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성을 겁내지 마! 우리가 맞을 일은 없다! 무시하고 돌격하자고!”
조금 전까지 마족들의 공세에 맥을 못 추리던 병사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그들은 사방으로 뻗쳐 오는 마기를 베어 내며 힘을 합쳐 도시를 방어했다. 안타깝게도 병사들의 공격은 마족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했으나, 상관없었다. 적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공격을 방해하는 것. 그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끄아악!”
“빈센! 제기랄,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은 붉은 마법진.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기함할 만한 양의 마력을 발견했을 때. 그때 바로 몸을 숨겼어야 했다.
라니아를 침략한 고위 마족, 데이아는 차례차례 쓰러져 가는 동족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들이 선 광장은 불바다가 된 지 오래였다. 내리꽂힌 유성이 만든 구덩이는 그들을 고립시켰고, 그 주위로 빈약한 검기가 끝없이 날아들었다.
날개가 있으나 날지 못했다. 떨어지는 유성은 마치 유도탄처럼 그들의 궤적을 좇았다. 처음 비행했던 동족은 궤도를 튼 수십 개의 유성 다발에 맞아 그대로 폭사해 버렸다. 그 간단하고 허망한 죽음을 목도한 후로 한동안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마법이 가능하단 말이야.’
처음엔 다수의 마법사가 모여 개시한 협동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위력이었다. 그들이 파악하기로, 현재 제국에는 저 정도 수준의 광역 마법을 완성할 만한 숫자의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부분의 마법사는 각지에 퍼져 대마법진의 발동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정보가 틀린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제국에 저런 마법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적 마법사는 혼자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모든 유성의 궤적이 일관적이었고,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인간을 모조리 비껴가며 마족만을 노리는 제어력은 어지간히 뜻이 통하는 마법사들을 모아 뒀대도 불가능한 수준.
믿기지 않았다. 너무도 빠르게 쓰러져 가는 동족들의 비명 사이사이, 유성이 만들어 낸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데, 데이아……. 보고를… 공주님께 마법사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양팔이 뜯겨 나간 채 널브러진 빈센이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에 마기의 장막을 펼쳐 필사적으로 유성을 막아 내던 데이아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냔 말이야. 저 빌어먹을 마법은 끝날 기미가 없는데!”
범위와 위력만 보아도 현실감이 없는데, 그 지속력 또한 말이 안 됐다. 유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집요해졌고, 화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었다.
그렇게 데이아가 퇴로 없는 전장에서 조급함만 키우고 있던 때.
“마계에게, 승리를…….”
땅에 처박혀 있던 몸을 뒤집은 빈센이 고개를 꺾었다. 그러자 생명을 갉아 내는 듯한 음침한 신음과 함께, 그의 벌어진 입술 새로 짙은 마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카델의 왼쪽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마법진 조각을 부쉈을 때처럼 동공이 날카롭게 조여져 있었다.
쿤라의 힘이 스며든 눈은 원래의 시력보다 몇십 배는 먼 곳까지 살펴볼 수 있다. 광장과의 거리가 상당함에도 그의 마법이 완벽하게 마족만을 노릴 수 있던 비결이었다.
“……자폭기군.”
작게 중얼거린 카델이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빈센인가. 확실하게 죽여 뒀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목숨줄이 질겼어.’
라니아를 침략한 다섯 마족. 카델은 이미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소르와 베리의 기습 같은 등장이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마주쳐야 했을 적. 빈센, 데이아, 루칸, 스타리, 홀리아르.
마계 전쟁부터는 스테이지의 졸병급도 전부 마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초장부터 쿤라의 힘을 끌어모아 광역기를 난사했다.
성가신 회복술을 가진 루칸을 가장 먼저 해치웠고, 아군 보호에 특화된 홀리아르가 그다음. 광역기가 특기인 스타리, 다음엔 자폭기를 보유한 빈센이 타깃이었다. 빈센은 피가 일정 이하로 깎이면 자폭기가 발동된다. 그 점을 우려해 집중포화를 했지만, 한 끗 차이로 실패한 모양이었다.
“가르엘, 나 대신 대피 지시 좀 내려 줘. 여유 있으면 광역 장막도 만들어 주고. 큰 게 하나 올 거야.”
