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4화 (33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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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브카의 육체가 쓰러지며,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흩어진 흡혈충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흡혈충 너머로 어렴풋이 소환진이 보였으나, 카델은 조금 전까지 가르엘이 서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까맣게 휘몰아치는 흡혈충은 가르엘의 모습마저 집어삼켰다. 어둡게 가려진 시야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카델은 아쉬브카가 넘어지기 바로 직전의 장면을 기억했다.

‘좀 전의 그 마족은, 누가 봐도…….’

가르엘의 외적 특징을 빼다 박은 고위 마족이었다. 물론 마족은 나이가 들었고, 한 쌍의 흉한 날개가 달린 데다 가르엘의 미모와도 비할 바가 못 됐지만.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이 단박에 느껴질 만큼의 유사함이 있었다.

“단장, 제가 갈까요?”

[적색지대]를 해제한 반이 가르엘이 있던 자리를 턱짓하며 물었다. 그에 겨우 눈길을 돌린 카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요젠도 같이 있으니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반, 루멘. 너희는 지원군을 찾아서 이쪽으로 안내해. 나랑 라이돈은 장막을 만들게.”

저 마족이 가르엘의 아버지일지, 친족 중 한 명일지는 알 수 없다. 저런 중요한 인물을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는지도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누가 됐던 놈은 적이다. 가르엘이 공격을 망설일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선을 다해 눈앞의 적을 상대할 테고,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델은 얼음 결정에 둘러싸인 라이돈을 향해 말했다.

“준비됐어?”

“한참 전부터 준비 중이었는걸. 슬슬 추워질 것 같아, 자기.”

“그래. 서두르자.”

가르엘과 요젠이 저 마족을 묶어 두는 동안, 이쪽은 터널형 장막을 만들어 마법사들을 소환진까지 이끌어야 했다. 고위 마족의 목적이 오로지 가르엘일 리는 없다. 놈은 결코 소환진 해제 작업이 시작되는 걸 두고 보지 않을 테니. 자신이 나설 때는 바로 그때였다.

‘가르엘의 존재가 변수를 만들어 낸 건지, 스토리의 흐름 중 하나일 뿐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겨 내지 못할 리 없다. 어떤 놈이 등장하든, 없애 버리면 그만이야.’

부하들을 믿었고, 그들이 따르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신호를 맞춘 라이돈과 카델이 동시에 마력을 개방하며, 소환진과 이어지는 터널형의 장막이 뻗쳐 나가기 시작했다.

*

마기로 빚어진 거대한 앞발이 사정없이 가르엘을 후려쳤다. 그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은 똑같은 형태의 마기로, 두 기운이 부딪힐 때마다 보랏빛 불씨가 튀어 올랐다.

“우리 형제는 쌍둥이라 불릴 만큼 외관이 비슷했지. 너도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모양이구나.”

“이 더러운 피를 물려준 게 내 아버지인 모양이지?”

“남동생이었다. 네 마기를 보면 알겠지만,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었어.”

“동생 간수 좀 잘하지 그랬어. 동생이 아무 데나 골칫거리 씨를 뿌려 댈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건데?”

“이름이 뭐지?”

“알려 줄 마음이 들지 않네.”

가르엘은 공격을 방어하는 틈틈이 빛 마력을 두른 검날로 미처 막지 못한 손톱을 튕겨 내기 바빴다. 반면 로렌스는 멀찍이서 팔짱까지 낀 채 그런 가르엘을 감상하듯 지켜보았다.

“내 동생은 그다지 건방진 성격이 아니었다만. 그 성정은 천한 어미에게 물려받았나?”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처음 보는 조카가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아?”

“그래, 귀엽긴 하군. 이 정도 능력을 갖추고 고작 이런 전투라니,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비린 미소를 머금은 로렌스가 이죽거렸으나, 가르엘은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달려드는 앞발을 장검으로 강하게 빗겨 친 그가 단번에 모든 마기를 거두고는, 검 위로 더욱 강한 빛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귀여우면 눈 딱 감고 죽어 줘. 네 시체라면 내 귀한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마기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 힘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 치유사가 접근하기 힘든 전쟁터라면 위급 시를 위해 더더욱 아껴야 했다. 그랬기에 가르엘은 빛 마력으로 로렌스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마족의 힘을 가졌음에도 보잘것없는 인간의 힘을 꺼내다니. 실로 우둔한 판단이다.”

로렌스는 소란스럽게 몰려드는 흡혈충을 느긋하게 날려 보내며 가르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네 나약함과 천함, 우둔함을 직접 겪어 보니 여러 생각이 드는구나. 얄팍한 후회마저 든다.”

