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2화 (342/521)

물론 직접 나서서 잔류 마족을 처치하는 쪽이 침략 진행도를 떨어뜨리는 가장 확실하고 속 편한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카델의 마음은 이미 마족 토벌을 타국의 기사들에게 맡기기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동안 제국의 동태를 살피며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해야 할 나머지 고위 마족을 점검하고, 적절한 시기에 봉인 작업에 착수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뭐냐고. 체력 비축하기도 아까운 시간에 자진해서 마족 소탕? 이미 황제 승인까지 받았다는데 이제 와서 싫다고 뺄 수도 없고……. 아오! 짜증 나는 아저씨.’

현재 적린 기사단과 호계 기사단은 제국의 후방과 등을 맞댄 독립국, ‘제다이’에서 적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몇 시간 전에 근방의 숲에서 대량의 마물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숲에 들어선 이후, 전방에서 수색을 진행하는 단원들과 달리 단장인 카델과 엑토는 뒤쪽에 물러난 채 이야기를 나눴다.

“아침부터 숲을 거니니 기분 좋지 않소? 이런 맑은 공기라니. 숲의 기운이 피부에 스미는 듯하군.”

“아침엔 침대에 누워서 햇살이나 받는 편이 더 좋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몸이 늘어지면 마음도 늘어지는 법이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는 법이죠.”

“……경은 나와의 아침 산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오.”

“그럴 리가요. 순수하게 아침 산책이 싫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런 걸 산책이라고 하기도 뭣하죠.”

물약으로 숙취를 해소하긴 했다만, 몸뚱이는 여전히 휴식을 바라고 있다. 카델은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부하들의 뒷모습을 좇으며 영혼 없는 대답을 이어 갔다.

그런 카델을 힐끔거리던 엑토가 낮게 목을 울리며 턱을 쓸었다. 그에게 있어 카델은 제법 마음에 드는 제국의 정예 기사단장이자, 사랑스러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 이번 기회에 친목을 다지고자 끌고 온 것인데, 의외로 반응이 좋지 않다. 다른 기사들은 함께 몸을 움직이면 즐거워했건만. 역시 마법사란 족속은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평화로운 산책이 별로라면 내기를 해 보는 건 어떻소.”

“……내기요?”

“경의 기사단과 내 기사단.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마물을 해치우나 겨루어 보는 거요.”

“흠……. 재밌을 것 같네요. 내기라면 뭔가를 걸어야 할 텐데. 생각해 두신 조건이 있나요?”

“이 근방의 마물을 모조리 처치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릴 거요. 패배한 쪽이 3일 동안 마물을 정리하고, 승리한 쪽은 3일 동안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는 거지. 꽤 괜찮은 조건 아니오?”

흡족하게 웃으며 카델을 돌아본 엑토의 표정이 움찔 떨렸다. 세세하게 따지거나 마지못해 수락할 줄 알았던 카델의 눈빛은, 화로에 던져진 장작처럼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카델은 그런 엑토의 앞에서 여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수를 쓰든 더 많은 마물을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그렇소만…….”

“당장 부하들을 소집하죠. 내기 내용, 절대 바꾸시면 안 됩니다.”

*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알겠지?”

둥글게 모인 부하들 사이에서, 카델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비장하게 말했다.

“다른 놈들이 먼저 마물을 잡고 있으면 뒷덜미를 낚아채서라도 우리 걸로 만들어. 어떤 구질구질한 방법이라도 괜찮아.”

“그건 내기가 아니라 난투가 아닌―”

“난투라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우리가 3일간의 휴식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야!”

“3일이라고 해도 언제 마족이 습격을 재개할지 모르는—”

“난 마족 놈들이 습격하든 기습을 하든 그 직전까지 따뜻한 방에서 안락하게 쉬고 싶은 거라고!”

반박의 말들을 모조리 차단한 그가 있는 힘껏 눈을 부라렸다. 그래 봤자 부하들의 눈에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으나, 카델이 저렇게나 쉬고 싶다는데 내기 하나 이겨 오는 게 대수겠는가.

그렇게 대충 장단을 맞춰 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적린 기사단과는 달리, 호계 기사단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제국 기사단의 대표는 누구인가!”

“호계 기사단!”

“제국의 얼굴, 제국의 방패, 경계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호계 기사단!”

“그렇다! 자랑스러운 오스마 제국의 첫 번째 기사단! 그건 바로 호계 기사단이다!”

엑토는 병렬로 늘어선 대원들을 노려보듯 훑어내며 위협적으로 읊조렸다.