가르엘에게 [울로]를 던져 준 카델이 하늘을 가린 마법진을 회수했다.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유성에 당황하는 병사들 사이로, 끝이 늘어지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적린 기사단의 무해한 흑마법사입니다. 다들 제 치유술은 잘 받으셨나요? 건강한 몸을 되찾아 드렸으니, 보답으로 지시를 따라 주시죠. 광장에서 멀어지십쇼.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걸 권고드립니다.]
잠시 술렁이던 병사들은 조금씩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의는 여전히 드높았지만, 그런 만큼 절망적이었던 전세를 한 방에 역전시킨 ‘적린 기사단’의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지시에 따른 병사들이 퇴각을 진행하고. 카델은 회수한 마력을 응축해 불의 장막을 생성했다. 아군을 보호하는 장막이 아니었다. 광장을 감싼 돔 형태의 장막. 그것은 적을 ‘가두는’ 장막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데이아까지 한 방에 해치우겠어.’
장막을 뚫지 못한 자폭기는 인간이 아닌 그들의 동족을 쓸어버릴 것이다. 장막 안에서부터 들끓는 마기가 느껴졌다. 뜨거운 용암처럼 튀어 오르는 마기가 금방이라도 카델의 장막을 뚫고 나올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좀 도와드릴까요, 단장님?”
물러나는 병사들의 위로 얇은 마기를 퍼뜨리던 가르엘이 카델을 일별했다. 잠시 침묵하던 카델은 이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가르엘은 그것이 혼자서도 감당이 가능하다는 카델의 자신감이라 여겼으나, 실상은 달랐다.
“……끝났어.”
“음? 생각보다 빠르네요. 역시 우리 유능한 단장님의 시기적절한 대응 덕인가?”
물론 그런 것이라면 더없이 좋겠다만, 틀렸다. 카델은 장막을 해제한 뒤, 광장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폭에 실패한 빈센의 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델의 왼쪽 눈이 게슴츠레 접혔다. 자폭이 실행되기 직전, 빈센은 목숨을 다했다. 힘을 끌어모으다 유명을 달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폭기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 자폭기가 실행되기 직전, 빈센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그런 짓이 가능한 인물은 단 한 명.
‘……데이아가 없다.’
하지만 빈센의 지근거리에서 자폭을 저지했을 데이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막을 뚫고 나갔을 린 없다. 장막을 해제한 뒤에 그가 도망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데이아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금세 심각해진 카델의 뒤편으로, 소르와 베리를 해치우고 돌아온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계 소환 진행도 : 20%」
「인간계 침략 진행도 : 69%」
모든 진행도가 줄어들었다. 대마법진의 파괴도, 마족의 소탕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이 묘한 찝찝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카델은 시야 한편을 차지한 시스템 창에서 어렵사리 시선을 떼어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가벼운 타박상이라도 참지 말고 가르엘한테 치유술 부탁해. 나중에 손톱만 한 흉터라도 발견되면 병상에 묶어 버릴 거니까.”
단장의 추가적인 지휘 없이도 무사히 고위 마족을 해치운 그들이 더없이 자랑스러웠으나,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단호하게 나서지 않으면 피가 철철 흘러도 간지럽다며 넘겨 버릴 녀석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도 마찬가지야, 라이돈.”
“으응?”
“그만 끌어안고 가르엘한테 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달라붙은 라이돈의 팔을 툭툭 건들며 말하자, 순진무구한 표정의 얼굴이 어깨 위로 살포시 얹어졌다.
“난 다친 데 없어. 유능하거든.”
“확실해? 검사했는데 상처 발견하면 화낼 거야.”
“으응, 화내지 마, 카델. 무서워.”
“무서우면 미리미리 치유술을 받아. 언제 다시 마족을 만날지 모른단 말이야.”
담당 구역의 마법진은 해제했고, 도시를 급습한 마족도 토벌했다. 급한 지원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한, 근방을 주시하며 전력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전쟁 중엔 이런 찰나의 소강상태라도 유익하게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카델의 계속된 종용에도 라이돈은 꿈쩍하지 않았다. 본인의 입으론 ‘혈중 카델 농도’가 떨어져 보충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르엘의 치유술을 받기 싫어 고집을 부리는 것이 확실했다.
