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불찰입니다.”
데릭은 동맹국에 제국의 현 상황을 알리고, 화염 속성 마법사를 포함한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막 깨어나 경황이 없는 상태임에도 카델의 짧은 설명에 의지해 급한 일을 처리한 데릭은, 제 앞에 고개 숙인 카델을 말없이 응시했다.
카델의 능력을 믿고 모든 병력을 제국 안에 들여 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국이 통째로 얼어 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지금도 이 사태의 원흉인 요정과 어렵사리 마법을 깬 카델, 그가 가장 먼저 구해 낸 저를 제외하곤 전부 얼어 있을 것이다. 카델이 최소한의 방어막을 깔아 두었다지만, 동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지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요정을 전투에서 제외시키게.”
그랬기에 데릭의 명령은 타당했다. 천만다행으로 요정의 마법은 제국뿐 아니라 제국을 공격하던 마족과 마법진까지 얼렸다. 하지만 만약 요정의 마법이 불특정 다수를 얼리는 데서 그쳤다면? 마족이 아닌 제국의 내부만을 얼렸다면? 그 결과는 허망한 몰살로 이어졌으리라.
그런 위험 요소를 두고 볼 순 없었다. 요정 덕에 방어전을 시도라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나,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삼기에 요정의 상태는 너무나 불안정했다.
전쟁에서 빠진다고 징벌을 내릴 것도 아니니, 카델도 아쉬움을 느낄지언정 불만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으나.
“거절하겠습니다, 폐하.”
카델은 숙였던 고개를 세우곤 데릭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를 향한 시선에선 반항에 가까운 불온한 감정마저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사태를 보고도 거절을 입에 담는가? 간신히 최악을 면했다는 것을 그대도 알 텐데.”
“말씀드렸다시피, 라이돈의 마력이 폭주한 것은 제 불찰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겠습니다.”
“폭주는 그대 홀로 다짐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닐세. 혹여 요정이 전투에서 제외되어 불이익을 얻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라이돈은 적린 기사단에도, 이 전쟁에서도 빠져선 안 될 중요한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라이돈의 마법으로 목숨을 잃은 아군은 없죠. 오히려 모두가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습니까.”
“결과론만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닐세. 요정이 빠진다면 분명 전력 측면에선 큰 손해를 보겠지만, 이 전쟁은 무엇보다 인간계의 보전이―.”
“제가 세계를 구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꼭 라이돈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군.”
카델은 황제의 말을 뚝뚝 끊어 먹으며 결코 라이돈을 전력에서 제외하지 않겠노라는 의지를 보였다. 전세뿐 아니라 정세 파악에도 두각을 보이는 사내다. 앞뒤를 살필 줄 알고, 흐름을 날카롭게 감지하며,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카델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처럼 격양된 태도로 황제의 명을 거절했다.
“전 한 명의 부하도 이 전쟁에서 빠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폐하. 당장 제 지위를 박탈하고 지하 감옥으로 끌어내리신다 해도, 제 부하들은 계속 싸울 수 있도록 해 주십쇼.”
“…….”
“폐하와 제 조부님의 과거에 대고 간청드리겠습니다.”
맞다. 이것은 고집이었다. 다만 모두와 함께 스토리의 끝을 보겠다는 의지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마침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대도, 끝내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그들을 위한 유산. 그 유산을 지키기 위한 광적인 집착에 가까웠다.
그는 라이돈에게 요정족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를 위해선 라이돈 역시 이 전투에서 활약해야 했다. 비록 첫 단추부터 삐끗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황제의 입김으로 어떻게든 해결이 될 테다.
황제에겐 안된 소리지만, 자신에게 있어 이 싸움은 제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 순위는 언제나 부하들이었다. 라이돈이 또 한 번 폭주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대도, 자신은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족이 전부 이쪽에 몰린 덕에 다른 나라들은 제법 여유를 되찾은 모양이더군. 늦어도 두 시간 내엔 지원군이 도착할 것 같다고 하니, 그들이 제국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마법을 조절하게.”
그리고 데릭에게는 젠가 라이토스를 빼닮은 카델의 뜻을 억지로 굽힐 힘이 없었다. 결국 카델의 고집을 받아들인 데릭이 말하자, 정중하게 인사한 카델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동 마법진을 발동했다.
도착한 곳은 라이돈의 곁이 아니었다. 카델은 화염 마력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여전히 얼어붙은 부하들. 쿤라의 힘을 회수할 때 자신과 가까이 있던 부하들이 가장 먼저 상당량의 보호막을 빼앗겼다.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어서 녹여 주어야 했다.
강한 열기를 얇게 퍼뜨려 조금씩 얼음을 녹여 냈다. 혹여라도 화상을 입을까 주의하며 마력을 운용하자, 부하들의 발밑으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이니 작은 부상 정도는 감안하고 빠르게 해동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카델은 도자기라도 빚듯 신중하게 얼음만을 녹여 내려 애썼다. 그렇게 카델이 강추위 속 식은땀까지 흘리며 힘을 낸 결과.
