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1화 (321/521)

*

“……너무 위험한 도박입니다.”

발코니의 난간에 기댄 에밀리아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곳에는 인간계에 새긴 것과 똑같은 대마법진의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력을 모조리 먹어 치운 대마법진은 눈부시게 발광했으나, 온전한 소환 포탈이 생겨난 조각은 극히 일부뿐이다. 인간들이 대마법진의 발동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족은 솟구친 마계의 절벽을 타고 올라 직접 상공의 땅을 파냈다. 그 모습이 꼭 통 안에 갇힌 벌레 같았다.

“이 전쟁에 도박은 없어요, 로렌스 경. 승리는 오로지 끝없는 피와 투쟁으로 이루어집니다.”

동족들의 행렬을 지켜보던 에밀리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앞에는 장신의 중년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숙였던 백발 머리를 들어 올리자, 근심에 물든 자줏빛 역안이 드러났다.

“공주님의 의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력을 모두 제국으로 돌린다면 겨우 발동된 대마법진이 힘을 잃게 될 겁니다. 간신히 인간계에 머리를 내민 마계가 가라앉기 시작한다면, 동족뿐 아닌 공주님의 마력까지―”

“제국은 인간계의 중심입니다. 중심을 파괴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침략은 없죠. 게다가 로렌스 경. 경도 함께 듣지 않았나요?”

“…….”

“안타깝게도 마족은 인간에 비해 그 수가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죠. 일당백. 그것이 기본입니다.”

배꼽 앞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에밀리아가 부드럽게 머리를 기울였다. 어두운 마기가 넘실거리는 칙칙한 풍경 속, 하얗고 가녀린 에밀리아는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런 마족을 순식간에 넷이나 해치웠습니다. 고작 한 명의 마법사가요. 또한 로렌스 경. 그곳에는 강력한 마기로 인간을 치유하는 혼혈 마족이 있다고 합니다.”

에밀리아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한 미소였으나, 그녀의 분위기는 결코 유순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로렌스를 훑어 내렸다.

“……책임지고 제거하겠나이다.”

“일어나세요. 타박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었습니다.”

로렌스가 용서를 구하듯 조심스럽게 일어서자, 에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파악되지 않은 전력이 마계의 부활을 위협하고, 마침 그들은 가장 처절하게 무너뜨려야 할 제국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바깥의 전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제국을 무너뜨릴 겁니다.”

“공주님의 뜻을 받듭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로렌스 경. 간신히 여유를 찾은 인간들은 어떻게든 대마법진을 파괴하려 들겠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청순한 외모 뒤에 숨겨진 지극히 계산적인 면모. 그것이 로렌스가 에밀리아를 따르기로 한 이유였다. 그녀에게는 지독한 각오와 악독하기까지 한 행동력이 있다.

“아버지의 힘을 사용할 거예요. 그 누구도 마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상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어.’

떠들썩한 부하들의 틈에서, 카델은 홀로 진지하게 시스템 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09%」

「인간계 침략 진행도 : 72%」

마계 소환 진행도가 과하게 낮아졌다. 물론 그것은 아군이 대마법진을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기뻐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침략 진행도였다.

‘정상적인 전투를 하고 있다면 소환 진행도와 침략 진행도는 비례하게 줄어들어야 해. 대마법진을 사수하려는 마족들을 해치우면서 마법진 조각을 파괴해야 하니까.’

배치된 마법사들이 강력해 마족 토벌보다 마법진의 파괴가 더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강력한 마법사가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을 리는 없었다. 보통의 진행도라면 마족과의 정면충돌을 감당하느라 더디게 감소하거나, 마족의 기세에 휩쓸려 간헐적으로 상승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소환 진행도가 폭락했고, 침략 진행도는 미세하게 상승했어. 이유가 뭐지?’

침략 진행도가 상승했는데 소환 진행도는 감소하다니. 오히려 둘 다 줄어들었다면 이토록 신경이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전투를…… 하지 않고 있는 건가?’

시스템 창에 표기된 침략 진행도는 아군의 피해량을 알려 준다기보다는, 인간계 잔류 마족의 숫자를 나타낸다고 보는 쪽이 옳았다. 그러니 현재 상황을 짐작해 보자면.

‘마족은 마법진을 건들지 않고 있어. 아군은 그 틈에 마법진 파괴에 박차를 가한 거고.’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문제. 마족은 어째서 마법진을 방치하는가. 인간들의 맹공에 기가 꺾여 퇴각을 꾀하는 중이다……라는 가정은 터무니없다. 우수한 고위 마족이 올 때까지 대기하다 일망타진할 계획인 걸까? 아니면, 다수의 마족이 모여야 실행 가능한 기술이라도?

