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7화 (337/521)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부성애에 감복했다는 순진한 감상 따위가 아니었다.

만약 아버지의 애원이 통해 자신이 마계로 내려가고, 하나뿐인 아버지와 함께 성장했다면. 그랬다면 감히 인간을 돕겠다는 꿈도, 신을 모시겠다는 결단도 내리지 않은 채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정체를 숨기지 않고, 가진 힘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전부 받아들이며 평범하게.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그렇게 주변과 어우러져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 아쉬웠다. 가슴속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른 아쉬움을 깨달은 찰나. 처음 마족의 힘을 발견했을 때보다도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들끓었다.

사람을 구하며 살겠다는 신념? 세계 평화를 위한 대의? 그딴 건 처음부터 없었다. 이 옹졸하고 별 볼 일 없는 잡종은 그저, 소속감을 얻어 편안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 왔던 모든 고뇌, 죄책감, 권태의 이유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두려웠다.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길 바란 카델이, 언제나 자신을 과대평가해 주던 카델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면. 자신이 품은 역겨운 감정을 알아차려 버린다면. 자신은 그가 보일 실망과 연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카델이 가르엘 몬자시의 본질에 가까워지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됐다.

“가르엘! 뭐 하는 거야!”

로렌스가 카델의 앞에서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가르엘은 오직 그 일념 하나로 꿋꿋이 준비하던 치유술을 중단했다. 빠르게 검을 빼든 그가 뾰족하게 응축된 빛의 마력을 검기처럼 쏘아 날리고. 로렌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공격에 응수했다.

“가르엘!”

카델은 갑작스레 돌변한 가르엘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까지 로렌스의 공격을 묵묵히 버티며 치유술을 전개하던 평정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가면 아래의 얼굴은 이성을 잃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자신이 알던 능글맞은 사내와 동일 인물이라곤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가르엘! 당장 네 정체가 밝혀진대도 타격은 없어!”

계속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독여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르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거침없이 마기를 방출했다. 날카롭게 일렁이는 마기가 반신을 휘감자 가르엘의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듯 실실거리는 로렌스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자신의 공격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조금도 계산하지 않았다. 당장 그의 입을 다물릴 수만 있다면 이대로 평생 검을 휘둘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들켜서는 안 될 잘못을 숨기는 아이처럼 필사적이기만 했다.

카델은 중간중간 가르엘을 향한 로렌스의 공격을 방어하며 침착하게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가르엘의 돌발 행동으로 틀어진 계획은, 곧 감당하지 못할 파장을 몰고 왔다.

“카델 단장! 서두르시오!”

전장을 울리는 엑토의 외침에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미치겠네……!”

자신과 엑토의 전술은 마족에게 기울어진 승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전. 그리고 이 계획은 가르엘의 광역 치유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니. 치유술의 전개가 늦춰질수록, 작전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을 호위해라!”

장막을 두른 채 소환진 해제를 진행하던 마법사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온전한 몸을 되찾은 아쉬브카가 대량의 흡기충을 배출해 소환진을 뒤덮은 것이다. 높은 동산처럼 쌓인 흡기충 아래, 마법사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기사들은 엑토의 명령을 따라 흡기충에게 검기를 날리거나 직접 검을 휘둘렀으나, 역부족이었다. 몸을 움직인 아쉬브카가 기사들을 뭉텅이째 짓뭉개기 시작한 것이다.

카델은 짙게 깔린 암흑 마력 너머로 다급히 제 부하들을 찾았다. 반과 루멘, 요젠은 각기 다른 곳에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벌레 떼를 베어 내고 있었고, 라이돈은 상공에서 냉기 회오리를 생성해 벌레 떼를 얼어 붙였다. 모두 다친 곳은 없어 보였으나, 무의미하게 이어지는 방어전에 지쳐 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아쉬브카를 죽이지 못하면 전멸은 시간문제야.’

패배를 막기 위해선 지친 아군이 마음껏 돌격할 수 있도록 치유술을 써 주어야 했다. 회복 지대 아래서 무한정 재생하는 아쉬브카처럼.