“단장!”
가장 먼저 의식을 되찾은 반이 아직 덜 녹은 몸을 덜그럭거리며 카델에게 달려왔다. 그가 차갑게 언 카델의 뺨을 감싸며 다친 곳이 없나 살펴보는 동안, 요젠과 루멘, 가르엘이 차례차례 깨어났다.
“라이돈 짓이죠? 이렇게 과하게 해낼 줄은 몰랐는데……. 일단 손부터 줘 봐요. 녹여 줄게요.”
“여러모로 당황스럽군. 내 마지막 기억은 장벽 위였는데 말이야……. 설마 대장이 옮겼을 리는 없고. 라이돈인가?”
“하하, 다행히 경험이 있어서 버틸 만했습니다. 다들 기억 못 하시겠지만, 라이돈 경이 절 얼려 버린 적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꽤 괜찮은 선행 학습이었네요.”
“……전부 멈춰 있네. 신선한 경험이야. 저 멀리 있는 건…… 라이돈인가?”
놀라울 정도로 각자의 할 말만 해 대는 부하들 앞에서, 카델은 지체 없이 계획을 나열했다.
“조금 뒤에 라이돈이 마법 해제를 진행할 거야. 지원군이 도착할 즈음엔 관문 바깥은 확실하게 녹을 테니, 우린 그 전에 미리 마족의 수를 줄여 둬야 해. 가만히 있는 적이니 쉬울 것 같아도, 동결된 마족을 깨뜨리는 건 라이돈의 마법을 부수는 것과 비슷해.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부하들이 마족을 처리하는 동안, 자신은 고위 기사를 녹이고 라이돈과 함께 얼어붙은 마법진 조각을 해제할 작정이었다. 시작부터 몰아치는 일거리에 기력이 쑥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으나, 카델은 의연하게 부하들을 이끌었다.
*
이동 관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온 기사단은 곧 라이돈과 조우할 수 있었다.
“거하게 일 쳐 놓곤 팔자 좋게 쉬고 있는 건가? 반성해라, 요정 놈.”
“흐응, 반은 이게 쉬고 있는걸로 보여? 마법에 문외한이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어때?”
“어디 다친 곳 있습니까, 라이돈 경? 치유해 줄까요?”
“필요 없어.”
라이돈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시비와 장난을 떨쳐 내며 가장 뒤에 있던 카델을 끌어안았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짧은 헤어짐이 무척이나 괴로웠다는 듯 칭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라이돈이 며칠간 얼어 버린 세상에 홀로 남았었다는 걸 전해 들었음에도 부하들은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어떠한 동정의 말도, 걱정도 없다. 야속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사실 그건 라이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본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모두를 기다렸는지 알리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를 묻지 않았다면, 자신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겼을 테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걸까. 그 부분을 찰떡같이 파악해 나름의 배려를 하는 것까지, 정말이지 미련하기 짝이 없는 부하들이었다.
“네 마력은 마법진 조각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자. 내가 주도할 테니까, 넌 옆에서 보조해 줘.”
“응!”
“좋아. 너희는 말했던 대로 마족을 처리해 주고.”
또한 이 모든 싸움은 전부 저 미련한 사내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카델은 곧장 다음 단계의 실행을 위해 움직였다.
붉은 소파 아래, 기다란 자색의 머리칼이 축 늘어졌다. 힘을 뺀 몸과 천장을 향해 꺾인 얼굴에서는 무력감이 비쳤으나, 부릅뜬 두 눈에서는 살벌한 예기가 번뜩였다.
“로렌스 경.”
중얼거림에 가까운 부름에 방 한쪽의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던 로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기를 품은 검은 눈동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로렌스를 따라 움직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 계획의 어느 부분이 잘못됐던 걸까. 어떤 변수가 있었고,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더군요.”
느릿느릿 허리를 세운 그녀가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칼을 정돈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첫째는, 저의 무능입니다. 아버지의 힘을 예상만큼 자유롭게 다룰 수 없었어요. 이 빈약한 몸이 버텨 주질 못했죠. 그 탓에 겨우 재생시킨 대마법진의 상당 부분이 손상됐어요.”
밀랍 인형처럼 하얀 손가락이 머리를 빗질했다. 우아한 손짓을 따라 비단 같은 머리칼이 마디의 사이사이를 간질였다.
“둘째는, 로렌스 경도 아시겠죠. 느끼셨죠? 인간계를 넘어 마계까지 침투했던 그 마력을.”
“예. 정령의 힘이 섞인 마력이었으니, 요정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마족의 힘도 느껴졌습니다.”
정답을 맞힌 학생을 칭찬하듯, 가볍게 손뼉을 친 그녀가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래요. 귀여운 엘비의 힘이었어요. 혹시 엘비가 마계 복귀를 포기한 채 인간을 돕기로 택한 걸까요? 제국을 보호하는 얼음 장벽을 만들고, 대마법진의 조각을 얼어붙이고, 동족들을 해치면서?”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공주님을…… 아니, 폐하를 따랐으니까요.”
