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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있는 건 고위 마족이야.”
카델이 지원군의 행동을 주시하던 때, 그의 명령을 따라 암기를 퍼뜨리던 요젠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움직임은?”
“별다른 건 없어. 딱히 소환진을 건드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서 있을 뿐이야.”
그냥 서 있다니. 정말로 또 다른 고위 마족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건만, 수상쩍은 행보에 찜찜함까지 더해졌다. 차오르는 짜증에 반의 새로운 기술을 감상하며 느꼈던 벅찬 기쁨이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암기로 원거리 공격을 하는 건? 가능해?”
“아니. 노릴 빈틈이 없어.”
“……알겠어. 일단은 놔두자. 지금은 그놈도 우리도, 앞에 저 장벽 같은 놈이 버티고 있으니까.”
카델은 조금 전부터 반의 기술에 이끌리듯 다가오는 중인 아쉬브카를 가리켰다. 제 벌레를 모조리 흡혈하고 빈 껍데기로 만든 피의 달을 없애려는 건지, 정체를 확인하고자 접근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어 지켜보고는 있다만, 위험할 것 같으면 곧장 기술을 거두게 할 생각이었다. 슬슬 지원군도 도착하고 있는 듯하니.
“이야, 저 괴물 같은 고위 마족이 코앞에 있는데도 오라가 안정적이네요. 역시 제 마기로 단련한 덕인가요? 반 경의 성장에 제 지분도 있는 거겠죠?”
“아니! 이건 내가 주기적으로 반을 놀린 덕분이야. 그 덕에 평정심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된 거지. 그렇지, 반? 요즘 반응이 심심해서 재미도 없는데 강해지기라도 해야지.”
“둘 다 송장 되고 싶은 거 아니면 입 좀 다물어. 안 그래도 집중하기 힘드니까.”
바닥에 꽂은 대검을 그러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붉게 물든 눈동자 속, 오라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몸 위로도 계속해서 기운이 샘솟았다. 아쉬브카의 마기가 적월과 가까워지며 힘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되레 오라가 팽창하며 [적색지대]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반, 이 기술은 얼마나 유지할 수 있겠어?”
“단장이 원하는 만큼요.”
단호한 대답에 심각하게 질문하던 카델이 멈칫했다. 표정 변화가 없는 걸 보니 진담인 듯한데, 그 부분이 더욱 심금을 울렸다. 카델은 쿵덕거리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아쉬브카가 적월에 닿는 그때부터 길을 뚫어 보자고.”
요젠의 정보에 따르면 소환진은 우측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동 중인 아쉬브카가 적월을 완전히 움켜쥔다고 가정했을 때, 그의 오른 다리를 잘라 낸다면 중심이 기울며 가려져 있던 소환진이 드러날 것이다. 그 타이밍을 맞춰 라이돈과 자신의 마법으로 소환진과 이어지는 일직선 터널을 만든다.
‘그다음에 상대하게 될 고위 마족이 변수긴 하지만, 터널을 통해 마법사가 몰려온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빠르게 계획을 정리한 카델이 휙 고개를 돌렸다.
“루멘, 요젠! 오른쪽 다리를 노려! 녀석이 쉽게 재생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파괴해야 해!”
“해 보지.”
“알겠어.”
루멘과 요젠은 게임 속에서도 덱의 핵심 전력을 담당하는 양대 산맥이었다. 카델의 명령에 즉각 반응한 두 남자가 아쉬브카의 우측으로 이동했다. 우람한 다리가 주인의 의지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멸재]를 사용할 거다. 두 번째 협공으로 가지. 어때?”
“좋아. 10초 뒤에 시작하면 돼?”
“12초.”
“그래.”
두 남자에겐 쓸데없는 대거리나 충돌이 존재하지 않았다. 딱딱 떨어지는 의견의 합에선 안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두 남자의 성정이 꽤 잘 어우러지는 덕이었다. 루멘은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한 요젠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요젠은 적당히 선을 지키며 필요한 일만 언급하는 루멘의 태도가 편했다.
서로 거부감이 덜한 덕에 전투 스타일이 다름에도 제법 많은 합을 맞춰 볼 수 있었다.
“시작한다.”
아쉬브카의 손아귀가 기어코 적월을 움켜쥐었다. 골을 울릴 만큼 강한 공명음이 퍼지며, 둥글게 뭉쳐 있던 오라의 형태가 불규칙적으로 변형됐다.