“최근 호계 기사단의 빛이 바랜 것을 느끼지 못한 자는 없겠지. 신생 기사단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나, 그 이목이 유지되는 데엔 반년이면 충분하다. 그 이후에도 그들이 독보적인 주목을 받는다는 건, 그들의 능력이 하늘을 찌를 듯 뛰어나거나 이전의 간판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뜻!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기고 싶은 자 있는가!”

“없습니다!”

“영광을 되찾고 싶은 자 있는가!”

“되찾고 싶습니다!”

“사소한 내기가 아니다! 제국 기사단의 긍지를 보여라!”

우레와 같은 함성이 숲속을 울렸다. 요란스러운 인간들의 행태에 놀란 새들이 나뭇잎을 털며 하늘을 날고. 위험을 감지한 짐승들도 허겁지겁 근처를 벗어났다.

“있던 마물도 다 도망가겠군.”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반이 짧게 혀를 찼다. 바로 옆에서 호계 기사단이 전의를 충전하고 있음에도, 적린 기사단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라이돈은 대놓고 하품을 하며 찔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엑토와 그의 대원들은 비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시작 시각을 정하시오, 카델 경.”

“저 앞의 노란 나뭇잎이 보이십니까?”

“보이오.”

“저 나뭇잎이 떨어질 때 시작하기로 하죠.”

“마법으로 떨어뜨리는 건 금지요.”

“물론입니다.”

카델이 가리킨 것은 정면에 자리한 나무. 가장 하단의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시든 나뭇잎 한 장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주기적으로 불어오며, 노란 나뭇잎이 좌우로 흔들리길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나뭇잎의 움직임에 기사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저것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자마자 달려 나가 마물을 처치해야 했다. 좀 전의 소란에 마물도 반응을 했을 테니,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리라.

그렇게 여러 가지 동선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던 때. 나뭇잎을 뜯어 먹을 듯 응시하고 있던 엑토의 눈썹이 움찔했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나뭇잎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카델.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으로 나뭇잎을 응시하고 있다. 뒤의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그들을 감시하듯 하나하나 뜯어보던 엑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런 치사한……!”

갑작스러운 단장의 분노에 뒤편에 서 있던 대원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엑토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원들에게 호통을 쳤다.

“정신 차려라! 요정의 환혹술이다! 승부는 이미 시작됐어!”

빠르게 몸의 기운을 모아 정신을 다잡자, 엑토가 담아내는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노란 나뭇잎은 이미 한참 전에 떨어진 듯 저 멀리서 굴러가고 있었고, 그의 옆자리에 있어야 할 카델과 단원들은 이미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그 요망한 요정이 대체 언제 환혹술을 전개했는지는 몰라도, 자신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멍하니 나뭇잎만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엑토는 아직 환혹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원을 일일이 두들겨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당장 달려라! 저런 치사한 기사들에게 패배하지 마!”

시작부터 편법을 사용하다니. 상당한 실력자인 데다 정직한 인상을 받아 온 터라 내기에도 투명하게 임할 줄 알았다. 제 불찰에 분노한 엑토가 잔뜩 성난 얼굴로 마물을 찾아 달려 나갔다.

*

그래도 나름 1년간의 수련을 통해 체력을 길렀다고 생각했건만. 몇 년을 구르며 단련해 온 육체파 기사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카델은 한참은 먼저 출발했음에도 금세 제 뒤를 쫓는 호계 기사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래서 근육 돼지들이란!”

“멈추십쇼, 카델 단장님! 정정당당하게 시작하셔야죠! 지금 제국 기사단의 얼굴에 먹칠하는 겁니까!”

“정정당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어디 전쟁터 한복판에서 똑같이 말해 보시죠!”

이미 머릿수로 저렇게나 차이가 나면서 정정당당은 무슨. 개개인의 실력은 이쪽이 압도적일지라도, 저쪽이 인당 한 마리의 마물만 잡아도 승리하기 어려워진다.

저 많은 대대원이 늘어져 자는 동안 불쌍한 정예 기사단끼리 정찰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카델은 뒤쫓아 오는 기사들을 일별하곤 몰래 암흑 마력을 개방했다. 소리 소문 없이 바닥을 훑어 내며 전진한 마력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던 기사들의 눈을 가렸다.

“무, 뭐야, 갑자기 눈앞이……!”

“흑마법이다!”

“흑마법사가 이런 식으로 방해를……!”

“젠장, 어디 있는 거야, 가면 마검사!”

어딘가에서 가르엘이 억울해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카델은 시력을 잃고 허둥대는 호계 기사단을 떨쳐 내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무조건 내기에서 승리해 달콤한 휴식을 얻으리라. 결의에 찬 눈이 호기롭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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