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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소환 진행도 : 09%」
「인간계 침략 진행도 : 11%」
제국 방어와 아쉬브카 토벌을 성공리에 마친 덕일까. 마계 소환과 침략 진행도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국 근방의 마법진 조각도 파괴를 완료했고, 나머지 병사들의 노력 덕에 제국에 남아 있던 마족 역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카델이 제국에서 퀘스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외국의 기사들을 응원하는 것뿐이다.
전투를 마무리한 뒤 대기하던 기사들은, 엑토의 안내를 따라 근처 마을에 있는 한 음식점을 찾았다. 호계 기사단의 대부분은 정찰을 떠났으므로, 식당 안의 인원은 적린 기사단과 엑토, 드레프, 그리고 열 명 남짓의 대대원들이었다.
“많이 드시오, 카델 경! 이 집 주인장에게 카델 경의 음식은 특별히 신경 써 달라 부탁했소. 내가 이 집 주인과 친하거든.”
“하하, 고맙습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산처럼 쌓인 리소토는 군침보다는 한숨부터 나올 만큼 압도적인 비주얼을 뽐냈으나, 카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엑토의 배려를 받았다.
카델은 리소토를 한 입 크게 퍼먹으며 단원들의 상태를 훑었다. 반과 루멘은 서로 간 ‘밥맛 떨어지게도 먹는다’며 투덕거렸고, 음식에 설탕 대신 소금을 들이부은 라이돈은 한 입을 맛보더니 자연스럽게 옆 사람과 그릇을 바꿔치기했다. 새로운 가면을 마련한 가르엘은 술기운이 퍼진 타 기사단 사이에서 넉살 좋게 어울리는 중이었다.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들여다보던 카델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요젠은 어디 있지?’
식당에서 은신이라도 한 걸까.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요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서 피한 건가.’
왁자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남자이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몇 차례 리소토를 야무지게 씹어 넘기던 카델은, 엑토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일어나려는 단원들을 앉힌 그가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요젠? 근처에 있어?”
식당의 뒤편, 근처 골목까지 돌아보며 요젠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갑자기 모습을 숨긴 적은 많아도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찜찜함을 느끼며 식당 근처를 벗어나자, 어느 민가 앞에서 쭈그리고 앉은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카델이 다가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젠은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의 등 너머에 자리한 것을 발견한 카델의 눈이 벌어졌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엷은 회색 털에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는, 경계의 눈빛을 띠고 있었다.
요젠은 그런 고양이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어디서 구한지 모를 사료 그릇이었다.
‘먹이를 주려는 건가.’
그렇다면 이 이상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카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요젠은 고양이의 위치를 가늠하듯 조금씩 손을 움직여 그릇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등을 웅크린 채 경계하면서도 사료 냄새를 의식했는지 떠나지 않았다.
알맞은 자리에 그릇을 놔두고 떠나면 잘 먹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던 때, 거리를 잘못 가늠한 요젠이 그릇을 고양이의 눈앞까지 내밀어 버렸다. 그에 놀란 고양이가 날 선 소리를 내며 그릇을 앞발로 후려쳤고, 엎어진 그릇에서 사료가 쏟아졌다.
예민한 길고양이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요젠도 상황을 파악한 듯 은은한 미소가 머물러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잠시 멈춰 있던 요젠이 바닥을 짚어 그릇을 찾아내고는, 아쉽다는 듯 표면을 문질렀다. 카델은 그제야 요젠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 쏟아졌네.”
“……응.”
이미 카델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것인지, 갑자기 말을 걸었음에도 요젠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카델은 그새 붕대를 구해 눈을 가린 하얀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물 좋아해?”
“그다지.”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길고양이 사료까지 챙겨 왔어?”
“동물은 작고 연약하니까.”
좋아하진 않아도 작고 약한 생명체이니 챙겨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짧디짧은 대답을 통해 그의 속내를 유추해 본 카델이 작게 미소 지었다.
“착하네.”
“…….”
“그래도 네 식사부터 챙기는 게 어때? 격하게 싸워서 힘들 텐데.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면 내가 따로 가져올게.”
그리 말한 카델이 식당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침묵을 지키던 요젠이 손목을 낚아챘다.
“왜 그래……?”
의아한 시선이 요젠의 옆태를 훑었다. 그의 표정에선 평소 같은 미소도, 나른한 분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곤란한 듯,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 당황하며 요젠을 응시하고 있자니, 곧 더욱 당황스러운 발언이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마.”