대기마저 진동하는 소란 속, 루멘은 고요히 검을 쥐었다. 동시에 검기의 폭풍이 그의 주위를 감싸고. 뒤편에서 단검을 꺼낸 요젠이 습관처럼 눈을 가린 붕대의 매듭을 조이려다 멈칫했다.
“……두고 왔네.”
소르를 상대할 때 떨어뜨렸던 붕대를 아직 보충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흉터 난 눈꺼풀을 문지르며, 요젠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2초.
조준점을 지정한 루멘의 기술을 따라 아쉬브카의 넓적다리가 조금씩 일그러졌다. 부글거리는 살가죽 위에서 벌레가 빠져나오려 했지만, 나오는 족족 공간의 뒤틀림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신기한 기술이었다.
10초.
루멘을 감싼 원형의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회전하고, 천천히 빠져나오는 검날에 응축된 검기가 맺혔다. 거침없이 넓어지는 넓적다리의 균열. 나선형의 균열을 빼곡히 채우는 터져 나간 벌레의 잔해.
7초.
적월을 움켜쥔 아쉬브카가 작게 비틀거렸다. 미세한 기울기였으나, 주변에 퍼진 벌레들의 움직임은 기민하게 변화했다. 그들은 다리의 재생을 대비하기 위해 재빠르게 넓적다리 위로 비행했다.
5초.
왼쪽 눈꺼풀을 문지르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왼눈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암기. 얇은 살갗 아래 맥동하는 암기는 도드라진 핏줄, 혹은 깨진 석상의 균열처럼 날카롭게 뻗쳐 있었다.
3초.
[시멸재]로 일그러진 공간이 경직되며, 나선형의 틈새로 검기의 잔상이 새어 나왔다. 단검을 역수로 치켜든 그가 거침없이 넓적다리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쉬브카의 살가죽을 짓밟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 암기가 퍼져 나갔다. 아쉬브카는 제 몸을 타고 오르는 암살자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다.
1초.
균열이 깨지며, 아쉬브카의 넓적다리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미리 몰려들었던 흡혈충이 급히 수복을 시도하고. 함께 구멍 위에 안착한 요젠이 거무죽죽한 살덩이 위로 두 개의 단검을 쑤셔 박았다.
동시에 암기가 맥동하던 왼쪽 눈꺼풀이 올라가며, 내부가 드러났다. 그곳에 있는 것은 검은 암기의 덩어리. 눈알처럼 둥글게 뭉친 암기가 새까만 심연을 그려 내고 있었다.
0초.
[암안술 제1식 – 공간 침식].
살덩이에 꽂힌 단검을 시작점으로 무수한 암기의 줄기가 뻗쳐 나간다. 꼭 거대한 거미줄처럼 구멍을 메워 가는 암기에 몸을 내던진 흡혈충은 허망하게 절명했다. 재생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증폭하던 암기는, 곧 구멍을 빼곡한 암흑으로 채워 냈다.
암기로 이루어진 공간이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갔다. 넓적다리의 양 끝을 이어 낸 얄팍한 근육을 완전히 끊어 내기 위함이었다.
완연한 어둠 속에서, 단검 위로 끊임없이 암기를 불어넣던 요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얼굴 위에는 고지를 코앞에 둔 자의 여유가 아닌, 위험한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의 감각이 향하는 곳은 뻥 뚫린 구멍 너머. 처음 카델에게 존재를 알렸던 두 번째 고위 마족이 선 자리였다.
고요한 심연을 그려 내던 암기에 얕은 파문이 일었다. 파문의 범위는 빠르게 늘어 갔고, 천이 하늘거리듯 암기의 막이 격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곧, 무언가가 암기를 밀어 내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암기의 막을 뚫어 내려는 듯 거침없이 전진하는 ‘그것’은 손아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손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손아귀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단 어느 흉포한 마수의 앞발처럼 보였다.
‘익숙한 형태.’
암기에 휘감긴 손아귀의 모양새를 더듬던 요젠이 미간을 좁혔다. 손아귀의 형태가 낯설지 않다는 것도 거슬렸지만, 암기를 밀어 내는 마기의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하늘 아래 같은 종류의 기운은 존재할지언정, 개개인이 가진 기운의 성질이나 특징은 전부 다르다. 기운의 차별성으로 상대의 자취를 쫓는 요젠에게 그 차이는 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 그랬기에 느낄 수 있는 익숙함이었다. 이 마족의 힘에서, 감지되어서는 안 될 기운이 느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손아귀가 자신의 암기에 직접 노출되었음에도 전혀 타격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
‘……아니. 타격이 없는 게 아니야.’
