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벌어질 마계 전쟁에 앞서, 7대국은 임시일 뿐일지라도 ‘동맹국’이라는 타이틀을 견고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백성들에게 그들이 경쟁 상대가 아닌 힘을 합쳐 싸워야 할 아군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제국은 동맹국의 대표로서 기념 연회를 주최하기로 했다. 급한 일이 있는 몇을 제외한 각국의 수장과 내로라하는 세가,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왔던 기사들과 보좌관이 모조리 참여하는 대규모 연회였다.
연회는 일주일 뒤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카델 또한 초대받은 몸이었기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다른 부하들은 사정을 앞세워 불참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회담에 참석했던 유일한 기사이자 제국 기사단의 단장인 그로서는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수면 시간까지 알뜰살뜰 줄여 가며 쌓인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잔뜩 독기를 품은 채 몰아친 일거리를 모조리 해치우자, 연회까지 딱 하루가 남았다.
이 하루. 이 짧은 하루를 온전히 가지기 위해 개처럼 일했다. 테이론 섬에서 제국으로 복귀하자마자 단단히 벼르고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이 유명한 식당을 통째로 대관하다니. 통이 꽤 크시오.”
“제가 모신 분에 비하면 턱없이 협소하죠. 더 좋은 곳에서 대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국엔 아직 자택이 없는지라.”
싱긋 웃은 카델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윤기 흐르는 흑발과 서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중년 남성. 프로치 도미닉.
“괜찮소. 제국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땅도 얻고, 집도 짓지 않겠소. 어쨌든, 오늘 이렇게 불러 주어 고맙소.”
“저야말로 오늘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미닉 후작님.”
“하하, 연회 전날 부르기에 조금 당황하긴 했으나, 명성 자자한 적린 기사단의 단장이 아니오. 당연히 와야지.”
프로치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귀족 특유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쉽게 말해, 상대를 높여주는 듯하면서도 기저에선 상대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을 보였다.
언뜻 루멘과 비슷한 듯 보이나, 프로치에게선 뱀 같은 속셈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악독함이 있었다.
“이번 파견에서도 고위 마족들을 무사히 소탕했다 들었소. 경의 기사단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군.”
“하나같이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되었으니까요.”
카델은 음식을 가져온 점원에게 손짓해 프로치의 앞에 먼저 접시를 올리게 했다.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금세 테이블을 채웠다.
프로치는 버터에 구운 관자를 한입 크기로 썰며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그 인재들에 루멘도 포함되어 있소?”
카델을 일별한 눈빛에선 잠시나마 날카로운 적의가 엿보였다. 금세 자취를 감춘 감정이었으나, 카델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후작님. 루멘의 검술은 압도적이죠.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기사단에 없어선 안 될 존재예요.”
“……그것참 고마운 소리로군. 아들이 갑자기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기에 많이 놀라기도, 걱정하기도 했거든.”
“제국의 기사가 된 저를 계속 따르겠다 맹세해 주었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죠. 그런 충직하고 뛰어난 아드님을 두어 행복하시겠습니다.”
카델이 직접 와인을 따라 주며 프로치의 안색을 살폈으나, 그의 낯빛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작게 썰어 낸 음식을 우아하게 저작하고, 냅킨으로 입가를 훑었다. 그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카델을 마주 보았다.
“물론 행복하오. 분에 넘치는 자식이지. 그래서 더 아쉽소. 마이뉴 왕국에 충성을 바쳐야 할 도미닉가의 자제가 뒤늦게 바람이 불어 제국으로 옮겨 가다니. 그 덕에 집안이 아주 소란스러워졌거든.”
“……이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루멘의 뜻임을―”
“그 아이가 언젠가 제국의 기사직을 내려놓고 마이뉴 왕국으로 돌아오겠다 한다면, 보내 주시오. 그것이 루멘의 뜻일 테니.”
카델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눈을 내리깔았다. 허벅지에 올려 둔 왼손을 주먹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후작님께선 루멘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버지지 않소. 아들의 마음은 가장 잘 알지.”
힘을 준 입꼬리가 작게 떨렸다. 잠시 경직되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 듯 짧게 숨을 뱉은 카델이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전 루멘을 아주 많이 아낍니다, 후작님. 평생 아쉽지 않게 해 줄 자신이 있어요. 그도 저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요.”
“내 아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소. 경과 함께 싸웠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오.”
“루멘이 가문을 지킬 검으로 남길 바라시는 겁니까?”
태연한 목소리에 처음으로 프로치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그는 당황한 듯 카델을 응시했으나, 카델은 여유롭게 그 시선을 받아 냈다. 어떤 속셈도 엿보이지 않는 표정에 프로치 또한 의심의 눈길을 거뒀다. 물로 입을 축인 그가 빠르게 동요를 감췄다.
“루멘에게 그보다 어울리는 자리는 없지. 아버지로서 아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물론 경의 기사단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은 아니오. 서운하게 듣지 말아 줬으면 하오.”
