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4/521)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눈을 뜨면 출처 모를 피바다에 잠겨 있었고, 눈을 감으면 지옥 같은 상념에 파묻혔다. 어느 곳에도 도피처는 없었기에, 오히려 이대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 걸까. 시간 감각도 흐려졌다. 날짜를 새는 건 포기한 지 오래다. 의미가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부러졌군.”

피가 엉겨 붙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무력함이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두 동강 난 검신을 담아냈다. 잡상인에게 웃돈을 주고 구매한 대검이었다. 예기는 없어도 나름 단단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일주일쯤 버텼나.”

얌전히 쓰고 싶어도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날에 이가 나가 있었다. 스스로의 의식도 제어할 수 없는데, 이깟 대검의 안위를 살필 수 있을 리가.

반은 망가진 대검을 망설임 없이 내던졌다. 그러자 둔탁한 마찰음 대신 철벅, 물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피 웅덩이였다. 그의 주위로는 잔인하게 짓이겨진 마물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중간중간 산짐승의 것도 보였다.

그 잔인한 광경을 무심하게 돌아보던 반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

“대, 댁한텐 안 팔겠소.”

신나게 손님을 맞으러 나왔던 무기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반에게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대검 하나를 내 달라는 요구에는 불응했다. 그에 내내 냉랭하던 반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내놔. 네놈 죽이려고 사는 거 아니니까.”

“지금 댁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오? 아무리 장사치라도 나름의 기준이 있소. 미치광이에게는 무기를 팔지 않겠소.”

“……아직은 미치지 않았는데. 진짜 미치광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빨리 내놓는 게 좋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무기상의 귓전을 울렸다. 반이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당장이라도 산 사람을 도륙해 피를 마실 듯이 흉흉한 기세였다.

지척으로 다가온 반이 무기상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자, 무기상이 발작하듯 몸을 떨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은 그런 무기상에게 시선 하나 두지 않은 채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황금색 눈동자가 진열된 무기를 무심하게 훑어내리다, 이내 대검 하나를 발견했다. 덥석 손잡이를 움켜쥔 그가 허락도 없이 대검을 꺼냈다. 남은 손으로 돈주머니가 든 품을 뒤지며 등을 돌리니, 어느샌가 다가온 무기상이 대검을 빼앗으려 들었다.

“파, 팔지 않겠다는 소리 못 들었소!”

“돈 내면 되잖아. 두 배로 쳐주지.”

“필요 없소이다! 당장 내 가게에서 나가시오!”

“…….”

“나가란 말이오!”

무기상의 힘도 만만치 않았으나, 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반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채 악착같이 대검을 뺏으려 드는 무기상을 빤히 응시했다. 언뜻 무감하게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듯했으나.

“……돈 주겠다고 할 때 그냥 팔아.”

버티는 손등에 힘줄이 돋으며, 눈빛이 조금씩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통제하지 못한 오라가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갑작스레 시야를 물들인 붉은 기운에 무기상이 멈칫하고.

“커억!”

돈주머니를 내던진 반이 그대로 무기상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끝을 따라 살갗이 움푹 패며, 한 순간에 산소를 차단당한 무기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반은 괴로움에 바둥거리는 무기상의 목을 조르며 충혈된 눈을 번뜩였다.

“네놈 죽이는 데엔 무기가 필요 없어. 맨손으로도 1분이면 죽일 수 있다고. 그런데 죽이지 않는다잖아. 대검 하나만 팔면 얌전히 떠나겠다잖아.”

“커으윽, 컥…!”

“그렇게 죽고 싶어?”

“파, 파…….”

“뭐라고?”

“파, 팔겠… 팔겠소…….”

“……그래야지.”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뜨릴 듯 옥죄던 악력이 풀렸다. 숨통이 트인 목을 움켜쥔 무기상이 켁켁거리며 몸을 옹송그렸다. 반은 바닥에 버려진 돈주머니를 툭 걷어차 무기상의 앞으로 밀어 두었다.

“세 배 값은 될 거다.”

죄 없는 이를 협박하고 다치게 했으나, 반의 얼굴에선 일말의 죄책감도 비치지 않았다. 되레 부족한 갈증마저 느껴졌다. 이 감정이 범람하기 전에 마을을 떠야 했다.

