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305/521)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일말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프게 하는 것은, 웅크린 채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하는 반의 모습이었다. 그가 이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반…….”

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허리가 접히며 조금씩 격통이 몰아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나아갈수록 반의 떨림이 도드라졌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다, 쇳소리 섞인 신음을 흘렸다. 흐느낌 같기도 했다. 카델은 그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반, 나 좀 봐 줘.”

손을 뻗어 피로 흥건해진 그의 팔을 쥐었다. 그러나 반은 그 손길이 참을 수 없이 역겹다는 듯 거칠게 떨쳐 냈다. 카델을 담아낸 눈동자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라의 소용돌이가 몸집을 불리고 쪼그라들길 반복했다.

“가까이 오지 마.”

“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왜…….”

말을 잇던 반이 와락 표정을 구기며 머리를 감쌌다. 지독한 두통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고통의 원흉은 자신의 존재일지도.

“제발…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영원히 나타나지 마.”

“…….”

“날 그만 괴롭히란 말이야…….”

역시 그를 찾아와선 안 됐나. 그의 뜻을 존중해, 그의 말대로 영원히 눈앞에 나타나선 안 됐나. 괴로워하는 반의 모습에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상태가 심각했다. 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이성으로,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강한 마물에게 습격을 당할 수도 있고, 사고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반은 ‘토벌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을 따른 대가로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다.

“네가 정신 차리면 갈게. 오라를 거둬, 반.”

그의 의식을 온전하게 깨워야 했다. 이미 폭주가 상당히 진행됐다. 예전처럼 물리적 충격만으로 폭주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이 스스로 깨어나기를 돕는 수밖에.

카델은 발작처럼 제 손길을 거부하는 반의 몸부림을 무시했다. 연신 휘청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나 같은 놈 때문에 망가지면 안 돼. 그러기엔 네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

“닥쳐…….”

“카델 라이토스도 이런 모습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닥쳐, 닥쳐……!”

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충혈된 눈을 살벌하게 부라렸다. 지금껏 봐 왔던 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적의와 분노가 넘실댔고,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향했다. 지독히 슬펐으나, 꾹 참아 냈다.

“내가 아니라, 카델 라이토스를 위해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아 줘. 부탁할게.”

자신이 잡아먹은 영혼을 무기 삼아 들이미는 것이 추하게 느껴졌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반은 카델 라이토스를 아주 좋아했으니. 비겁하게 그의 의지를 들먹여서라도 반이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법이 틀린 모양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어.”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강한 악력과 함께 바닥에 처박힌 뒤통수가 얼얼하게 울렸다. 카델의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쥔 반이 빠득, 이를 갈았다. 팽창한 오라가 뿌옇게 주위를 뒤덮었다.

“네가 죽였잖아. 네가 빼앗았잖아. 내 사랑도 충성도 전부, 네가 부쉈잖아.”

“끄윽…….”

“다 망가뜨려 놓은 주제에 어떻게 내가 살기를 바라. 차라리 비웃어. 그딴 위선은 필요 없으니까, 내가 널 마음껏 원망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더 역겹게 굴란 말이야.”

하얗게 질린 손끝이 반의 팔뚝을 긁어냈다. 산소가 통하지 않아 붉어진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였으나, 반에게는 그것을 인지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는 차오르는 분노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눈앞이 다시금 깜깜해졌다. 켜켜이 쌓인 감정이 원망과 증오로 뒤바뀌며, 그 위에 살의가 얹어졌다. 하지만 그의 시야가 완전히 점멸하기 전.

“끄읍… 흣…….”

뜨거운 불꽃이 반의 팔을 달궜다.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아릿한 열감에 목을 조르던 악력이 주춤하고. 카델은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떨쳐 냈다.

카델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귓가를 울렸다. 반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화상 입은 오른팔의 통증과, 제 아래에 깔린 카델의 갈라진 외침뿐이었다.

“난 네가 망가지길 바란 적 없어! 차라리 비웃으라고? 어떻게? 내가 널 어떻게 비웃는데?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가장 처음 사랑한 사람이 너였는데.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다치길 바란 적이 없는데…….”

카델의 떨림이 느껴졌다. 몰아쉬는 숨소리를 따라 격하게 들썩이는 몸과 다친 팔을 감싸 쥐는 온기가 와 닿았다.

“네 마음대로 원망해. 그걸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 더 역겨운 짓도 해 줄게. 그런데 원망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돕지는 않을 거야. 네 말대로 난 네 사랑도 충성도 전부 부쉈으니까. 그거면 된 거 아니야? 나한테 네 목숨까지 뺏어 가라고 하는 거야? 야, 반……. 너무하잖아. 나한테 널 죽이라고 하는 건 진짜 너무하잖아.”

