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7/100」
코앞으로 다가온 따뜻한 뺨을 쓸어내린 그가 잠시나마 두려움을 내려 둔 채 답했다.
“……응. 도망가지 않을게.”
지난밤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요젠과의 대화를 마친 뒤, 그가 먹을 음식을 가지러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몰래 빠져나오려는 것을 들켜 부하들과 엑토에게 붙들려 있다가,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온 요젠이 합류해 난데없는 술판이 벌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 중에 술판이 웬 말이냐 타박했지만, 엑토는 원래 전쟁 중일 때 마시는 술이 제일이라며 자제력을 내다 버렸다.
몇 번을 거절하다 가르엘의 능구렁이 같은 술수에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조금만 마시겠다며 시작했으나 결국 분위기를 타고 끝까지 달려 버렸다. 언제부터 필름이 끊겼더라. 어렴풋이 기겁하는 부하들의 얼굴을 본 것도 같은데.
오랜만에 진탕 취한 탓인지, 잠을 청할 때마다 떠오르던 시스템 창을 봤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대신 몽롱한 정신을 따라 불현듯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도 뜬금없어 떠올린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히오나에서 스테이지 난이도 추가를 위한 밸런스 패치를 준비 중이라고 했지. 헬 모드였나, 그것 때문에 안 쓰던 카드까지 끌어모아서 육성했었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패치가 끝나 있으려나.’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서까지 게임 생각이라니. 한심함을 느낄 새도 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카델은 묵직한 몸을 옆으로 돌리며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골이 댕댕 울린다. 이대로 숙취가 가실 때까지 누워만 있고 싶었으나,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 게으름을 떨 순 없었다.
그렇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뭐야.”
코앞으로 다가온 루멘의 얼굴. 가지런한 속눈썹과 정갈한 눈썹, 날카롭게 뻗은 콧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델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몸에 닿는 푹신한 촉감을 보니 이곳은 침대 위가 분명하다. 다들 술을 엄청나게 마셨으니, 숙소가 헷갈려 아무 곳에나 들어가 잠을 청한 걸 수도 있다. 우연히 동선이 겹친 루멘과 사이좋게 숙면을 취했을지도.
하지만 왜 굳이 루멘은 제게 팔베개를 해 주고 있는 걸까? 왜 한쪽 손을 남의 허리춤에 올리고 자는 거지? 이 쓸데없이 가까운 거리감은 무엇일까?
너무도 다정한 자세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루멘의 따뜻한 숨결 때문인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일단…….’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목 끝까지 덮인 이불을 들쳐 보았다.
‘좋아. 옷은 제대로 입고 있어.’
온몸이 욱신거리긴 하지만, 이건 숙취로 인한 것임이 분명했다. 루멘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상태이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고, 당연했다. 자신의 부하들은 단장이 술에 취했다고 벗겨 먹으려 드는 파렴치한이 아니니까.
느껴지는 안도감에 카델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를 루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자마자 뭘 걱정하는 거야, 대장?”
“아악!”
“……귀 아파.”
루멘은 화들짝 놀라 퍼덕이는 카델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무력하게 끌려간 몸뚱이가 바짝 밀착되며, 두 남자의 다리가 뒤엉켰다. 카델은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 고개를 뒤로 젖혔으나, 루멘이 목을 받쳐 주던 팔을 안쪽으로 굽히자 그마저도 소용없어졌다.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진 거야. 누가 희롱이라도 했어?”
“조, 좀 떨어져 봐.”
“왜? 따뜻하고 좋잖아.”
“부담스러워!”
“부담스럽다니. 언제는 따뜻하게 꼭 붙어서 자자며.”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어째서 끊긴 기억의 잔재는 이리도 습격처럼 날아드는 걸까. 루멘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카델의 머릿속으로, 잊고 있던 지난밤의 편린이 떠올랐다.
“빨리 옆으로 와. 춥단 말이야.”
“추우면 그냥 이불을 덮으면…….”
“그것보다 네가 안아 주는 게 더 따뜻해. 응? 빨리, 루멘. 나 너무 졸리다.”
“……알았어. 대신 만지작거리는 건 그만둬. 몸 성히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면.”
‘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야, 이 미친놈아…….’
분명 과거엔 이처럼 징그러운 주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식은땀이 났다. 카델은 지난밤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려 했으나, 루멘은 이미 지진 난 것처럼 떨리는 카델의 눈을 보고 그의 심리를 파악한 뒤였다.
“어찌나 남의 몸을 만져 대던지……. 그렇게 촉감이 좋았어? 대장 덕에 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아주 고역이었거든.”
“내, 내가 뭘 얼마나 만졌다고……. 그냥 잠결에 스친 거겠지.”
“음, 대장은 잠결에 남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나? 진짜라면 조심 좀 해야겠는데.”
“뭐? 야, 내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그런 짓은……!”
역정을 내던 카델이 문득 말을 멈췄다. 이놈의 기억은 어째서 불리할 때만 불쑥불쑥 떠오르는지.
“너같이 잘생긴 애들은 세상의 균형을 위해 좀 작아도 되는 거 알지?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여기까지 크면 너무 양심이 없잖아.”
“대, 대장. 잠깐만.”
“왜? 확인해 보자! 어차피 같은 남자끼린데.”
“대장이 그런 소릴 해도……!”