“서운하다니요. 아버지로서 당연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이죠. ……루멘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까요? 사실 제가 후작님을 뵙고자 한 건 루멘의 일 때문이 아니거든요.”
지금까지의 대화는 별것 아니었다는 듯, 유연하게 주제를 바꾼 카델이 점원을 불러 무언가를 부탁했다.
“루멘의 일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나를 초대한 거요?”
“당연히 후작님의 일 때문이죠.”
“……나의 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호위 기사들에게도 따로 술과 음식을 내오라 일러 두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챙겨 주지 않아도 되오.”
“저 또한 기사의 신분인지라, 그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가 없군요. 그저 그들이 배를 채우길 바랄 뿐입니다. 불쾌하시다면 무르지요.”
“……마음대로 하시오.”
프로치의 허락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점원이 주방에서 완성된 요리와 새로운 와인병을 들고 텅 빈 식당을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이 프로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나의 일이라는 게 무슨 소리오?”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기사 이전에 용병 출신이었습니다. 세계 곳곳을 쏘다니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의뢰라도 해치웠죠.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제법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부패한 귀족이라든가, 방랑 중인 대마법사라든가, 비밀을 떠안은 현자, 혹은…….”
말꼬리를 늘이며 한 모금 와인을 들이켠 카델이 느긋하게 눈을 휘었다.
“영면의 사자를 아십니까?”
“……들어 보았소. 취향 나쁜 살인마가 아니오.”
“예.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취향 나쁜 살인마를 만나는 일도 생기죠.”
여기서 영면의 사자가 화두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지, 프로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숨기듯 의자에 바짝 몸을 붙여 앉았다.
“그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소?”
“악한 귀족만 죽인다고 소문난 암살자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후작님과 연관이 있다니, 말이 안 되죠.”
“그럼 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려서요. 타깃이 되셨다는 걸 미리 알려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뭐라고?”
그리 말하는 카델의 얼굴에선 여전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도통 현실감 없는 이야기에 굳어 있던 프로치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농담이 지나치군.”
“안타깝게도 농담이 아닙니다, 후작님. 영면의 사자에게 직접 들었거든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카델의 말에 담긴 진위를 파악하고, 그가 이 정보를 흘림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새 본래의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온 프로치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나와 거래를 할 작정인가?”
“거래요?”
“자네가 영면의 사자에게 날 타깃 삼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대신, 루멘을 데려가지 말라고? 흥, 웃기는 일이오. 이 사실을 루멘이 알게 된다면, 내 목숨을 두고 이런 거래를 한 자네의 곁을 떠날 거요. 그 아이에게 사실을 밝히기 전에 경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시오.”
당당하고도 칼 같은 태도였다. 그에 카델은 말문을 잃은 채 멍하니 프로치를 응시했다. 그 힘 빠진 모습은 마치 제 수를 간파당해 망연자실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은 프로치가 말문을 이으려던 순간.
“정말 단단히 미치셨군요, 후작.”
“……?”
“하하! 그냥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어. 루멘이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날 떠날 거라고?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돌연 표정을 바꾼 카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배까지 감싼 채 미친 듯이 웃어 대는 모습에 프로치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이게 무슨 행동이지? 카델 경, 무례를 멈추시오.”
그는 카델의 폭소를 멈추려 했으나, 카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난 영면의 사자를 설득할 마음이 없어요. 그냥 당신이 죽게 내버려 둘 거야.”
“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죽일 것 같으니까.”
순간 뚝 끊긴 웃음과 함께, 카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적의와 살기가 넘실거리며, 한순간에 프로치를 압박해 왔다.
“내가 당신에게 하려는 건 거래가 아닙니다. 협박이지. 영면의 사자는 언젠가 반드시 당신을 죽이러 갈 겁니다. 여기서 내가 나설 마음이 있는 건, 그 차례가 조금 뒤로 밀리게 만드는 것뿐이야.”
“감히…….”
“지금부터 당신이 죽을 때까지, 다시는 루멘과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마세요.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당신은 1순위 타깃이 될 테니까.”
“감히 나를 협박하겠다고?”
분을 참지 못하듯 몸을 떤 프로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역시 더는 카델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내 아들을 가지기 위해 날 죽이겠다는 건가?”
“루멘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감히 이 프로치 도미닉을 겁박하다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의 손발을 자른다 한들, 내겐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야!”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네. 이게 쿤라의 기분인가?”
“지금 누구 앞에서 주제 파악을……!”
“그럼 잘라 봐요. 바깥에 있는 기사들 싹 다 모아서 칼 좀 휘둘러 보라고 해.”
충혈된 눈을 흉흉하게 부라리던 프로치가 크게 고함치며 바깥의 기사들을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몇 번을 더 불러도. 프로치의 호위기사들이 들어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프로치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식당의 유일한 출입문을 바라보고. 함께 그곳을 응시한 카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 지금쯤 전부 곯아떨어졌으려나. 맛있는 식사였다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