“그렇다면 요정의 마력에 엘비의 기운이 섞였던 이유는 뭘까요. 간단하죠. 심장을 먹은 거예요. 제가 아버지의 것을 먹었듯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마력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저보단 훨씬 튼튼한 몸을 가진 요정인 모양이죠.”
자조하듯 미소 짓던 에밀리아가 대번 표정을 굳혔다. 곧게 편 검지로 턱 끝을 톡톡 건드리며, 차게 식은 시선으로 로렌스를 응시했다.
“고위 마족의 심장을 먹으면 생전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죠. 마족이 아닌 다른 종족이 섭취한다면 영구적으로 힘을 흡수할 순 없지만, 단시간 동안 강해질 순 있어요. 그것도 꽤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야만 가능하죠.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고, 미리 엘비의 심장을 챙겨 시기적절한 순간에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요?”
“…….”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마족, 그중에서도 일부 고위 마족밖엔 없어요. 요정은 오래 살았지만, 오랜 세월 저희의 먹잇감에 불과했죠. 혹시, 어떤 멍청이가 먹잇감에게 정보를 흘리고선 그대로 놓쳐 버린 걸까요?”
“……폐하.”
“아니면 로렌스!”
격양된 음성으로 로렌스의 이름을 외친 에밀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씩 퍼지는 마기와 함께 에밀리아의 머리칼이 허공으로 넘실거렸다. 그 모습을 본 로렌스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설마 이 귀한 정보를 가진 고위 마족이 변절해 인간에게 알린 걸까요? 아니! 그럴 리 없죠. 제가 아는 그 어떤 고위 마족도 그리 간단하게 긍지를 내버리진 않아요. 그렇다면 누굴까요? 고위 마족의 피가 섞였으나 긍지는 없는 잡종? 좋아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겠어요. 하지만 누가 그 잡종에게 정보를 흘렸을까요? 아버지? 어머니? 아니면, 그 녀석의 백부?”
“처리하겠나이다.”
“당장.”
위협적으로 다가선 에밀리아가 로렌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우악스럽게 머리를 꺾었다. 제비꽃을 닮은 눈동자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던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정하게 읊조렸다.
“당장 찾아내 죽이세요. 제 완벽한 계획에 경의 귀여운 조카가 두 번 다시 얽히지 못하도록.”
*
대마법진의 조각을 파괴한 뒤, 제국 내 대대장들을 깨웠다. 그들과 힘을 합쳐 관문 바깥의 마족을 처치하는 동안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마법사들은 곧장 제국으로 돌입해 남은 기사들을 녹였고, 나머지 인원은 얼어붙은 마족과 마물을 처리했다.
라이돈은 조언대로 꾸준히 마력을 흘려보내며 폭주를 다스렸다. 그리고 관문 바깥의 적이 2/3 이상 처리되었을 즈음. 대마법 [영구동토]가 해제되며, 제국은 자유를 되찾았다.
제국을 위협하던 적을 모조리 도륙하고, 마법진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 곧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현재 제국의 기사들은 관문 안팎과 수도 라니아에 진을 치고 마계의 움직임을 주시 중이었다.
‘체감상 10년은 늙은 것 같은데.’
카델은 버석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달된 보급품으로 마력도 보충하고, 기력도 회복했다. 적린 기사단이 배정된 남쪽 관문에는 다른 기사와 병사들이 많았으므로, 보초는 그들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휴식하는 것일 뿐일 테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그의 휴식을 돕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는 부하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남쪽 관문에 배정된 타 기사들이 문제였다.
현재 그들과 대기 중인 기사단은 호계 기사단 4대대와 5대대, 그리고 천시 기사단 2대대로,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든 분쟁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옳은 말이었다.
라이돈에게 기묘한 집착을 보이는 4대대의 대장 제리엘, 성격 더러운 5대대의 대장 드레프,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부딪히는 일이 잦았던 천시 기사단까지. 사방에 부하들을 자극할 만한 인물이 넘쳐나는 것이다.
‘일일이 중재하자니 피곤해 죽겠고, 내버려 두자니 내전이라도 일어날 기세고.’
좀전의 아수라장을 떠올린 카델이 오만상을 구겼다.
“흥, 라이돈 경 덕에 방어전이 가능했던 건 인정하오. 하지만 라이돈 경 탓에 제국이 통째로 동사할 뻔한 것도 사실 아니오? 그런데 자중하진 못할망정 사람 면전에다 성가신 인간이니, 무능한 떨거지니, 도무지 반성이란 걸 모르는 것 같군!”
시작은 라이돈에게 껄떡대다 온갖 폭언을 받고 의기소침해진 천시 기사단의 대대장, 피에르 몬스였다. 그가 들으란 듯 라이돈의 험담을 하자, 라이돈 본인도 아닌 제리엘이 튀어나와 눈깔을 뒤집어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