그렇다. 술에 취한 상대를 어떻게든 벗겨 먹으려 드는 파렴치한은 바로 자신이었다. 더 이상 자신의 구차한 과거를 회피할 수 없어진 카델이 몸을 옹송그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그래, 마음껏 미안해해. 내가 자진해서 대장을 나르긴 했지만, 그런 고문을 당할 줄 알았으면 다른 녀석들한테 넘겼을 거야.”
물론 현재의 루멘은 아침부터 부끄러워하는 카델을 품에 안고 부리는 여유가 상당히 만족스러웠으나, 지난밤은 아니었다.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음담패설을 조잘대며 거침없이 몸을 더듬는 대장이라니. 만약 그가 보수적인 가문에서 정석적인 교육을 받은 귀족이 아니었다면, 이성을 내다 버리고 일단 쾌락에 몸을 맡겼을 테다.
루멘은 미모사처럼 오그라든 카델을 살살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지만, 일이 많아서 그건 안 될 것 같네. 새벽에 엑토 경이 찾아왔었어.”
“……엑토 경이? 설마 내가 엑토 경한테까지 이상한 소릴 한 건 아니지?”
“다행히 그땐 대장이 한창 자고 있을 때였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엑토의 앞에서 루멘과 똑같은 추태를 보였다면, 단장직을 내려놓고 일평생을 은둔하며 살았을지도 몰랐다.
“엑토 경은 왜 찾아왔던 건데?”
“오늘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모양이야. 전시 중이니 전처럼 대면 회담은 아니고, 통신기를 사용한다나 봐.”
“마법진 조각을 거의 해결한 모양이네.”
“급한 불을 껐으니 다음 대책을 논의해야겠지. 어쨌든, 회담이 끝나는 대로 황제가 기사단장들을 소집한다고 해.”
숙취가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카델은 무의식적으로 루멘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루멘은 그런 카델의 목덜미를 마사지하듯 주물러 주었다.
‘대마법진의 발동을 저지했으니 남은 건 마계를 다시 봉인하는 건가. 어떤 식으로 봉인하는지는 몰라도, 분명 성가시겠지.’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에 벌써 몸서리가 쳐진다. 카델은 실눈을 뜬 채 메인 퀘스트의 진행도를 일별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01%」
「인간계 침략 진행도 : 06%」
마계 소환 진행도는 고작 1%. 두어 개의 마법진 조각만 해제한다면, 곧장 정상회담이 열릴 테다.
문제는 인간계 침략 진행도였다. 저것은 인간계 잔류 마족의 숫자를 표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시스템은 저 두 가지 진행도를 전부 ‘0’으로 만들랬으니. 잔류 마족을 모조리 소탕해야 다음 퀘스트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방방곡곡에 퍼져 있을 마족을 우리가 전부 찾아내는 건 힘들겠지. 기다리면 다른 국가에서 알아서 정리하겠지만, 오래 걸린다면 스토리에 지장이 생길지도 몰라. 곤란한데.’
어디 마땅한 해결책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 그와 루멘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카델 경! 나와 보시오!”
저 걸걸한 목소리와 말투는 엑토가 분명하다. 고개를 들어 루멘과 눈을 맞춘 카델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보다 루멘이 빨랐다. 먼저 침대에서 내려온 그가 카델을 대신해 방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인물과는 다른 사내의 등장에 잠시 멈춰 있던 엑토는,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루멘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 원 참, 이 기사단은 얼굴을 보고 뽑나 보군. 술에 취해도, 잠에서 막 깨도 그런 얼굴이라니. 내가 경이었다면 부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텐데 말이야.”
“또 무슨 일이십니까, 엑토 경. 급한 일이라면 대장을 부르겠습니다.”
“암, 급한 일이고말고.”
어쩐지 상기된 얼굴로 방 안을 힐끔거리는 엑토의 앞에서 버티고 있으려니, 카델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루멘을 가볍게 밀어 낸 카델이 모습을 드러내자, 엑토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간밤엔 아주 재미있었소, 카델 경. 그 작은 몸에 그만한 술이 다 들어간다는 데에 경탄했지 뭐요.”
“경에 비하면 뭔들 작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급한 일이라니, 어디 사고라도 일어난 겁니까?”
“아니, 사고는 없소. 간만에 무탈한 밤을 보냈지.”
“그러면 왜…….”
의아한 표정의 카델 앞에서, 엑토는 내내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가방을 자신만만하게 내보였다. 그 안에는 무수한 마력석과 고급 물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루멘과 카델이 가방에 대한 뭔가의 감상을 내놓기 전, 먼저 선수를 쳤다.
“폐하께서 정상회담이 끝나기 전까지 잔류 마족을 소탕할 기사들을 뽑으신다기에, 경의 기사단과 내가 지원했소. 몸풀기에 적격이지. 이 정도 마력석이면 관문을 타고 외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거요.”
“예……? 저희 기사단은 그런 귀찮은 일에 지원할 생각이 없는데요.”
“크하하! 회담 기간 동안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보단 돌아다니며 근육을 쓰는 게 낫지 않소. 기사들은 주기적으로 몸을 굴려 줘야 단단해지는 법이지. 그럼 그렇게 알고, 이 마력석은 경이 보관하도록 하시오.”
엑토는 묵직한 가방을 카델에게 던져 주고는, 반발의 말 따윈 깡그리 무시한 채 돌아갔다. 카델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과 가방의 무게에 연달아 충격을 받은 채 굳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