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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소환진을 사용하려는 로렌스를 방해하긴 했으나, 전심전력으로 막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로렌스를 처치하는 것보단 그의 후퇴를 눈감아 주고 전력을 회복하는 쪽이 낫다는 엑토의 판단 때문이었다.
카델 역시 부하들에게 로렌스의 추적을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가르엘이 로렌스에게 돌진할 것을 우려해 그의 옆을 지켰다.
“용케 안 쫓아갔네. 그렇게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다행히 가르엘이 로렌스를 뒤쫓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로렌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시야에서 로렌스가 사라지자, 가르엘이 탄식 같은 숨을 뱉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직 제겐 요젠 경처럼 단숨에 녀석을 죽일 만한 힘이 없으니까요. 아쉽지만 지금은 보류입니다.”
“잘 생각했어. ……그러고 보니, 요젠은 어디 갔지?”
아쉬브카의 죽음 이후, 곧바로 로렌스의 도주가 이어졌기에 요젠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뒤늦게 그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요젠! 어딨는 거야?”
일부러 소리 높여 불러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들어차는 불안감에 카델의 표정이 굳어 갈 무렵.
“자기! 내가 주워 왔어!”
어디선가 날아온 라이돈이 카델을 불렀다. 로렌스가 도주할 때 당장 쫓아가 괴롭힐 것 같던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커다래진 눈과 상기된 표정을 한 라이돈의 양손에는, 팔로 눈을 가린 채 축 늘어진 요젠이 들려 있었다.
라이돈은 요젠을 지면에 던지듯 내려 두고는, 카델의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서 요젠의 상태를 살폈다.
“대체 어디 있었길래 라이돈이 주워 온 거야? 눈은 또 왜 가리고 있고.”
“보지 마.”
“왜 그래. 상처라도 났어?”
눈을 가린 팔을 잡아당겨도 요지부동이었다. 이토록 보이기를 꺼릴 정도로 큰 문제가 생긴 거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젠이 계속해서 숨으려 드는 동안, 떨어져 있던 반과 루멘까지 무리에 합류했다. 어느새 동료들의 틈에 포위된 요젠은, 카델이 부하들에게 눈을 가리고 있는 팔을 떼어 내라고 명령할 때 즈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기술을 써서 아직 여파가 남았어. 징그러우니까…….”
“그건 내가 판단해. 다치거나 불편한 게 아니라면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서 네 눈이 여섯 개가 된대도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좀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나?”
“직접 보는 건 달라.”
“그럼 한번 보여 주든가. 왜 내 반응을 미리 겁내는 거야, 요젠.”
그가 숨기려 하는 것을 억지로 들춰낼 생각은 없다만, 쓸데없는 걱정으로 자존감이 하락하는 것을 두고 볼 마음도 없었다.
“나만 볼게. 자.”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며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요젠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터져 나간 실핏줄처럼 눈가를 뒤덮은 암기. 그리고 눈동자 대신 자리한 새까만 심연의 덩어리였다.
눈가에서 박동하는 암기와 둥글게 뭉친 어둠은 확실히 스산한 기운을 띠기는 했다. 하지만 카델은 그의 기묘한 눈보단 눈치를 보듯 내려간 눈썹과 힘을 준 입매, 어찌할 줄 모르며 달싹이는 입술이 더욱 신경 쓰였다.
“하나도 안 징그러워. 예뻐.”
“……예쁠 리가 없잖아.”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그럼 심장 소리든 숨소리든 마음대로 들어 봐.”
단정한 눈썹뼈를 어루만지자 그제야 요젠의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그는 카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암기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묵묵히 기다려 주는 카델 덕에 요젠은 빠른 속도 안정을 되찾았으나,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부하들은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여우가 따로 없군. 그런 식으로 단장 옆에 붙어 있겠다고? 조금 있으면 심장 소리 듣겠다고 가슴에 얼굴이라도 처박고 있겠어.”