“…….”

“만약 과거의 내가 남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어 널 마계로 데려왔다면. 그 되바라진 천성을 갈아엎어 주군의 충직한 신하로서 키워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했다면 지금 같은 번거로운 과정 없이 주군의 호의를 얻었을 수도 있지.”

장검을 강하게 고쳐 쥔 가르엘이 미간을 구겼다.

“날 마계로 데려가려 했다는 건가? 설마 내 아비가 어머니를 죽이고 자식을 빼돌리려 했나?”

날카로운 물음에 로렌스가 조소를 흘렸다. 과거에 대한 궁금증보다 눈앞의 적을 해치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누구도 알려 주지 않은, 그래서 언제나 상상했을 뿐인 제 저주 같은 탄생의 비화를 들을 기회가 지금뿐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대답해 봐. 부모의 과거로 내 평정을 흔들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거리낄 거 없잖아.”

“너도 나만큼이나 네 부모를 원망하며 산 모양이구나. 그래, 그들은 해서는 안 될 선택으로 많은 이들을 괴롭게 만들었어.”

“자꾸 엮지 마. 다 늙은 덩치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로렌스가 공격 범위 안에 발을 들인 순간, 가르엘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낮은 공명음과 함께 쇄도한 검날이 로렌스의 상박을 노렸으나.

“만약 내 남동생……. 르윈이 정을 나눴던 인간을 죽이고, 제 핏줄의 보존만을 위해 도움을 구했다면, 난 도왔을 거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은 로렌스에게 티끌만 한 상처조차 남기지 못했다. 단단한 암석이라도 되는 듯 검날이 닿은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위에선 미약한 마기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극의 경지에 오른 치유력이었다. 본래 타고난 재생력에 더해진 뛰어난 치유력은, 육체에 아주 작은 생채기 하나 남지 못하도록 그를 어루만지며 보호했다.

이 지독한 재생력은 확실히 유전이 맞구나. 눈알 하나 파내지 못해 끊임없이 좌절했던 과거의 장면이 그려지며, 그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게 됐다. 과연 자신이 눈앞의 빌어먹을 백부를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죽음에 가까워지게 유도할 수라도 있을까.

“하지만 르윈은 네 어미를 사랑한다고 하더군. 사랑하는 이가 목숨 바쳐 낳은 아이이니, 자신과 함께 마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사랑?”

“아, 그래. 당시 르윈은 인간계에 남아 다친 마족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마계의 계획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역할을 무사히 수행했다면 마계로 복귀해 가문의 입지를 단단히 해 주었겠지. 결국엔 복귀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마족이 인간을 사랑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였겠지.”

가르엘의 사나운 일갈에 로렌스가 눈을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제 상박을 내리누르는 검날을 맨손으로 쥐어 조금씩 떼어 냈다. 어마어마한 완력이었다.

“통하는 부분이 있군그래. 네가 옳다. 마족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수준 낮은 짐승에게 가진 연민을 착각한 거였겠지. 놈은 그 하찮은 감정 하나를 분별하지 못해 가문에 치욕을 안겼다. 그리고 그 치욕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는 내 목에도 칼날을 들이미는구나.”

“내 어머니는 속았던 거야. 더러운 마족 새끼에게 속아, 원치도 않은 아이를 가졌던 거다.”

“마족의 아이를 가지기에 인간의 몸은 턱없이 약해. 애초에 스스로 재생하지도 못하는 종자가 어떻게 끊임없이 번식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만, 네 어미의 선택만큼은 존중한다. 반쪽짜리라도 엄연한 하이웨일가의 혈통. 인간의 목숨에 비하면 과분한 존재이지.”

사랑했을 리 없다. 서로 원망하고, 증오하고, 오로지 일방적인 욕망만이 존재하는 관계였음이 틀림없다.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 동화에나 나올 법한 사랑의 결실이, 고작 이것일 리 없으니까.

가르엘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흥분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웃기지 마.”

자신의 운명을 망가뜨린 두 남녀가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이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를 보자마자 죽이지 않은 아버지를? 피하지 않고 아버지를 받아들인 어머니를?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그들의 이기적인 사랑을?

“내 손으로 동생을 죽였으나, 동생은 마지막 힘을 짜내 널 멀리 도망 보냈다. 만약 소환진의 힘이 조금만 더 유지됐더라면 어떻게든 찾아내 불행의 씨앗을 도려냈을 터인데.”

