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9화 (31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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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제 대검을 가로막은 얼음벽을 노려보았다. 반투명한 얼음벽 너머, 양팔을 교차해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소르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누, 누나…….”

헐떡이는 부름을 따라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동생. 베리가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

“앞을 봐…!”

죽음의 목전에서 돌아온 동생의 귀환을 기뻐할 새도 없이, 기어코 얼음벽을 깨부순 두 검사의 맹공이 이어졌다.

“루멘.”

“……그래.”

정신없이 흩날리는 검기 사이, 반과 루멘의 시선이 짧게 스쳤다. 그들은 좀 전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강철 같은 소르의 몸에 거침없이 검기를 퍼부었고, 서로의 행동반경을 교묘하게 피해 검날을 휘둘렀다.

그런 소르의 위로는 얼음 장막이 생성되고 부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힘이나 아껴!”

소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얼음 장막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날카로운 검격을 막아 내자마자 허물어지는 장막의 모습에, 소르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이대로 버텨야 해. 하필 처음 만난 인간이 이딴 새끼들이라 힘은 좀 쓰겠지만, 조금만 버티면 지원군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그것도 마계의 자유와 명예를 위한 전쟁터. 후퇴라는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대마법진의 발동을 기다리며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다짐하지 않았는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따위 목숨은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이 등신 새끼야! 장막 그만 만들란 소리 안 들려? 진짜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시, 신경 쓰지 말고… 싸워…!”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되살아났으나, 여전히 죽음의 문턱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결국 완벽하게 죽게 될 것이다.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참담한 미래가 소르의 눈앞에 펼쳐졌다.

급해지는 마음을 따라 움직임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베리의 마법이 그녀를 보호했다. 뒤편에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격해지며 피 냄새 또한 짙어졌다.

‘버텨야 해. 버틴다. 내 목숨도, 동생의 목숨도, 마계의 승리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여기서 베리가 죽게 되더라도 나는 계속 싸울 거야.’

흉포하게 벌어진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우렁찬 기합과 함께 뻗어진 정권이 대검의 면을 강타하고. 공격을 정면으로 맞은 반이 충격파에 밀려나며, 뒤편에 있던 루멘까지 휩쓸려 날아갔다.

“…….”

후욱. 후욱.

거친 숨을 고르며 땅에 처박힌 적들을 응시했다. 자욱한 흙먼지 너머, 나동그라진 인간들이 힘겹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거둔 주먹에 얕은 떨림이 더해졌다.

잠시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소르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수보다 적어. 숨어 있나? 아니면, 다른 곳의 전투를 막기 위해 이동했나?’

얼핏 인간들의 통신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두 인간을 쓰러뜨렸음에도 이어지는 공격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그쪽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를 설득하듯 판단을 마친 그녀가 망설임 없이 베리에게로 달려갔다.

“일어나, 이 머저리야!”

“끄윽…….”

축 늘어진 동생을 부축한 소르가 아직도 잠잠한 뒤편을 일별하며 서둘러 반대쪽 길로 이동했다.

“왜 도망치는 거야…!”

“닥쳐.”

“저 자식들이 못 움직이는 사이에 마무리를…….”

“분신한테 얻어터져서 뒈질 뻔한 주제에 왜 계속 아가리를 털어! 그냥 닥치고 다리에 힘이나 줘!”

자꾸만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는 베리가 답답했는지, 소르는 아예 그를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누나?”

“일단 저 새끼들한테서 벗어날 거야. 그다음엔 굴을 파든 동료를 찾든 해서 너부터…….”

거침없이 달려가던 소르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동생을 한 번 흘기고, 가볍게 고쳐 안은 다음, 왠지 모를 의아함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결국 완전히 뜀박질을 멈춘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너 몸이 왜 이렇게 단단해.”

“뭐?”

“뼈밖에 없던 새끼가 왜 갑자기 무거워졌냐고.”

소르의 난데없는 트집 잡기에 베리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려와서 똑바로 서 봐. 확인 좀 해 보자.”

“왜 그래, 갑자기.”

“……내려와.”

받치고 있던 팔을 풀자 베리의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그녀는 베리의 앓는 소리를 무시한 채 그의 상의를 들치려 했다.

“뭐 하는 거야!”

반항하는 베리의 팔을 움켜쥔 그녀가 상의를 훅 벗겨 올렸다. 그리고 그의 몸을 틀어 허리를 확인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살결. 그 위를 쓸어내린 그녀가 살벌하게 식은 눈을 굴려 베리를 바라보았다.

“흉터 어디 갔어, 베리. 네 화상 흉터 말이야.”

분노로 낮게 깔린 음성이 베리를 향했으나, 정작 베리는 좀 전의 당혹스러운 태도를 완전히 지운 채였다. 무표정의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있었어?”

“이……!”

눈앞의 동생은 진짜 동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소르가 서둘러 거리를 벌리려던 순간.

푸슈슉!

소리 소문 없이 뻗쳐 온 암기가, 세 갈래의 창이 되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크학……!”

찔리는 그 찰나에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만큼 말도 안 되게 순도 높은 암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 경악보다 더욱 끔찍하게 그녀를 괴롭힌 것은, 바로 조금씩 흘러내리는 베리의 육체.