“……뭐?”
“일일이 챙겨 주지 말란 소리야.”
황당했다. 1년 넘게 요젠과 함께하며 조금씩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던 벽이, 난데없이 솟구쳐 단숨에 눈앞을 가로막는 기분.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이 빠진 카델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요젠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네가 그럴 때마다 무서워.”
“무섭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집착한 걸까? 요젠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이제껏 모든 일을 혼자만의 방식으로 해결해 왔을 테니, 갑자기 인생에 끼어들어 이것저것 챙겨 주려 드는 자신의 행동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천성이 착해 불편함을 제때 토로하지 못하고 쌓아 둔 걸지도 모른다. 그게 하필 오늘, 이 순간에 터져 버린 걸지도.
그간 해 왔던 배려들은 요젠의 입장에선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적어도 아끼는 부하에게서 ‘네가 무섭다’라는 소리를 들은 카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너무 귀찮게 했어? 그런 거라면 미안해. 가까워지고 싶어서 선을 넘었나 봐. 난 괜찮으니까, 정말 싫으면 싫다고…….”
“싫어.”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거절의 말에 카델의 표정이 굳었다. 애써 괜찮은 척 입꼬리를 올렸으나, 금세 내려갔다. 카델은 수그린 요젠의 머리와 그가 쥔 손목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손목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점 강해졌으나, 카델은 눈치채지 못했다. 손목을 조이는 힘보다 요젠이 뱉은 말 한마디가 더욱 거슬린 탓이었다.
“……싫어?”
“그래, 싫어. 네 배려가 싫어. 네가 주는 것만 싫어.”
요젠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질수록 심장이 쿵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배려만 싫다고?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만큼 싫어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이게 진심이라면 지금껏 그가 보여 줬던 다정함은 다 뭐였단 말인가. 그저 예의상의 가식이었나? 지금까지 혼자서만 점점 좁혀지는 거리감에 기뻐하고 있었던 걸까.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챙겨 주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게 조금 전의 일이다. 그의 따뜻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자만했던 게 조금 전의 자신이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카델이 짧게 숨을 고르고는, 요젠을 따라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제 손목을 쥔 그의 손등을 감쌌다.
“이유를 말해 줘, 요젠.”
“…….”
“내 배려만 싫은 거라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잖아. 완전무결한 단장은 못 되더라도 싫은 단장은 되고 싶지 않거든.”
비록 자신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지만, 요젠은 오랜 시간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이제야 터져 버린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그를 몰아세우거나 토라진 티를 낼 순 없었다. 뭐가 됐든 자신의 일 순위는 언제나 부하들이었으니까.
다독이듯 그의 손등을 문지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힘들게 좁힌 거리가 한순간에 멀어질까, 잡았다 생각했던 그가 어디 먼 곳으로 달아날까. 조급해 미칠 것 같으면서도 아닌 척 여유를 부렸다. 그런 카델의 앞에서, 요젠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조심스레 달싹였다.
“……익숙해질까 봐.”
“어떤 게?”
“네 배려가 익숙해지는 게 싫어.”
이 말은 또 어떤 의미일까. 너무 부담스럽다거나, 원치 않는 배려라거나, 거슬린다 따위의 이유를 생각했던 카델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반면 요젠은 뒤늦게 말문이 트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줄줄이 토로했다.
“사람이 좋아. 그들의 친절이 좋지만, 그 친절이 날 향하는 건 기대하지 않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선이 있다는 걸 확인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어.”
“…….”
“내 삶을 망가뜨리지 말란 말이야. 원하지 않아. 네 한 마디에 안심하고, 풀어지고, 뭐든 해 주고 싶어지는 게……. 네가 날 기울게 만들고 있어. 옆에 네가 없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약하게 만들고 있잖아.”
미간이 구겨지고, 입매가 비틀렸다. 요젠은 진심으로 이 모든 것들이 싫다는 듯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러면서도 카델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싸움이 끝나면 우린 헤어지게 되겠지. 영원히 함께하지도 않을 거면서 날 망가뜨리지 마. 살던 대로 살도록 놔둬. 그렇게 챙겨 주지 않아도 전쟁엔 협조할 테니까.”
서늘한 격정마저 느껴지는 발언에, 여유를 가장하던 카델의 표정에도 금이 갔다. 그의 손등을 쓸던 손길을 멈춘 카델이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내가 너와 쌓았던 모든 추억이 쓰레기가 돼?”
