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5화 (315/521)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빛난다.”

무료하게 감시탑 위에 늘어져 있던 라이돈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따라 뒤에 있던 루멘과 가르엘도 몸을 일으켰다.

“시작되려나 보군요.”

“남은 녀석들을 깨워 오죠.”

루멘은 천막에 있는 반과 요젠을 깨우기 위해 이동했고, 가르엘은 마법진의 이상을 알리기 위해 카델이 맡기고 간 예비용 [울로]를 꺼냈다. 라이돈은 곧장 날개를 펴 마법진 조각으로 향했다.

마법진의 술식을 이룬 선을 따라 노란색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햇살 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빛을 응시하던 라이돈이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마법진 안에서 빠져나올 무언가가 기대된다는 듯 샐쭉 눈꼬리를 휘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잖아. 그만큼 더 재밌게 해 줘야 해?”

빛이 눈부시지도 않은지 한참이나 마법진을 응시하던 라이돈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뭔가를 감지한 듯 눈썹을 까딱인 그가 손을 뻗어 마법진 근처를 더듬고.

“……흐음.”

호기심과 기대가 뒤섞여 있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감돌았다. 땅을 짚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포나 긴장 때문이 아니다. 땅속에서부터 퍼지는 울림. 조금씩 조금씩,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시작되는 울림이 그가 선 지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역겨운 악취.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떼 코끝을 문지른 라이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동료들이 있었다.

라이돈이 짧게 입술을 달싹이자, 순식간에 그와 동료들을 감싸는 얼음 장막이 생성됐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선 지면 위로 얕은 균열이 새겨졌다.

균열은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기사단은 발밑을 쩍쩍 갈라내는 균열을 피해 신속히 몸을 피했으나, 그보다도 균열이 번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라이돈은 동료들을 감싼 장막을 강화하며 무섭게 증식하는 균열을 주시했다. 근원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마법진이었다. 발광은 더욱 심해졌고, 미미하던 진동도 눈에 띄게 거세졌다.

그리고 균열의 틈새로 퍼지는 저것은 분명.

“아하하! 다들 몸에 힘 꽉 줘!”

라이돈의 즐거운 외침과 함께, 폭발처럼 등장한 마기가 거침없이 지면을 깨부쉈다.

콰아아아아―

균열의 틈새를 비집어 뚫은 마기는 어마어마한 압력을 동반하며 솟구쳐 올랐다. 기사단은 갑작스러운 마기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안전지대를 찾아 나섰다.

“크윽…! 무슨 기운이 이렇게…….”

그러나 안전지대를 점하기가 무섭게 마기의 기둥이 범위를 넓혀 왔다. 반은 얼음 장막을 두드리는 마기의 압력을 버티며 턱에 힘을 주었다. 라이돈이 미리 장막을 둘러 주지 않았다면 누구 한 명은 골로 갔을 테다.

“버틸 생각 하지 말고 계속 움직여!”

루멘은 반을 마기의 범위 바깥으로 밀쳐 내며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곧 그의 시야 속으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가르엘이 들어찼다. 장막은 이미 절반이 깨졌고, 솟구치는 마기에 갈려 나간 어깨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음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늘이던 가르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곧장 루멘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장에겐 연락했습니까?”

다급한 물음에 가르엘은 제 앞에 떠오른 [울로]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답했다.

“아까부터 계속 시도 중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단장님께 이쪽 상황을 알리는 건 어려울 것 같네요. 아니, 알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봐야 하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들어 보세요.”

가르엘이 [울로]의 볼륨을 키우자, 터질 듯한 소음이 연달아 귓가를 울렸다.

[여기는 엔텔로제 섬! 마기가 지면을 박살 냈습니다! 섬이 침몰합니다, 지원을……!]

[여기는 천시 기사단 5대대. 마법진에서 마기가 방출됩니다. 제국의 병사들은 진행 상황을 보고…….]

[호세 산지……. 마기가 산사태를……. 부상자 지원 요청…….]