“……아오, 머리 아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카델이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그 히스테릭한 외침에 가까이 있던 가르엘이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아파요? 치유술 써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울로]에선 뭐 별다른 지원 요청 없어?”

“흐음, 다시 확인해 볼게요.”

가르엘이 [울로]를 작동시키자, 제국 기사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긴 호계 기사단 2대대. 적이 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여유 있는 구역은 동쪽 관문으로 마법사를 지원해 주십시오.]

[여긴 메이샤 숲! 병력 보충이 필요합니다. 치유사와 추가 병력을 요청합니다!]

[천시 기사단 4대대, 1대대와 합류합니다. 적이 북부 관문에 집결했으니 도시 내 병력은 주민을 대피시키십쇼.]

사방에서 지원 요청이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제국 내부와 달리, 관문 바깥쪽은 여전히 전투에 한창인 듯했다.

“너무 여러 군데에서 요청을 보내네요. 이거야 원, 한 명씩 찢어져서 가 줄 수도 없고.”

이쪽이야 정예 기사단이니 한 명의 존재만으로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간 중요한 때에 서로를 돕지 못할 수 있었다.

“일단은 대기해. 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 없어. 다른 기사들에게 맡기자고.”

자잘한 지원 요청에 모조리 응수하기에는 이쪽도 체력이라는 게 있다. 제국 내의 보고들에 먼저 귀를 기울이던 카델이 [울로]를 가볍게 건드려 마력을 주입했다. 다른 나라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장 들려오는 외국의 보고들은, 카델은 물론 근처의 부하들까지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는 둥켈하이 남서 관문. 마법진 파괴 완료했습니다. 도주한 마족을 추적 중입니다.]

[스니벡 인테 설원, 잔류 마족 소탕 완료. 부상자들 복귀합니다. 치유사를 대기시켜 주십쇼.]

[켄쟈르 섬, 마법진 파괴 완료했습니다. 마족이 만든 도주용 땅굴 발견. 추적합니다.]

[여기는 화이트 왕국 멜텐 산. 추격 중이던 마족을 놓쳤습니다. 동쪽으로 이동했으니 해당 방위의 병력은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열띤 전투에 한창인 제국과 달리, 타국의 병력은 침착하게 싸움을 마무리 중이었다. 주의 깊게 [울로]의 음성을 듣던 카델이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마족들이 전부 도주했다고……?”

도주라니. 전쟁에서 병사가 도주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라지만, 상대는 마족이었다. 카델은 숱한 전투로 마족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인간을 앞에 두고 쉬이 물러날 종족이 아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저 많은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족이 달아났다는 보고가 들려오다니.

“뭔가 이상한데, 대장.”

“그놈들이 도주했을 리가 없어요.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금세 심각해진 루멘과 반이 다가왔다. 카델도 그들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한 건 모든 국가에서 마족이 도주하는 동안, 제국의 마족들은 도망은커녕 더 많은 수가 몰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단장님.”

딱딱하게 굳은 가르엘의 시선만큼, 카델의 낯빛 또한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잠시 앉혔던 몸을 일으키며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적군이 타깃을 좁힌 것 같아. 마족은 도주한 게 아니라, 제국으로 이동하고 있을 뿐인 거지. ……이게 사실이라면 제국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어째서 다른 마법진의 안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제국을 처리하려 드는가. 카델은 자신이 미처 죽이지 못한 고위 마족, 데이아의 존재를 떠올렸다.

‘공중 분해된 게 아니라 마계로 도망쳐 공주에게 정보를 나른 건가.’

이쪽의 위험성을 알린 것이 틀림없다. 단번에 고위 마족 다섯을 죽인 데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힘을 과하게 남용했으니. 견제당해도 할 말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짧은 전투 하나로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다니.’

대마법진을 보전할 다른 수라도 있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술이었지만, 마족은 언제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전 대륙에 퍼져 있던 마족이 제국으로 몰려든다면, 이쪽의 총 전력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어. 동맹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해.”

“하지만 지원을 보낸다고 해도 도착할 때까진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마법사들은 이미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얼마가 걸리더라도 버티는 수밖에. 가르엘! 넌 [울로]로 기사들에게 이상 현상을 전달해. 라이돈, 넌 나랑 성으로 간다.”

카델은 잽싸게 붙어 선 라이돈을 데리고 이동 마법을 전개했다. 제국이 마계의 최우선 타깃이 되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