신중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요젠은 이내 깨달았다. 이 마기는 암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상처를 재생 중이었다.
‘재생에 1초의 지연도 없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요젠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오차 범위가 0에 수렴하는 재생력은 언뜻 상대를 무적에 가까운 불사신으로 느끼게 했으니.
‘재생력은 가르엘보다 한 수 위.’
적의 능력치를 가늠한 요젠이 금방이라도 막을 뚫고 달려들 듯한 손아귀를 무시한 채 암기의 양을 대폭 늘렸다. 잠시 정체되었던 암기의 범위가 다시금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흡혈충의 접근을 차단한 채 늘어나던 구멍이 기어이 아쉬브카의 오른 다리를 절단한 순간.
콰지직!
암기의 막을 찢고 나온 손아귀가 요젠을 향해 날 선 손톱을 휘둘렀다. 요젠은 곧장 상체를 꺾어 회피했으나, 아슬아슬하게 걸친 손톱이 그의 가슴팍을 길게 그어 냈다.
방어를 포기하고 아쉬브카 공격에 전념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피해다. 그대로 추락하듯 몸을 날린 그가 암기를 거두자, 까맣게 물들었던 왼쪽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요젠!”
멀리서 둘의 협공을 지켜보던 카델이 요젠의 착지 지점으로 달려왔다. 차마 요젠을 잡지도 못한 채 빙 둘러 가며 상처를 살핀 그가 다급히 가르엘을 불렀다.
“가르엘! 빨리 와서 치유술 좀 써 줘!”
“별로 아프지 않아. 치유술은 나중에…….”
“피가 철철 나잖아! 과다출혈로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아무리 앞을 볼 수 없다지만, 지금 자신의 상처에서 경악할 만큼 많은 양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카델은 종종 이렇듯 과장해서 상대를 걱정하는 때가 있었다. 물론 카델의 걱정은 진심일 테고, 자신도 그의 염려가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태평하게 상황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뒤쪽의 마족부터 없애야 해. 가르엘과 비슷한 류의 힘이야. 저 녀석이 있다면 아쉬브카는 계속해서 재생할 거야.”
“가르엘과 비슷한 힘이라고……?”
가르엘과 비슷한 힘이라면 치유 능력을 말하는 걸까. 앞으로 상대해야 할 마족 중에 치유술을 사용하는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족은 본인의 재생력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곤 했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이 계속해서 엇나가는 기분이었다.
카델이 더 자세한 정보를 물으려 하던 때, 멀리 있던 루멘과 가르엘이 합류했다. 루멘은 카델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낚아채 반대쪽으로 달려갔고, 요젠은 함께 움직이려는 가르엘을 막아섰다.
“음, 요젠 경. 치유술을 사용하더라도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가르엘은 폭발적인 양의 흡혈충을 방출하며 기울어지는 아쉬브카의 몸체를 가리켰다. 서둘러 피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깔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요젠은 꿈쩍하지 않은 채 가르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계에 네 혈육이 남아 있어?”
“……글쎄요. 혈육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뭐라도 떠올리는 게 좋을 거야.”
“그게 갑자기 무슨…….”
맥락 없는 질문에 가르엘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 갑작스레 뻗친 요젠의 손이 그의 안면을 붙들고는 뒤편으로 훅 밀어 냈다.
그간 귀찮게 굴어 암기로 배가 뚫린 적은 있지만, 이런 식의 폭력은 당한 적 없었는데. 당황한 가르엘이 자신의 언행에 무언가 실수가 있었는지를 되짚어 보려던 때였다.
푸욱.
살가죽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찡그린 시야 속으로 복부의 코앞까지 드리운 날카로운 검날이 비쳤다.
“……?”
그제야 밀려난 몸을 세운 가르엘이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장검에 꿰뚫린 자신의 그림자 분신. 동료의 분신을 만들어 낸 요젠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대신 새로운 인물이 분신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굳이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단박에 알겠군.”
아마도 요젠이 처음 말했던 또 다른 고위 마족.
“아름다운 머리칼과 총명한 눈빛을 가졌구나.”
그가 장검을 뽑아내자, 앞을 가리고 있던 분신이 녹아내리며 마족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구불거리는 백색의 머리칼과 단단하게 각진 턱, 우뚝한 콧날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선명한 자주색 역안을 발견한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건네마. 내 이름은 로렌스 하이웨일.”
가르엘은 요젠이 무슨 이유로 혈육의 존재를 물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구나. 나의 하나뿐인 골칫거리 조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