[젠장! 둥켈하이에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금 마을이 통째로…… 아아악!]

[사, 살려…… 끄아악!]

새된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울로]가 지정한 지역마다 같은 꼴이었다. 카델의 목적지라는 둥켈하이와 스니벡 공국은 이미 난장판이었고, 혹시 몰라 확인한 다른 지역 또한 시끄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통신을 시도해 봤자 이쪽의 보고는 비명에 잡아먹힐 뿐이다.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비명의 향연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다들 비슷한 상황인가 보군요.”

“오히려 여기가 나은 것 같은데. 아직 살려 달라고 빌 만한 수준은 아니잖아.”

마기를 피해 훌쩍 물러난 반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하필 카델과의 연락이 어려울 때 사고가 발생하다니. 언제나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해 지시를 내리던 단장의 부재에 묘한 불안감이 증폭됐다.

“마족이 등장하려는 건가.”

이곳의 마법진 조각까지 발광한다는 것은, 대마법진의 발동이 코앞이거나, 혹은 이미 발동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였다. 발동이 완료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제껏 여러 상황을 대비해 두었음에도 긴장감을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홀로 평정을 지키고 있던 요젠. 그가 말없이 가르엘의 옆으로 다가갔다.

“장막을 둘러 줘.”

“……음? 이미 라이돈 경의 장막을 두르고 있지 않나요?”

“이중으로 둘러 달란 소리야.”

“이런, 꽤 겁이 많은 편인가 보네요. 제 안의 요젠 경의 이미지를 재구축해야…….”

지금처럼 위급할 때마저 헛소리를 늘어놓는 가르엘이 어지간히 짜증스러웠는지, 요젠은 거침없이 단검을 빼 들어 그의 목을 겨눴다.

“어서.”

“협박하실 것까지야.”

흉흉한 기세에 어깨를 으쓱한 가르엘이 빛 마력을 방출해 장막을 둘러 주었다.

“아시다시피 제 장막은 진짜배기 마법사에 비할 게 못 됩니다. 함부로 다루진 말아 주세요.”

“알고 있어.”

이중으로 장막을 두른 요젠이 어딘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마법진. 넓은 균열과 재난 같은 마기가 넘실대는 현장의 한복판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동료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으나, 말리는 이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요젠이었으니까. 그는 결코 허튼짓을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정말이지, 귀찮게 구네!”

상공에서 요젠의 움직임을 포착한 라이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카델이 떠나기 전, 위험을 감지하면 주저 말고 기사단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엄명을 받은 바 있었다. 거기엔 자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동료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두 동료의 장막을 앞세운 요젠이 마법진 바로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암기가 웅덩이처럼 넓게 퍼져 나갔다.

“뭘 하려는 거지……?”

멀리서 보았을 때, 요젠은 마기의 기둥에 둘러싸인 채 가만히 멈춰 있을 뿐이었다. 점점 부피를 넓혀 가는 기둥에 그를 둘러싼 장막이 깎이고 수복되기를 반복했다.

루멘은 여차하면 요젠을 빼내 올 작정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요젠의 행위에 담긴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지하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군.”

대지에 스민 그의 암기는 마기를 내뿜는 구멍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끝 모를 구멍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이 진동의 원인이 마법진이 아닌 지하에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꽤 깊네.’

대량의 암기를 흘려보내고 있음에도 기운은 허공을 더듬으며 낙하할 뿐, 어떠한 형체를 감지하지는 못했다. 요젠은 제 몸을 두른 장막의 강도를 가늠했다. 손상되는 즉시 회복되고는 있으나,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이렇게나 많은 암기를 내보냈음에도 감지되는 것이 없다면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평범한 소환처럼 마법진 바로 위에서 적이 나타나고, 이 진동은 눈속임, 혹은 마법진을 위한 일종의 보호 술식일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한 요젠이 암기를 거두려던 순간.

툭. 투두둑.