“이미 넌 날 죽인 거나 다름없어. 아니면, 몸이라도 살라고 하는 건가? 너처럼 이미 죽은 영혼을 품고 꼭두각시처럼 살라고?”

“…….”

“끝까지 나를 조롱하려 드는구나. 내가 네 앞에서 어디까지 우스운 꼴이 될 수 있는지 보고 싶은 거야.”

어느샌가 까마득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슬픔에 가까운 절망이 원망과 섞여 울분이 되고, 불행에 담겨 흥건하게 젖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날 버렸어야지. 네가 그 몸을 뺏은 날부터, 내가 널 미워하게 만들었어야지. 그때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해.”

“…….”

“어서.”

메마르고 충혈된 눈이 카델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카델은 그 쓰라린 적의에 애처롭게 반을 응시하다, 이내 맥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해 볼게. 한 번쯤 해 주고 싶던 말이 있었거든. 이걸 들으면 넌 분명히…… 와, 저 미친 새끼. 내가 저런 새끼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니. 이제 저런 정신 나간 새끼랑은 상종을 말아야지…… 할 거야. 너무 어이없어서 죽겠다는 마음도 안 들걸.”

“…….”

“그때 못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말할게.”

팔을 타고 올라온 온기가 이내 뺨을 쓸었다. 괴로울 만큼 익숙한 손길이었다. 거부하듯 고개를 틀자, 물기 섞인 목소리가 낮게 웃었다.

흐리게 번진 시야 속으로 다시금 카델의 윤곽이 잡혔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느리지만 선명하게 돌아왔다.

“나로 다시 시작하면 안 돼?”

그는 웃고 있었다.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라, 나랑……. 나랑 다시 시작하자. 잘해 줄게. 죽을 만큼 노력할게. 네 행복을 위해 살게. 맹세할 수 있어.”

또한 울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으므로.

“나 정말, 정말 많이…… 너를 좋아해.”

온전하게 돌아온 시야 앞에서, 반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좀 줘.”

그는 애걸하고 있었다. 동시에 모든 걸 놓아 버린 듯 체념했고, 그럼에도 뭔가를 고집스레 붙들어 놓아주지 않았다.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행동에 짜증이 치민 걸까. 어쩌면 카델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가 역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가 났다. 원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분노였다.

“너는…….”

씹듯이 중얼거린 그가 카델의 눈을 보았다. 눈물이 고여 투명하게 일렁이는 두 눈을 꼼짝없이 응시하다, 툭 끊어진 이성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놀란 숨소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해진 입술을 세게 씹었다. 그가 아파하기를 바랐다. 움찔거리는 몸을 꾹 짓누르며 그의 등을 받치고, 머리칼을 억세게 움켜쥐어 고개를 꺾었다.

괴로운 신음을 무시한 채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욱여넣었다. 뻑뻑하게 마른 입천장을 훑고, 경직된 혓바닥을 들춰 뿌리를 압박했다. 조심성 없이 흐르는 타액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당황스러운 바둥거림을 즐기듯 제멋대로 유린했다.

그와 통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이것은 일방적인 분노의 표출일 뿐으로, 이로 인해 그가 상처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습게도, 끓어오른 분노는 자신의 등을 감싸는 조심스러운 손길 하나에 무너지고 만다.

“흐읏…….”

그가 자신에게 매달렸으므로, 단단히 버텨 주었다. 입술을 뭉갤 때마다 아파하므로, 상처 난 표피를 살살 쓸어 주었다. 호흡하기를 힘들어하니 중간중간 입술을 떼어 틈을 주고, 머리를 휘어잡는 대신 귓불과 턱을 달래듯 쓸어내렸다.

엉키는 온기와 달뜬 숨소리, 축축한 눈물, 필사적인 매달림. 이 모든 것이 뜨거웠던 고백과 맞물려,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비겁한 욕정이 된다.

자신이 입 맞추는 이는 카델 라이토스가 아님을 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랬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

입술을 떼어 내자 불안한 눈빛이 닿아 왔다. 이대로 자신이 떠나갈까 봐. 그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프다는 듯, 일그러진 눈매가 잘게 떨렸다.

카델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입을 맞추려 들었으나, 반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새로운 눈물이 차오르는 그 서러운 얼굴을 향해 말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짧게 달싹이던 입술은 이내 바라던 답을 내놓는다.

“……네가 필요해, 반.”

그리고…… 결국 이것이었다. 괴물이 되어서까지 죽지 못하고 버티던 이유가, 고작 이것이었다.

너는 나를 우롱했다. 진심을 방치하고, 끝내는 배신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들끓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렇기에 사랑이란 반증일까.

이 눈부시도록 처절한 감정이 귀중하고, 또한 허탈해서. 그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카델의 위로 내려앉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