로렌스는 가르엘의 검을 장난감처럼 쉽게 떨쳐 내며 게슴츠레 눈을 접었다. 첫 몇 마디를 나눈 순간부터, 아니,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자신의 조카는 인간에게도, 마족에게도 섞이지 못한 이물질. 인간의 편에 서려 아등바등하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원망으로 삶을 지탱하는 아이다. 강제로 떠안게 된 반쪽짜리 삶을 버텨 내기 위해, 뭐든 움켜쥐고 절벽을 타고 오르려는 아이다. 과거를 암흑으로, 미래를 빛으로 삼아 나아가려는 아이다.

그런 아이일수록 제 과거에도 온기가 있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아직 제 근본을 인정하지 못한 이 귀여운 조카는, 고작 이따위 보잘것없는 옛이야기에 흔들릴 것이다. 미끄러진 절벽 아래에는 죽음만이 존재할 뿐인데도.

“내 동생의 눈물겨운 부성애와 네 하찮은 어미의 희생으로 태어난 삶은 어떠했나?”

저 아이는 제 아비가 한 인간을 사랑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원망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할 테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 아이는 결국 증오해 마지않는 제 부모를 연민해야 할 테니까.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진다 한들 상관없었다. 오히려 적의를 거두는 편이 더 곤란하다. 자신의 조카가 과거를 부정하며 휘둘리는 동안, 자신은 훤히 드러난 빈틈을 찔러 목숨을 거둬 가야 했으므로.

“짧은 생이라도 행복했기를 바라지.”

한쪽에서만 우습게 번들거리는 검은자위를 보라. 어떻게도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없는 처량한 꼴을 보라. 어느 쪽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외톨이를 보라. 이 어리숙한 조카를 보고 있자니, 끝없이 구역질이 치밀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다.

하이웨일의 귀한 피를 혼탁하게 물들인 동생에 대한 증오심이 피어났다. 이젠 오랜 시간 이어진 한심한 흉터를 뜯어낼 시간이었다.

어느새 가르엘의 뒤편으로 떠오른 손아귀가 그의 심장을 노렸다. 지척으로 다가온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는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도 않은 채 코앞에 선 로렌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굳어 있던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났어.”

“유언이라면 들어 보지.”

“가서 내 부모님에게 전해 줘. 난 빌어먹을 당신네의 사랑놀음을 증오하지만, 인간을 지킬 힘을 물려준 것만은 감사한다고. 그 덕에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고.”

동요를 숨기기 위한 연기인가, 아니면 자신의 통찰이 어긋난 것인가. 그것을 구분할 새도 없이, 로렌스가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이 선 바닥. 아무런 장치도, 기척도 없던 그곳에 새까만 기운이 고여 그의 발을 묶어 두었다.

“……암기.”

“내가 네 얘기에 감명이라도 받아서 멍청하게 서 있는 줄 알았나? 혼자 여유 부리다 덫에 걸린 소감이 어때.”

“너흰 날 죽이지 못한다.”

“어려울 것 같긴 해. 인정하지.”

빙빙 검을 돌리며 조금씩 로렌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는 동안 사방으로 치솟은 암기가 로렌스를 가두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점점 높아지는 암기의 벽 위로 간신히 빠져나온 로렌스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귀찮을 정도로 잘생긴 미남으로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도 전해 줘. 널 보면 내 어머니의 유전자가 힘내 준 모양이니, 아버지에겐 전달할 필요 없고. 그럼 나중에 봐.”

황당한 발언에 로렌스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암기에 삼켜진 그에게 허락된 목소리는 없었다. 가르엘은 로렌스를 가둔 직육면체의 공간에서 시선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직전까지 제 심장을 노리던 로렌스의 마기가 흩어지는 중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찔려 죽을 뻔했습니다, 요젠 경.”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지금껏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요젠이 기습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약한 척 구는 가르엘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찔려도 죽지 않잖아.”

“아뇨, 이 마기는 정말 위험하다고요. 순도가 높다고 해야 할까. 우리끼리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경도 가둬 버리는 쪽을 택한 거 아닌가요?”

“오래 버티진 못해.”

“……압니다. 일단은 단장님 쪽에 합류해 정보를 알리자고요.”

가볍게 눈을 휜 그가 앞선 요젠을 따라 흡혈충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는 금세 경직됐으나,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려했던 사태였다. 터널형으로 만들어 낸 바람과 얼음의 장막은 마법사들을 순조롭게 소환진으로 이끌었으나, 아쉬브카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일전 카델을 죽음의 목전까지 끌고 갔던 벌레. 흡기충을 꺼내 든 것이다.