허물을 벗듯 녹아내리는 남동생의 모습 아래, 그를 죽인 암살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것임이 확실한 보랏빛 핏물을 뒤집어쓴 채.

바닥에 누워 있던 암살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너지는 소르에게 고개를 고정하곤, 축축하게 젖은 붕대를 느릿느릿 풀어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소르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이내 경악과 배신감, 끔찍한 분노로 점철된 그녀의 얼굴 위로 피에 물든 붕대가 떨어졌다.

“괜찮은 우애였어. 너희가 인간을 죽이려 하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나서는 일은 없었을 텐데.”

요젠은 긴 상흔이 남은 눈꺼풀을 지그시 문지르며 암기를 회수했다. 암기의 창이 사라진 소르의 몸뚱이엔 관통의 흔적만이 남았을 뿐. 이윽고 짧게 경련하던 소르가 긴 날숨과 함께 절명했다.

죽음을 확인한 요젠이 왼쪽 팔을 들자, 소맷자락 안에서부터 작은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드디어 끝났네. 네 암기 냄새에 질식할 뻔했어, 요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암기는 냄새 같은 거 나지 않아.”

“흐응, 나거든. 아주 기분 나쁜 냄새가.”

카델의 명령대로 소르에게 베리의 환상을 보여 줘 전투 의욕을 꺾은 다음, 베리의 환상으로 꾸며진 요젠이 그녀를 처리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라이돈은 암기의 무취를 증명하려는 요젠의 조용한 항변을 무시한 채 본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만 떠들고 따라와. 반이랑 루멘 챙겨서 빨리 우리 자기를 보러 가야겠으니까.”

라이돈과 요젠이 환혹술을 통해 소르를 해치우려 한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반과 루멘은 그녀를 몰아세우며 분별력을 흩뜨렸다. 공격에 당한 척 밀려난 것도 소르의 뒤쪽에 선 요젠의 신호를 따른 것이었다.

“수련하랬더니 살만 찌운 건가? 네 거대한 몸뚱이에 깔린 덕에 온몸이 저릿저릿하군.”

“네놈 연약한 몸뚱이에 대한 불만을 왜 나한테 떠들어 대는 거지? 요령 좋게 피해 보지 그랬어. 그 날파리같이 거슬리던 속도는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내가 피했으면 그 마족이 마음 놓고 도망갔겠어? 뇌에 근육만 찬 건 여전하군.”

“네놈 뇌엔 뭐 얼마나 대단한 게 들었나 한번 까 보자고.”

콧방귀를 뀐 반이 루멘의 머리를 노리며 손을 뻗은 찰나. 짜증 가득한 음성이 두 남자의 대거리를 저지했다.

“지금 상황에서 둘이 싸우고 있는 거야? 우리 자기가 이 꼴을 봤다면 한심하다고 침을 뱉었을 텐데! 무능할 거면 한심하질 말든가, 한심할 거면 무능하지나 말든가. 같이 다니기 창피하니까 둘 중 하나만 해.”

라이돈은 짐짝처럼 들고 온 요젠을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 두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웬일로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들어온 일침이었다. 반과 루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돈에게 타박을 들었다는 데에 충격을 받은 듯 슬그머니 싸움을 멈췄다.

요젠은 의기양양하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라이돈을 뒤로한 채 ‘그림자 분신’을 꺼냈다. 카델의 분신이었다. 암기로 이루어진 분신의 등장에, 떠들썩하던 부하들의 말소리도 줄어들었다.

분신은 양손을 합장하듯 맞댄 채 무언가를 바쁘게 지시하고 있었다. 저것은 카델이 대량의 마력을 운용한 마법을 전개할 때의 자세.

“마족은 확실하게 죽였어. 카델도 한창 전투 중인 것 같으니까, 빨리 라니아로 이동하는 게 좋겠네.”

카델의 상태를 확인한 요젠은 곧장 암기를 퍼뜨려 그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렇게 반, 루멘, 라이돈은 선두에 선 요젠을 따라 카델과 가르엘이 있을 라니아로 향했다.

“이봐, 암살자. 단장의 상태는 어떻지? 다친 데는? 피로도는?”

전투의 여파로 남아 있던 말이 전부 도망쳤기에, 그들은 이동 관문을 넘어선 뒤에도 제 발로 달려가야 했다. 반은 숨 가쁘게 뛰어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카델의 상태를 염려했다. 카델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노심초사한다는 쪽이 옳았다.

처음에는 요젠도 반을 위해 번번이 멈춰 가며 분신을 확인해 주었으나, 이제는 질렸다는 듯 고개만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 무심한 반응에 반이 다시금 요젠을 들볶으려던 때.

“그만 괴롭히지 그래. 어딜 봐도 대장의 위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루멘이 반이 어깨를 툭 치며 하늘을 턱짓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라니아의 초입. 아직은 외곽인지라 중심부의 상황까진 보이지 않았으나, 루멘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반은 빠르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인 거대한 마법진. 그 아래서 쏟아지는 재앙 같은 유성들은, 빈말로라도 위태롭다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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