하지만 가르엘이 정신을 차릴 동안 다른 이들이 버텨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차라리 가르엘에게 로렌스의 견제를 맡기고,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아쉬브카의 구속과 공격을 전부 전담하는 것은 어떨까.

‘어떤 부분에서 가르엘이 자극당한 건지 모르겠어. 여기서 로렌스가 아군에게 정체를 밝힌다 한들, 교란을 위한 헛소리라고 둘러댄다면 전투에 방해가 될 일은 없을 텐데.’

애초에 자신들의 목숨줄을 쥔 치유사를 다른 곳도 아닌 전장 한복판에서 쉽게 매도해 버릴 용감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카델이 설득을 포기하고 전술 변경을 고려하던 때였다.

“드레프 대대장님!”

기사들의 절박한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그제야 카델이 아쉬브카의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흡혈충이 만들어 낸 회오리에 휩쓸려 공중으로 떠오른 드레프가 있었다.

“드레프!”

카델보다 먼저 드레프를 발견한 엑토가 사색이 되어 검풍을 날렸으나, 흡혈충은 날쌔게 회피하며 점점 더 높이 상승했다. 회오리에 갇힌 드레프는 의식을 잃은 것인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카델은 암흑 마력 바깥으로 급히 빠져나와 라이돈을 불렀다.

“드레프를 떨어뜨려, 라이돈!”

소음 속에서도 단박에 카델의 목소리를 감지한 라이돈이 드레프를 찾아 날아갔다.

“이번 싸움은 꼭 벌레 박멸하러 온 청소부가 된 기분이란 말이지…….”

드레프를 가둔 흡혈충을 발견한 그가 손을 뻗었다. 짧은 영창과 함께 손바닥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의 마법진이 생성되고. 완성된 마법진의 발광과 동시에, 내부에서부터 폭발적인 양의 눈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얼음 결정이 뒤섞인 날카로운 눈보라가 흡혈충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회전력을 약화시켰다. 그에 회오리가 조금씩 헐거워지며 드레프의 몸이 내려앉는다 싶더니, 곧 완벽하게 분해된 회오리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바람을 일으켜 드레프의 추락 속도를 늦춘 뒤, 장막을 생성해 그를 감쌌다. 카델이 드레프에게 달려가는 동안 불안하게 움찔거리던 엑토는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대, 대대장님의 상태가…….”

도착한 카델이 드레프의 상태를 확인하며 미간을 구겼다. 그는 신체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다.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무리해서 앞장선 결과였다. 곳곳이 까맣게 패인 처참한 모습을 응시하던 카델이 주먹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드레프 경을 후방으로 대피시키세요.”

일순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귀여운 동생이라 여기고 있던 드레프가 송장 꼴을 하고 쓰러져 있기 때문도, 계획했던 전술이 망가져 다수의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도 아니었다.

가르엘. 그가 끈질기게 이어 왔던 자기혐오를 내려두지 못한 채 여전히 스스로를 좀먹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쓰럽기 짝이 없는 사내가 간신히 움켜쥔 희망을 기어이 빼앗아 가려는 로렌스에 대한 분노였다.

무언가를 내리누르듯 꾹 힘주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더없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드러났다.

카델의 걸음에는 막힘이 없었다. 시야를 가리며 달려드는 벌레 떼는 카델의 손짓이 일으킨 열풍에 맥없이 밀려났고, 등 뒤에서는 공기탄처럼 폭발한 마력이 거슬리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펼쳐 두었던 암흑 마력의 양을 증폭시킨 그는 벌레 떼에 잠식된 전장 속, 유독 어둡게 가라앉은 장소 너머로 발을 디뎠다.

그곳에 가르엘이 있었다. 미처 재생하지 못한 상처가 붉은 독초처럼 피어난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들이받는다. 당장 로렌스를 죽이지 못해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가면을 어설프게 매달은 채. 로렌스의 텅 빈 속삭임에도 그는 땔감을 넣은 불길처럼 사납게 흔들렸다.

그 위태로운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카델이 로렌스에게로 [화련]을 날렸다. 타오르는 사슬은 로렌스의 전신을 빼곡하게 휘감아 바깥으로 내던지듯 밀어 내었다.