“제법이네요, 요젠 경. 단장님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설마 다들 요젠을 질투하는 건가? 여유가 없으니 별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가시를 세우는 거지. 대장과의 관계에 확신이 없나 보군.”
“아하하! 루멘, 울어?”
카델이 요젠을 위해 다른 부하들을 멀리 밀어 두었으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심한 질투를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질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요젠이 암기의 갈무리를 끝마칠 즈음, 마찬가지로 부하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엑토가 카델을 찾은 것이다.
“실로 정예 기사다운 실력이더군.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으나, 오늘처럼 개인의 실력에 감탄했던 적은 없었소.”
엑토는 아쉬브카를 해치운 요젠의 실력에 상당히 감복한 듯 연신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작 당사자인 요젠은 엑토가 접근하는 것을 보자마자 모습을 숨겼지만.
“호계 기사단의 도움 덕에 성공할 수 있었죠. 아쉬브카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면 제 부하도 꽤 애를 먹었을 겁니다.”
그다지 차리고 싶지 않은 겸손을 차리며 엑토와의 대화를 이어 가던 무렵. 호쾌한 웃음을 내뱉던 엑토가 돌연 시선을 회피하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레 굳은 얼굴에 이유를 묻기도 전,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적린 기사단이 활약했다지? 이번엔 진짜 끝까지 버텨 보려고 했는데, 젠장……. 그런 공격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드레프였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미라 같은 꼴을 하고, 자신이 아쉬브카에게 당해 쓰러졌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끝까지 버티다 죽는 것보단 적당히 빼고 살아남는 게 낫지. 정말 죽을 뻔했어, 너.”
“누구 덕분에 살았으니까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 인사는?”
“……고맙다.”
입술을 삐죽이며 소심하게 인사한 드레프가 슬쩍 눈을 굴렸다. 그가 보는 이는 어느새 근엄한 표정을 지어낸 채 우직하게 서 있는 엑토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방심했습니다.”
“수많은 대대원을 이끄는 자가 방심? 그런 변명을 할 시간에 부족했던 전투나 돌아보거라.”
“……네.”
“두 번 다시 앞뒤 생각 없이 들이받는 그런 무모한 실수는 하지 않기를 바라지.”
카델을 대할 때와는 딴판인 냉랭한 태도였다.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싸운 부하에게 칭찬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원래 부하를 대할 땐 저렇게 냉혹한 사람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엑토에게 한바탕 훈수를 듣고 기가 꺾인 드레프가 대원들에게 돌아갔다. 축 처진 채 멀어지는 드레프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카델이 나름대로 그를 위한 칭찬을 꺼내 보려 했으나.
“……나도 인사가 늦었군. 정말 고맙소!”
고개를 돌리자마자 허리까지 푹 수그리며 뜬금없는 감사를 전하는 거구의 모습이 보였다.
“예? 가, 갑자기 무슨……. 보는 눈도 많은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엑토 경.”
당황한 카델이 함께 허리를 숙이며 엑토를 일으키려 했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이 적린 기사단의 단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따위의 소문이 나도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간신히 엑토의 얼굴을 들게 하자, 좀전의 냉랭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안도와 고마움이 뒤섞인 순박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카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어 격렬하게 흔들었다.
“내 귀여운 아들놈이 죽을까 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었소. 경이 아니었다면 전투고 뭐고 전부 밀어 버리고 드레프를 구하러 갔겠지.”
“예……? 아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제국의 기사가 아닌,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약속하오.”
설마 지금, 저 까탈스럽고 건방진 드레프를 아들이라고 부른 걸까.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닮은 곳이 하나도 없건만. 뜻밖의 혈연을 알게 돼 넋을 잃은 카델의 몸이 엑토의 격렬한 인사를 따라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짜악!
살갗을 매섭게 후려치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방 안을 울렸다.
짜악! 짜악!