맥없이 추락하던 암기가 무언가의 위에 떨어져 부딪혔다. 요젠은 둔탁한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빠르게 암기를 덧대어 ‘그것’의 윤곽을 더듬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확실한 형태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진동의 원인은 분명 이것이다. 지하에서부터 조금씩 상승하며, 기분 나쁜 마기를 뿜어내는 이것은―.

“건물……?”

*

따스한 아침 햇살 아래, 둥켈하이 왕국은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카델은 쿤라의 위에서 그 모든 참극을 지켜보았다. 기울어진 건물들과 안에서부터 급히 뛰쳐나오는 사람들, 밤새 켜 두었던 횃대가 쓰러지며 옮겨붙은 불씨들.

둥켈하이 왕국은 나라 전체가 음산하게 일렁이는 마기로 뒤덮여 있었다. 보랏빛 마기 너머, 불타는 마을과 혼비백산한 백성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리고.

“마계 도시…….”

무너져 내리는 인간들의 땅 위로 고개를 치켜든 새로운 도시. 부서진 지면을 뚫고 첨탑처럼 높다란 건물이 튀어나왔다. 거무죽죽한 건물의 표면에는 보호막처럼 짙은 마기가 둘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계 건물의 옥상, 들춰진 지면 아래, 마기의 기둥 속에서 마물과 마족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군.]

그 모든 풍경을 담아낸 카델의 심장이 거세게 뛰어 댔다. 자다 깬 몽롱한 정신으로 인간계를 뚫고 나온 마계 도시를 발견한 감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설마 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니 참담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기어코 마계 도시가 소환됐다는 건 충격적이지만,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야. 진짜 문제는…….’

마족이든 마계 도시든, 놈들이 행동을 개시했다는 것은 곧 대마법진이 발동된다는 증거였다. 전쟁의 발발. 눈앞의 장면이 전쟁의 신호탄임이 분명함에도, 메인 퀘스트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뜨지 않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쿤라. 당신이 말했었죠. 마계 도시가 소환된다는 건, 그 자체로 놈들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그랬지.]

“……아무래도 싸움을 시작하려면 저 소환부터 막아야 할 것 같네요.”

굳이 쿤라의 예측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계 도시는 이미 등장의 초반부터 한 나라를 엉망으로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그러한 도시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면, 인간들에겐 전투의 기회조차 남지 않으리라.

카델은 서둘러 허리춤에 달린 [울로]를 꺼냈다.

‘대마법진 발동 시의 플랜은 이미 지겹도록 회의했어. 당황하고 있을 마법사들에게 우선순위를 전해야 한다.’

대마법진 발동 시, 정예 마법사들의 최우선순위는 전투도, 민간인 보호도 아닌 마법진 조각의 파괴였다. 빈껍데기였던 대마법진은 발동과 동시에 파괴가 가능한 마력 회로 덩어리가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지의 높고 낮음을 따질 것 없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라면 전부 달려가 마계 도시의 소환을 저지해야 했다. 게다가 대마법진 발동과 동시에 인간계가 허물어지리라 예상한 사람도 적을 테니. 최대한 빠르게 혼란을 잠재워 마법사들이 제대로 행동하기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울로]는 카델이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다.

“뭐야 이거. 다 섞여서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르겠잖아!”

서로서로 지원이 필요하다, 공격을 당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지하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등등 마구잡이로 통신을 해 대는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없었다. 둥켈하이뿐 아니라 다른 구역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위급할 때 지원 요청하라고 보급한 통신기를 이렇게……. 아니, 위급한 상황이긴 한데 말이야.’

하필 한날한시에 모두가 위급해진 게 문제였다. 이런 식이면 아직 마계 도시가 출현하지 않은 구역에 경고를 남길 수도 없게 된다.

‘어떻게 해야…….’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입술을 깨물며 죄 없는 [울로]만 노려보던 카델은, 곧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쿤라! 지금 당장 고요의 산맥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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