단숨에 [화련]을 끊어 내려던 로렌스가 주춤하며 인상을 구겼다. 사슬에는 처음 당했던 것의 몇 배는 될 법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빠르게 숨통을 조여 오는 사슬에 로렌스가 서둘러 기운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카델은 로렌스를 쫓아 달려가려는 가르엘을 붙들었다.

“놓으세요, 단장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음에도 가르엘은 금방이라도 뿌리칠 기세로 몸에 힘을 주었다. 카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나, 눈빛에선 흉흉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만해. 이제 내 명령은 들리지도 않는 거야?”

“여기서 저 녀석을 죽여야 합니다. 단장님은 이해 못해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놔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디에라도 속하고 싶어 절절매는 감정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 어떤 외톨이라도 같은 종족이 있다는 소속감 정도는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온전한 자신을 받아 줄 곳은 없다.

자신이 그 얄팍한 소속감을 위해서라면 마계에 뛰어드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애정 결핍의 사내란 것을 깨닫는다면. 설령 카델이라도 오만 정이 떨어질 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오른쪽 뺨으로 둔탁한 충격이 전해지며, 헐겁게 매달려 있던 가면이 떨어졌다. 그제야 가르엘의 행동이 멈췄다. 천천히 돌아간 시선 속, 전에 없이 차갑게 굳은 카델의 얼굴이 들어찼다.

“네가 들어야 할 말도, 네가 믿어야 할 신념도, 전부 나한테 있어.”

그는 뺨을 후려친 주먹에 바짝 힘을 주고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잿빛 눈동자 속에는 단 한 톨의 망설임도,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선을 마주한 가르엘의 눈동자로 조금씩 빛이 맺혔다.

“그리고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네가 지금처럼 단장 명령까지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쌈박질을 해 대든, 로렌스의 개소리에 설득당해 흔들리든.”

“…….”

“난 끝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혼자일 일은 없다고. 알아들어?”

일순 모든 근육이 경직되듯 얼어붙었다. 고장 난 것처럼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토록 짙었던 두려움과 분노가 멍하게 흐려지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곤란한 행동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런 순간에, 이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내게. 카델의 진심 어린 고백은 충격적일 만큼 곤란한 것이라서, 어정쩡한 반응조차 함부로 꺼내 보일 수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날 똑바로 봐! 저 자식한테 관심 줄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나한테 집중하란 말이야! 네가 믿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각인해.”

어리석었다. 그는 이렇게 굴어선 안 됐다. 카델은 동아줄을 잃고 추락하는 이에게 제 옷자락을 붙들라며 내어 주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힘겨운 일이 될 건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음침하고 집착적인 사랑을 받아 낼 각오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나를 봐, 가르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배신하지 않아. 네가 마족 혼혈이 아니라 마족이래도 계속 함께할 거야. 그러니까…….”

그는 마디가 부어오른 손등으로 상처도 남지 않은 자신의 뺨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붙잡고 싶을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것이 울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나를 위해 싸워. 내가 너의 의미가 되어 줄게.”

자신의 사랑으로 카델은 괴로워질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쏟아 내는 법밖에 알지 못했고, 카델은 어서 쏟아 내라며 상냥하게 다독였다. 이 순간 차오르는 감정은 괴로움에 가까운 환희.

“네가 뭘 의심하든, 어떤 일에 괴로워하든, 내가 있으면 넌 괜찮을 테니까.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싸워 줘.”

다물린 입 밖으로 끝끝내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코 저버리지 않을 내 삶의 의미. 당신이 그 의미가 되어 주겠노라 맹세한다면.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6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3/100」

“……미안합니다, 단장님. 제멋대로인 남자는 매력이 없는데. 그렇죠?”

“그 얼굴에 매력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고작 몇 마디 말로 가르엘의 오랜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카델은 짙은 증오가 사라진 가르엘의 맑은 눈빛이, 악의 없는 밝은 미소가 진짜 그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그가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몇 번이고 일으켜 일깨워 주는 것.

“가면이…….”