연달아 이어지는 타격음의 끝에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격양된 숨소리가 매달렸다. 에밀리아. 그녀는 빨갛게 부은 손바닥을 가볍게 털어 내며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사내를 응시했다.
“온통 잃기만 했군요, 로렌스 경. 아군도, 품위도, 무엇하나 지켜 낸 게 없죠. 이게 하이웨일가의 저력입니까?”
“……죄송합니다, 폐하. 어떤 변명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전부 저의 실책입니다.”
“만약 이곳에 제가 아닌 아버지가 서 계셨다면, 경은 사과를 꺼내기도 전에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을 거예요.”
에밀리아는 살기로 번뜩이던 눈매에 힘을 풀며 작게 심호흡했다. 재생 능력을 해제한 로렌스의 양 뺨은 빨갛다 못해 파랗게 부어 있었으나, 그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제가 그러지 않는 것은, 아버지보다 유하거나 너그러워서가 아닙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전까진 경의 존재가 쓰임이 있을지 모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판단 때문이죠.”
“기필코 증명해 내겠나이다.”
로렌스를 담아낸 눈동자는 피곤과 스트레스로 충혈되어 있었다. 에밀리아는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로렌스 경.”
손 틈새로 비치는 눈빛은 광기 섞인 분노로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요 며칠 새 이어진 패착은 그녀의 정신을 착실하게 좀먹어 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인간들의 목을 생으로 쥐어짜 그 피를 들이켜고 싶다는 히스테리적인 충동마저 차올랐다.
“이전 전술의 실패로 인간계에 심어 둔 마법진은 차례차례 해제되었고, 제국에 몰렸던 마족은 패배에 익사해 죽었어요.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하나도 없죠.”
“…….”
“물론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간파당한 것처럼 일일이 방해받을 줄은 몰랐어요.”
“상심하지 마십시―”
“위로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로렌스 경.”
날카롭게 대꾸한 그녀가 정갈하게 다듬어진 표정을 드러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이 기세라면 인간들은 마법진을 모조리 파괴한 뒤, 또다시 마계를 봉인하려 들 테죠. 평화의 돌. 경은 그 저주스러운 신들의 물건을 기억하겠죠?”
“물론입니다.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족은 없을 겁니다.”
“인간들은 다시 그 돌을 찾아내려 할 거예요. 신의 가호를 등에 업고 날뛰었던 그 증오스러운 여섯 인간과 요정 하나. 그들이 남긴 돌을 찾아 봉인식을 진행하려 하겠죠.”
에밀리아는 작게 숨을 골랐다. 오래도록 준비한 전쟁임에도 이리 일찍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아직도 승기는 인간들의 손에 있었고, 마계의 해방을 위해서는 최악의 최악까지 대비해 판을 뒤엎을 준비를 해야 했으니.
“인간계에 남은 돌의 위치를 알아내야 해요. 그들보다 먼저. 탐색을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놈들에게서 돌을 빼앗으면 봉인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마계가 열려 있다면 언제든 기회가…….”
“빼앗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돌을 찾는 걸 방해는 걸로 충분해요.”
그녀의 단호한 시선을 마주한 로렌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인간계의 돌만으론 봉인이 불가능하죠. 직접 내려와야 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일평생을 이 어두운 터전을 지켜 내며 살아온 종족입니다.”
‘평화의 돌’을 손에 넣은 과거의 인간들은 봉인을 위해 마계로 침투해야 했다. 하지만 그 유능하던 일곱 기사조차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다. 현재 마계에 남은 ‘평화의 돌’은 일곱 기사의 유품이자 마족이 가진 살인의 증거.
만약 돌을 얻기 위해 마계로 내려온 인간들을 소탕하고, 그들에게서 돌을 빼앗을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봉인되는 것은 인간계일 것이다.
마계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에밀리아의 지휘 아래, 목숨을 걸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 로렌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알아 두셔야 할 인간들이 있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