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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고개를 꺾은 로렌스가 한참 위에 자리한 음침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를 밀대로 얇게 펴내면 성곽 하나는 너끈히 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앞에 있는 이는 어느 건물에도 몸을 구겨 넣지 못해 항상 차가운 암벽에 질펀한 몸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고위 마족.
“……아쉬브카.”
지저분하게 충혈된 샛노란 눈동자가 제 거대한 발 앞에 자리한 로렌스를 주시했다. 묵직한 몸을 가볍게 들썩이자, 거무죽죽한 살가죽 안쪽에서부터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시끄럽게 진동했다. 그 폭력적인 소음을 묵묵히 버티고 있으려니, 아쉬브카가 한참 늦은 대답을 꺼냈다.
“나의 차례가… 왔는가…….”
“그래. 나와 함께 가 줘야겠소. 에밀리아 스웰르, 우리의 새로운 주군께서 명령하셨네.”
“주군께… 충, 성을…….”
굼뜨고 둔한 말투였으나, 로렌스는 아쉬브카를 비웃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마계의 누구도 아쉬브카를 함부로 대할 순 없을 테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아쉬브카의 앞에서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하이웨일가의 치유력과 경의 광역기가 함께라면, 제국을 무너뜨리는 건 순식간이겠지. 기도가 끝나면 말하시오. 주군께서 소환진을 열어 두셨소.”
제국을 무너뜨린 뒤, 동생이 남겨 놓은 더러운 불순물을 제거하리라. 새롭게 찾아올 에밀리아 스웰르의 세상에서 하이웨일의 자리를 새겨 두어야 했다.
모든 전력을 제국에 집중시키고, 마법진을 재생해 인간계의 혼란을 부추기려던 마계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 어젯밤 내내 부지런히 감소하던 진행도는,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바닥을 드러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03%」
「인간계 침략 진행도 : 18%」
‘이 진행도들이 0이 돼도 당장 전쟁이 끝나진 않겠지. 봉인을 진행해야 할 테니까.’
마계를 통째로 소환하겠다는 그들의 거대한 포부는 차근차근 꺾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마계를 억누르던 봉인진은 이미 효력을 잃었다. 마족이 언제든 인간계로 넘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오래전 ‘세븐 나이츠’가 해냈던 것처럼, 마계를 완전히 봉인해야 했다.
‘이번엔 저놈들이 두 번 다시 부활을 꿈꾸지 못하게 하겠어. 마계를 보호할 힘도, 지도자도 남겨 두지 않을 거야. ……에밀리아 스웰르. 그 공주님을 없애야 한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녀를 마계 바깥으로 끌어낼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끝까지 찾지 못한 채 직접 마계로 내려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여전히 승기는 인간들에게 있다는 거야. 전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 잘 방어해 줬어.’
인명 피해는 피할 수 없었지만, 국가가 통째로 붕괴하는 일은 없었다. 첫수부터 마족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제부터는 어렵사리 쟁취한 승기를 빼앗기지 않는 데 전념해야 했다.
‘당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놈들이 어떤 식으로, 어디서부터 재습격을 꾀하고 있냐는 건가.’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선공권은 여전히 마족에게 있었다. 인간들에겐 마계로 넘어갈 생각도, 방법도 없으니.
놈들은 분명 이쪽의 빈틈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한 번 계획이 실패했으니 더욱 신중을 기하겠지. 재정비가 끝나기 전이나, 긴 소강상태에 방심한 틈을 타 뒤통수를 칠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재정비가 끝났을 때 와 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국가라면 몰라도, 제국의 기사들은 나흘이나 동결 상태에 돌입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공격으론 꿈쩍도 안 하는 얼음덩이를 깨부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으니. 며칠 동안 저 멀리서 제국의 상태만 살피던 기사들과는 쌓인 피로도의 격차가 컸다.
“단장, 아침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
카델이 여러 고민에 골몰해 있을 무렵, 식사를 챙겨 온 반이 옆으로 다가왔다. 전시 중이지만 기사단은 관문 근처에 머무르는 상태였고, 도시와 이어진 이동 관문이 설치된 덕에 제법 신경 쓴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카델은 반이 가져온 토마토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받아 들었다. 입맛은 넘치게 있었지만, 내내 긴장 상태인지라 무거운 음식은 꺼리게 됐다. 수프에 적신 빵을 천천히 오물거리고 있으려니, 고기가 가득 담긴 제 접시와 카델을 번갈아 보던 반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정말 그걸로 되겠어요? 제 고기 좀 나눠 줄게요.”
“아니, 됐어. 몸을 가볍게 하고 싶어서 그래.”
“지금도 충분히 가벼운데요.”
“그런 의미가…….”
괜찮다고 거절하려 해도, 큼직한 미트볼을 찍은 포크를 든 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반을 보니 설명할 의욕이 사라졌다. 카델이 딱 한 조각만 먹겠다며 입을 벌리자, 금세 표정을 푼 반이 입안 가득 고기를 넣어주었다.
“많이 먹어야 힘이 나죠, 여환아.”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호칭에 헛웃음이 나왔다. 말투는 존칭인데 호칭은 여환이라니. 친한 사이엔 성씨인 ‘신’을 빼고 이름만 부르면 된다고 알려 준 뒤부터 계속 저런 식이었다.
이름 뒤에 ‘형’을 붙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는 걸 알려 줘야 하는 걸까. 영 적응이 안 되는 기묘한 반 존대를 정정해 줄까 싶다가도, 결국엔 고개를 젓게 됐다. 반의 입에서 나오는 여환이 형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어색해 몸이 비비 꼬였다.
“다른 애들은 뭐 해?”