“절대 무리하지 마, 라이돈. 장막 보수는 내가 진행할 테니까, 넌 마법사들이 다치지 않게 보호해 줘.”

“난 아직 멀쩡한데?”

“폭주의 여파가 남아 있을 거야.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라이돈은 자기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거냐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카델은 그의 마력을 억지로 끌어다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적린 기사단만의 싸움이 아니다. 버티다 보면 계속해서 지원군이 도착할 테고, 그때를 위해 힘을 아껴 두는 것 또한 전술이었다.

흡기충은 장막을 온통 뒤덮은 채 무서운 속도로 마력을 좀먹어 갔다. 아쉬브카의 팔 한쪽이 아닌 본체를 상대하는 일인 만큼, 날아드는 벌레의 규모가 상당했다.

‘지금 겨우 소환진 해제 작업에 들어갔어. 최대한 버텨 줘야겠지만, 여기서 마력을 전부 축낼 게 아니라면 길어 봤자 15분 정도다. 그 안에 아쉬브카를 상대할 만한 지원이 들어와야 할 텐데.’

장막 위로 끝없이 마력을 불어넣던 카델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분투 중인 드레프와 그의 부하들이 있었다. 가장 처음 도착한 지원군인 그들은 마도구를 통한 최소한의 장막으로 최전방에서 아쉬브카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몇몇은 흡혈충에게 피를 빨려 신체 일부가 까맣게 쪼그라들었으나,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앞선 대대장의 호통과도 같은 격려 때문이었다.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수백의 제국인이 목숨을 잃는다! 이럴 때 밥값 못 하고 빌빌대는 놈이 보인다면 내가 직접 목에 칼을 꽂아 주마! 쉬지 말고 돌격해!”

참으로 드레프다운 거친 지시였다. 그 명령에 힘을 싣는 것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돌격하는 행동력. 그의 쌍검은 쉬지 않고 아쉬브카의 몸체를 노렸다. 벌레 떼에 집어삼켜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아쉬브카의 재생을 멈추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멀리서도 드레프의 몸 곳곳에 쪼그라든 흔적이 남은 것이 보였다. 드레프와 그의 대대는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했다. 루멘과 요젠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아쉬브카는 중심을 잃고 무너졌으나, 그 탓인지 내뿜는 벌레의 양은 배가 됐다. 흡사 검은 구름과도 같아진 벌레 떼는 쉴 새 없이 몰려다니며 아군을 공격해 댔고, 기사들은 물론 카델이 보호 중인 관문까지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쓰러진 채로도 태산 같은 위용을 자랑하는 아쉬브카는 인간의 피를 빼앗아 다리를 재생시키려 했고.

‘[울로]를 넘겨줬더니 어떤 지원군이 오는지도 모르겠네. 가장 가능성 높은 쪽은 제리엘인가. 제리엘이 온다면 확실히 마력 소모는 덜할 거야.’

만약 소린의 대대가 온다면 큰 힘이 되겠으나, 각 관문 방어에 주축이 되는 세력이 쉽게 이동하진 못할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관문 쪽에도 발을 묶어 둘 만한 마족들이 등장하고 있을 거야. 그걸 염두에 두면 큰 기대는 못 하겠어.’

적어도 자신의 마력 부담이 적어지고, 아쉬브카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봉쇄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 필요했다.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소환진을 파괴한 뒤, 협공으로 아쉬브카를 쓰러뜨릴 수 있다.

‘장막 유지를 다른 마법사들이 감당해 준다면 당장 부하들을 도우러 갈 수 있을 텐데.’

현재 라이돈을 제외한 나머지 부하들은 카델의 명령을 따라 로렌스를 상대하러 간 상태였다. 유독 그 방면에 흡혈충이 빼곡한 탓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건조한 입안을 힘주어 훑어 내린 카델이 가늘게 눈을 떴다.

‘……로렌스. 그 녀석이 아쉬브카와 함께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가르엘의 큰아버지이기까지 하단 말이지.’

가르엘에게 이름을 전해 듣자마자 막연했던 놈의 정체가 뚜렷해졌다. 그리고 이내 확신하게 되었다. 스토리를 이루는 큰 틀의 변동까진 모르겠으나, 마계 전쟁의 흐름은 게임 속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나중에 생각하자.’

아쉬브카와 로렌스를 앞에 두고 태평하게 다른 생각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빠르게 정신을 다잡은 그가 흡기충을 터뜨릴 기세로 마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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