직임 없이 멈춰 있길래, 뭔가 이상해서 접근한 거야.”
“그랬더니?”
“다짜고짜 마법사를 내놓으라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바로 죽이려고 했는데, 이유 정도는 알아 놔야…….”
부지런히 말을 잇던 요젠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요젠?”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꾹 힘을 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시야 끝으로 붉게 물든 요젠의 귓불이 들어왔다. 무심코 손을 뻗어 열 오른 귓불을 문지르자, 요젠이 흠칫하며 몸을 뺐다.
“무슨 문제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카델의 집요한 조름에도 요젠은 조개처럼 다물린 입을 열지 않았다.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는 탓이었다. 그 마족이 마법사를 원하는 이유를 알아내면, 카델이 좋아할 것 같았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적의 정보를 빼낸 뒤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면 분명 카델은 자신을 칭찬해 줄 테니까.
단순히, 예쁨받고 싶었다. 더 큰 사랑을 주겠다는 카델의 말에 홀려,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다. 마족에게 정보를 빼낸대도, 그 이유가 자신의 만족에 있어서는 안 됐다.
카델의 애정을 갈구했다는 사실이 점점 자괴감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고뇌에 빠진 요젠이 열심히 땅을 파고 있을 무렵. 그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카델이 자신의 손길을 피해 기울어진 요젠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잘했어. 바로 죽이지 않고 붙잡아 둔 덕에 새로운 정보를 알 수 있게 됐으니까.”
“…….”
“네 덕분이야, 요젠.”
요젠의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지난번의 대화로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게 됐다. 요젠을 대할 때는 전진만이 답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대답을 기다리는 짓은 소용없다. 그는 이미 몇 겹의 벽을 쌓아 두고 있으므로, 냅다 들이받아 부수지 않고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요젠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이쪽까지 표현을 아껴서는 안 됐다. 그가 사랑받는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사랑을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