“안 되죠, 라이돈 경. 그렇게 붙어 계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라이돈의 앞으로 가르엘이 다가왔다. 나머지 동료들의 타박상을 치유한 그는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손바닥을 맞비볐다. 꼭 수완 좋은 사기꾼 같은 모습이었다.
“뭐야? 우리 자기한테 접근하지 마.”
“그럴 순 없어요. 받아야 할 게 있는지라. 그렇죠, 단장님?”
받아야 할 것이라니. 잠시 의아한 얼굴로 가르엘을 바라보던 카델은, 이내 잊고 있던 약속 하나를 떠올렸다.
“네가 응원보다 좋아하는 육체적 접촉이야. 성공하면 한 번 더 해 줄게.”
아. 그거.
“……지금? 여기서?”
“네, 지금. 여기서.”
곤란한 눈빛이 사위를 훑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은 ‘가르엘이 단장에게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까진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뒤에 달라붙은 라이돈은 벌써 불길한 낌새를 느낀 듯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가르엘의 뺨이 아닌 머리카락 한 올에 뽀뽀해 준대도 봉기가 일어날 터였다. 지금껏 부하들의 수많은 견제를 겪어 왔던 카델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좀……. 나중에 해 줄게.”
“그건 곤란합니다. 언제 또 이런 시간이 날 줄 알고요.”
“어, 잠깐……!”
재생 능력이 뛰어난 마족 혼혈에게 동료들의 적의 따윈 별것 아닌 듯했다. 가르엘은 내빼려는 카델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기어코 입을 맞췄다. 뺨이 아닌 입술이었다.
“허……?”
예상되는 아찔한 미래에 질끈 눈을 감아 버린 카델의 뒤편.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카델과 타인의 입맞춤을 직관해 버린 라이돈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돌았나?”
“죽고 싶으면 말로 하셨어야죠, 가르엘 경.”
마치 카델이 짐승의 습격을 받은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반과 루멘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었다. 그들은 가르엘의 치유술을 받아 건강해진 몸으로 양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섰지만, 그보다 라이돈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내 인간한테 무슨 짓이야!”
새빨간 눈을 까뒤집은 그가 맹렬한 기세로 가르엘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마치 두더지 잡기를 연상케 하는 신명 나는 타격에, 가르엘이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너무 진심으로 때리는 거 아닙니까, 라이돈 경? 전 약속된 입맞춤을 받은 것뿐인데요.”
가르엘이 타격 범위 밖으로 벗어나자, 라이돈은 카델까지 밀어 둔 채 그를 쫓아갔다. 반대편에는 반과 루멘이 있었으므로, 가르엘은 금세 포위되어 위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세 남자가 제 눈앞에서 카델의 입술을 빼앗아 간 무뢰한을 응징하는 동안.
“……요젠?”
말없이 다가온 요젠은 카델의 앞에 섰다. 그는 평소와 달리 묘한 성급함이 느껴지는 손길로 카델의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곧 옷 소매를 길게 당겨 카델의 입술을 벅벅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읍…! 요, 요젠? 따가……!”
표피가 벗겨질 듯한 격한 마찰이었다. 불이라도 날 것 같은 쓰라림을 버티다 못한 카델이 요젠의 손목을 움켜쥐자, 그제야 그의 열정적인 움직임이 멈췄다. 벌겋게 부어 버린 카델의 입술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훑어 낸 그가 제법 단호한 투로 말했다.
“앞으론 조심하는 게 좋아.”
“……그래. 두 번 겪었다간 입술 없이 살겠네.”
얼얼하길 넘어 후끈하기까지 한 입술을 더듬던 카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난장판의 원흉은 동료에게 둘러싸인 채 온갖 핍박을 받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웃는 낯인 것을 보니, 어지간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저럴 때 보면 진짜 변태 같다니까.’
저렇게나 매도당하는 게 좋을까. 설설 고개를 저으며 부하들의 다툼을 중재하려던 카델이 주춤하며 멈춰 섰다. 느리게 굴러간 시야 속에서, 시스템 창의 수치가 빠르게 변화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11%」
「인간계 침략 진행도 : 71%」
마계 소환 진행도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