“…….”
“끝까지 함께하지 않을 거니까 신경도 쓰지 말라고? 어떻게 그래? 오히려 반대 아니야? 끝까지 함께할 수 없으면, 함께하는 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게 당연한 거잖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끌어다 주고 싶은 게…… 그게 잘못이야? 그게 네 삶을 망가뜨린다고?”
“어차피 우린 언제든 갈라질 수 있는 사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항상 이별을 준비해야 해. 그런데 왜 잘해 주냔 말이야. 왜 네가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끝까지 내 곁을 지킨 사람은 없었어. 너라고 다를 건 없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네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지 마.”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울컥 차오른 감정이 목 끝까지 머리를 내밀었다. 카델은 그 감정을 다스리듯 거친 숨을 고르다, 요젠의 손등을 끌어 이마를 댔다.
“네가 특별한 거야, 요젠. 네가, 너희가 나한테 너무 특별한 사람이라…… 사랑해 줄 수밖에 없는 거라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도 자격이 없으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기도하듯 질끈 눈을 감았다. 요젠이 말한 훗날의 이별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안다. 그를 스쳐 가며 상처 주었던 과거의 인연들이 또다시 이어질까 두려워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카델 또한 다가올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라도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카델 라이토스와 함께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진 세계에 너희를 두고 떠나간대도. 단 한 줌의 후회도 없도록 마음 다하는 데까지 사랑만을 주고 싶었다.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었으나, 자신은 그들이 상실감을 느낄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자신이 주었던 사랑을 기억하며 버텨 주길 바랐다.
“네가 싫다고 해도 못 멈춰. ……미안.”
떨리는 사과에 요젠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는 카델의 열기가 느껴지는 손등을 비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그의 표정을 더듬었다.
자격이 없는 건 카델이 아니었다. 자신이다.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스쳐 간 모든 사랑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고, 사랑의 잔향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많은 것을 바란 적은 없다. 바라는 순간 더없이 큰 불행을 떠안고 살게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카델을 만난 뒤부터 온기에 이끌렸으나, 동시에 거부감이 들었다. 조금씩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감정 변화에 동요하고, 그의 관심을 바라기 시작했을 때부터. 격하게 요동치던 마음이 카델의 한 마디에 놀라울 만큼 잠잠하게 가라앉았을 때부터.
그는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힘을 가진 무서운 인간.
카델이 이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그를 밀어 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쓰레기처럼 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다.
“나를 좋아해, 카델?”
“좋아해.”
“어떻게? 어떻게 날 좋아해? 난 매일 피 냄새를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생긴 것도 우울하고, 말도 재미있게 못해. 질척거리는 암기나 사용하는, 기분 나쁜 놈인데.”
또한 확신받고 싶었다. 카델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대도,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받아 내고 싶었다.
그가 주는 사랑은 격렬하게 두려우면서도 애틋하게 욕심이 나서, 그를 밀어 내는 동시에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싶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싫었다.
“네가 가진 따뜻함이 좋아.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 주는 세심함이 좋아.”
카델은 떨리는 손끝으로 제 얼굴을 더듬는 요젠의 손을 쥐고, 그의 손마디에 입술을 문질렀다. 따뜻한 한숨이 차게 식은 살갗을 데워 주었다.
“편안한 목소리도 좋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낯가리는 게 귀여워. 뚜렷한 신념도 멋있고, 암살자면서 평소엔 순하게 구는 것도 재밌어. 가끔 이렇게 스스로 네 가치를 폄하하는 건 화나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말해 주고 싶게 해.”
“…….”
“너라서 좋아, 요젠. 네가 너라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자신이 움켜쥘 수 있는 온기는 오로지 죄인의 더러운 피뿐이라고. 무수한 밤, 무수한 시체의 위에서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도 기어이 다가와 손을 뻗는 너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내 사랑이 무섭다면 더 큰 사랑을 줄게. 익숙해져서 더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해 줄게. 그러니까…… 괜찮아. 도망가지 마.”
사랑받기를 포기했으나, 사랑받기를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계속 꿈꾸게 하는 존재는 선일까, 악일까.
막연한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들자, 감긴 눈꺼풀 위로 부드러운 촉감이 닿아 왔다. 그것은 사랑의 증명을 위한 카델의 조심스러운 진심. 정답이 무엇이 되었든, 지금은 그의 말에 담긴 무게를 기억하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