*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그런 의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궁금해졌다. 물음표를 갈고리 삼아 의식의 수면 위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후회한다. 미치도록 그리우나, 미치도록 원망스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한시도 눈을 뗀 적 없는 얼굴이다. 시선 끝에는 언제나 저 남자가 있었다. 처음엔 호감이었다. 그의 밝음이 좋았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반짝거리는 눈이 좋았다.

그 시선이 저를 향할 때면, 넘쳐흐르는 반짝거림이 운성처럼 자신에게도 쏟아지는 듯했다. 은하수에 몸을 담근 듯한 황홀함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좋았다. 옆에 있고 싶었다.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그의 빛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다음엔 동경이었다. 적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는 모습이 멋있었다. 자신에 비하면 연약하게까지 보이는 체구로 거침없이 돌진하는 등이 멋졌고,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싶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이, 지키는 모습이 그리 멋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자신도 그렇게 비치길 바랐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저 남자를 걱정하게 된 것은. 그를 동경하면서도, 멀뚱히 그의 등을 보는 게 불안해진 것은. 언제나 해맑던 얼굴에서 근심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꾹 참고 나서려는 용기를 발견했을 때는. 그는 여전히 반짝거렸으나, 더 이상 그것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선 반짝거리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저 남자를 사랑했다. 그의 빛이 전부 꺼진대도 기꺼이 품을 수 있었다. 그가 나누어 준 희망을 모조리 되돌려 주고 싶었다. 목숨이 아까워졌다. 자신은 저 남자를 위해 살아야 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언제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미쳐 가면서도 질기게 버티는가.

이제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는 없다. 불쌍한 영혼만 구색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버티고 있는 거지. 이곳엔 자신의 사랑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는데. 피를 보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데.

그런 의문이 겹겹이 쌓일수록,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근육의 박동이 느껴졌고, 온몸을 덥힌 핏물의 역한 악취가 맡아졌고, 마구잡이로 휘두른 대검의 파공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무엇을 베어 내고 있는 걸까. 일부러 사람이 없는 숲에 거처를 잡았다. 마물이 자주 출몰한다는 숲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사람도 오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날뛰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찾아온 곳이었다.

피안개가 낀 것처럼 흐린 시야가 간헐적으로 점멸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베어 낸다는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죽일 것이 없음에도 광란에 빠진 몸뚱어리가 멋대로 날뛰는 중인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괴물같이 느껴졌다. 아니, 이미 괴물이었다. 진즉에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반.”

정말 제대로 미쳐 가고 있는 듯했다. 환청이 들렸다.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다시 한번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미련함이 피어났다.

“반.”

그러자 구질구질한 미련이 또 한 번 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듯, 연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미안해.”

……이건 바란 적 없던 대사다.

“미안해, 반.”

뭔가가 이상했다. 폭주하는 몸과는 다르게 내내 차분했던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점막이라도 낀 듯 뿌옇던 시야가 굼뜨게 돌아왔다.

대검이 보였다. 땅에 처박힌 넓은 날을 타고 뚝뚝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피로 엉망이 된 사람이 누워 있었다. 현실 감각이 흐려졌다. 원래도 없던 현실감이 우주에라도 떨어진 듯 공허하게 흩어졌다.

“내가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다가왔으나,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한 채 맥없이 떨어졌다. 물기 가득한 눈에서 넘치듯 눈물이 흘렀다. 지치지도 않고 흘렀다.

“아프지 말아 줘.”

그 남자였다.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아래서 피로 엉망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왜…….”

카델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느슨하던 신경이 확 조이듯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숨을 몰아쉬며 도망치듯 카델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였다. 이곳은 여전히 숲이었고, 주위에는 어김없이 찢어발겨진 마물의 시체가 낭자했다.

그러니 이것은 현실이다. 하지만 카델은 자신의 현실에 있어선 안 됐다. 떨리는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카델을 훑었다. 그는 피에 젖어 있었다. 마물의 피일까? 그래야 했다. 무조건 그래야 했다. 실수로 피 웅덩이를 밟아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다급한 시선은, 기어코 깊게 갈라진 카델의 옆구리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 미친 듯 흘러나오는 피를 발견한 순간. 반의 눈빛이 탁하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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