“루멘 녀석은 어디 구석에서 몸 풀고 온다고 했고, 라이돈은 어떤 변태 같은 마법사가 챙겨 온 디저트를 먹고 있던데요. 가르엘은 제가 천막에서 나올 때도 자고 있었고, 요젠은 깨어났을 때부터 안 보였어요.”
“응? 안 보였다고?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야?”
“네. 일단 근처엔 없는 것 같던…….”
“여기 있어.”
대화를 나누던 카델과 반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뒤편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머금은 요젠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이런 깜짝 등장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기어코 수프를 반절 흘려 버린 카델이 울상을 지었다.
“언제 온 거야?”
“방금.”
“왔으면 제발 말을 해 달라고. 밥은? 먹었어?”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요젠을 바라보자, 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울로]였다.
“……응? 내 천막에서 가져온 거야?”
“틀어 봐.”
요젠이 건넨 [울로]에 마력을 불어넣으니, 내내 잠잠했던 통신기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법사들은 동쪽 관문으로 와 주십쇼. 마법진이 생성되고 있습니다. 근처에 마족은 보이지 않으나, 무형의 힘이 거대한 마법진을…….]
당황하며 웅성거리는 소리와 지원을 요청하는 음성이 뒤섞여 들렸다. 잠시 내용에 집중하던 카델이 굳은 낯으로 고개를 들자, 요젠이 입을 열었다.
“이미 발견한 모양이네. 조금 전부터 동쪽 관문에서 마기가 감지됐거든.”
기상과 동시에 암기를 펼쳐 넓은 지역을 돌아본 요젠은, 동쪽 관문 근방에서 미세한 마기를 감지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기운. 곧장 카델을 찾아 정보를 전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 말대로 아직 마족은 없어. 마기만 점점 강해지고 있을 뿐이야.”
“무형의 힘이 마법진을 만들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릴까요? 투명한 적이라도 있는 건가.”
기이한 마법진의 정체를 짐작하는 부하들의 옆에서, 창백해진 뺨을 문지르던 카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환진이야. 셀레브를 소환했던 것처럼, 동쪽 관문에 고위 마족을 소환할 작정인 거야.”
처음 제국에 입성했을 당시, 카델은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 마법진이 새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곳에서 등장한 것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고위 마족, 셀레브. 그녀가 빠져나왔던 마법진은 ‘레드 맨’ 군단까지 무한정 생성 가능한 고급 소환진이었다.
‘아무래도 재정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진 않을 모양이군.’
소환진이 완성되기 전에 어떻게든 파괴해야 했다. 카델은 [울로]를 움켜쥔 채 대대장들을 찾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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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아침부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고!”
신경질적으로 외친 드레프가 제 손에 들린 [울로]를 거칠게 두들겼다. 마력석을 통해 몇 번이고 재작동을 시켜 봤으나, 결과는 같았다.
“아무래도 직접 상황을 보러 가야 할 듯싶은데요.”
카델이 소환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자마자 대대장인 드레프와 제리엘, 피에르가 [울로]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통신기 너머에서는 조금 전 카델이 들었던 보고가 들려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다른 지역의 통신은 잘 되었으므로, 소환진이 나타난 동쪽 관문에 이상이 생긴 것임이 분명했다.
“이 많은 기사를 전부 이동시키기엔 마력 낭비가 심하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대기 중인 부하들을 돌아본 피에르가 짧게 혀를 찼다. 관문끼리는 이동 관문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당장 병력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대대 단위를 한 번에 옮기기에는 필요한 마력의 양이 부담스러웠다. 마력석을 이용한대도 한계가 있다.
카델은 서둘러 부하를 추려 내려는 세 명의 대대장을 막아서며 말했다.
“동쪽 관문엔 적린 기사단이 가 보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통신할 테니, [울로]는 계속 켜 두세요.”
“뭐? 기사단 전원이 가겠다고?”
“남쪽엔 호계 기사단에 천시 기사단까지 있으니 충분하잖아. 만약 이미 동쪽 관문에 마족이 소환됐다면 어중간한 지원으론 부족해. 상태를 보고 추가 지원을 요청할 테니, 대기하고 있어.”
소수 정예 기사단이 좋은 이유가 이것 아니겠는가. 단체 이동이 원활하다는 점. 카델은 더 나은 대책을 찾아내지 못한 세 대대장을 뒤로한 채 부하들을 소집했다.
“동쪽 관문과의 연결이 끊겼어. 최악의 경우 소환진은 완성됐고, 관문은 이미 함락당하는 중일 수도 있다. 도착하자마자 전투할 준비를 해 둬.”
부하들은 카델의 당부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가 작동시킨 이동 관문 너머로 차례차례 넘어갔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루멘. 이동 관문 특유의 발광에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눈꺼풀 안쪽에서 번지는 빛의 잔상을 느끼며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청각.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찰나의 고요를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울리는 정체불명의 진동. 다음으로 돌아온 것은 후각으로, 일순 구역질이 일 만큼 진한 썩은 내가 풍겼다.
카델이 말한 최악의 경우가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한 그가 빠르게 눈을 떴다.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눈앞의 풍경을 담아내며, 무감하던 얼굴에 커다란 동요가 스쳤다.
공포에 질린 기사들의 얼굴과 어떻게든 관문을 막아 내려는 처절한 몸부림. 말라붙다 못해 부패 중인 시체들. 시야를 까맣게 물들이며 비행하는 비현실적인 물량의 벌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밀어 낼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의 생명체. 그것은 세계를 멸망시키러 온 죽음의 사자 같기도, 희망을 짓밟는 무한한 절망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태양마저 가려 낸 그 광대한 몸뚱이를 올려다본 루멘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은 영원을 사는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