바닥에서 너덜거리는 가면을 주워 든 가르엘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스럽게 가면을 걸친 그가 가려진 시선을 카델에게 두었다.

“여기 네 얼굴 들여다볼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어. 불편하면 벗어 둬도 돼.”

“아뇨. 더 이상 단장님이 곤란해질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덕분에 제대로 정신 차렸거든요.”

돌아온 이성이 머리를 차게 식혔다. 그렇다. 빌어먹을 소속감 따위, 카델의 곁에서 느끼면 된다. 변치 않고 머물러 주기를 약속했으니, 자신은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 그러니 로렌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자신에게 어떤 탄생의 비화가 있든, 이젠 아무래도 괜찮은 것이다.

자신이 품고 살아야 할 것은 카델과 함께 도착할 눈부신 삶의 종착점. 그때 느낄 행복감을 기대하며, 가르엘은 흉포했던 마기를 갈무리했다.

“조금만 더 로렌스를 묶어 주세요, 단장님.”

“오래는 못해.”

이미 로렌스를 묶어 두는 데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아쉬브카 처치를 위해서는 이 이상의 마력을 낭비할 수 없다.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가르엘은 빠른 속도로 마기의 양을 늘려 갔다.

“그렇게 애써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아직도 모르는 거냐, 가르엘! 아무도 널 알아주지 않을 거다. 내가 르윈이 안고 온 너를 받아 주지 않은 그 순간부터, 르윈이 너를 내게 안고 올 수밖에 없었던 그 선택의 이유까지 전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너를 부정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거냐!”

멀리서부터 로렌스의 악담이 쏟아졌다. 하지만 가르엘은 아무런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카델이 로렌스의 입을 막아 버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검날에는 순수한 마기만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칠흑으로 물든 검날이 낮은 공명음을 울린 순간.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가르엘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날을 바닥 깊숙이 찔러 넣었다.

검을 기준으로 폭발하듯 흘러넘친 마기가 대지를 적셔 가기 시작했다. 고요하고도 빠르게, 가르엘의 마기는 흩뿌려진 피와 쓰러진 인간들을 덮어 냈다.

그의 마기에 발을 디딘 인간은 쪼그라든 피부가 재생됐고, 바닥났던 기력을 회복했다. 가르엘의 치유술은 의식을 잃은 부상자들까지 깨워 내며 순식간에 아군의 전력을 보충했다.

[영생의 땅].

온 대지를 뒤덮은 그의 기운이 푸른 초원에 핀 들꽃처럼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암흑 마력을 덧뿌린 것이 아까울 정도로, 가르엘의 기운은 따뜻한 힘을 품고 있었다.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들이 도움받은 이 따뜻한 치유술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르엘 몬자시의 것이라고. 마족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일평생 사람을 구하며 살아왔음에도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이 세계의 누구보다 올바른 남자의 친절이라고. 먼 훗날의 언젠가, 당당하게 알릴 수 있기를.

“……고맙다, 가르엘.”

치유술 전개에 집중하고 있는 가르엘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카델은 수없이 넘어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자신을 따라오는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화련]의 화력을 높이며 로렌스에게로 다가갔다.

“인간들은 가르엘을 감당하지 못한다. 내가 이곳에서 가르엘을 처치하는 것이 나의 조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얻을 유일한 기회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네가 결국 가르엘의 인생을 망치리라는 증거다!”

로렌스의 코앞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르엘과는 달리 양쪽 눈동자 전부 흰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이 안에 담긴 어떠한 것도 가르엘과 닮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와 가르엘은 근본부터가 다르니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올바른 싸움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본 적도 없을 녀석은 평생 자신의 글러 먹은 근본을 돌보지 못할 것이다.

“가르엘에겐 네깟 놈이 선심처럼 베푸는 명예 따위 필요 없어. 가르엘이 원하는 건 긍지로 찬 삶이다. 너 같은 놈이 진정한 긍지가 뭔지 알 턱이 없지. 그러니까 넌 고작 누군가의 적으로밖에 죽을 수 없는 거야.”

싸늘하게 대꾸한 카델이 로렌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반, 루멘, 라이돈! 이 녀석을 묶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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