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열기를 동반한 침묵이 장내를 메웠다. 각국의 수장과 그들의 보좌관은 물론, 카델마저도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한 공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쿠, 쿤라.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요……?”
카델이 원하는 것은 회의를 순탄하게 마무리 지어 모두와 사이좋게 마계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적룡의 두려움을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며 쿤라의 옷깃을 잡아당겼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카델은 갑작스레 제 몸을 뒤덮는 비늘 갑옷을 보며 쿤라의 패악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입이 무겁군. 이 몸의 비늘 한 점만도 못한 앙증맞은 크기의 입들이 보기보다 무거워. 뿐만 아니라 그 솜털처럼 가벼운 머리통도 여전히 꼿꼿하구나. 어째, 직접 꺾어 주랴?”
저 불손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정녕 적룡이란 말인가. 혹시 적룡을 제멋대로 연기하는 어딘가의 망나니는 아닐까. 왕들은 여전히 그런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쿤라는 걸음을 옮겨 그중 한 명의 뒤에 섰다. 미스틱 공국의 트레이 헴블턴 대공. 그는 자신의 뒤에 선 쿤라의 존재를 느끼며 퍼뜩 몸을 틀었으나, 그보다 쿤라의 손이 더 빨랐다. 단숨에 트레이의 목덜미를 낚아챈 쿤라가 손끝에 힘을 주자, 가지런하던 손톱이 자라나며 갈고리처럼 휘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이 몸은 인간의 호통을 싫어한다. 무슨 일을 벌이는지 궁금하다면 정중하게 예를 차려 묻거라.”
“대체 이게 무슨……. 카델 경! 당장 이 무례한 자를 멈추게!”
사색이 된 트레이가 카델을 불렀으나, 카델이라고 별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쿤라는 그의 기사도 아니었으니.
‘저걸 막다가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고 말이야.’
설마 죽이기야 하겠는가. 여기서 쿤라가 적룡의 힘을 증명해 주기만 한다면, 과정이야 어찌 됐든 카델은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경악한 트레이의 앞에서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으, 끄아아! 끄아아악!”
변형된 쿤라의 손아귀에서 용암처럼 새빨간 불꽃이 일렁이더니, 트레이의 살갗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쿤라가 정말 상대를 해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수장들의 낯빛이 파랗게 물들었다. 트레이의 보좌관이 급히 쿤라에게 달려들었으나, 쿤라의 몸에 닿자마자 그의 전신에 불이 붙었다.
끔찍한 비명과 탄내가 진동했다. 회장의 공기는 좀 전보다 수십 배는 뜨겁게 달궈졌고, 열기와 충격을 감당 못 한 사람들의 전신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온통 붉게 달아오른 사람 중, 유일하게 멀쩡한 이는 비늘 갑옷을 두른 카델뿐이었다.
“……카델.”
데릭이 카델을 불렀다. 그의 시선은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트레이와 그의 보좌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처참한 광경이 카델의 계산 속에 들어 있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데릭의 부름에는 그러한 물음이 담겨 있었으나, 카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쿤라가 이런 과격한 방식을 택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제 주제를 알지 못하는 것들과는 할 이야기가 없다. 이대로 전부 죽이면 너희를 대신할 인간들이 나오겠지. 그놈들과도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죽이면 그만이다. 이 몸은 유일하나, 인간은 무수하지 않으냐. 끝없이 죽여도 끝없이 나오니, 마침 징그럽다 느껴지던 참이야.”
그야말로 불지옥 같은 광경에 쿤라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괴기스럽게 뒤섞였다. 산 사람이 타들어 가며 만든 메스꺼운 악취가 뜨거운 공기를 타고 부풀었다.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카델이 헛구역질을 했다.
‘저 미친 새끼, 설마 진짜 죽이려는 거야?’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 라이돈이 있었다면 냉기로 어떻게든 멈춰 보라고 지시했을 텐데. 결국 커지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카델이 쿤라에게 한 걸음 다가간 순간이었다.
“위대하신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닐라가 쿤라의 앞에서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몸은 이미 땀으로 엉망이 되었고, 화상을 입은 피부가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었다.
“저희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인간계는 마계의 침략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적룡이시여.”
그의 정중한 부탁에 금방이라도 트레이의 목을 뽑아낼 듯 억세게 붙들고 있던 쿤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다닐라의 정수리를 응시하던 그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손을 놓았다. 그러자 트레이와 보좌관을 태우던 불꽃이 일시에 사라졌다. 회장을 달구던 뜨거운 공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생각이란 걸 하는 인간이 존재하는군.”
열기에서 해방된 트레이와 보좌관이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괴로운 신음이 들렸지만, 까맣게 탔어야 할 그들의 몸은 불꽃에 휩싸인 적이 없다는 듯 멀쩡하기만 했다. 화상을 입은 다른 사람들의 피부 역시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데릭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쿤라에게 상석을 내어 주었다. 그의 성질머리가 심상치 않으니 최대한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는 판단이 선 듯했다.
쿤라는 아주 당당하게 상석을 빼앗아 앉고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처음보다 숙연해진 분위기. 이젠 감히 쿤라와 눈을 맞추려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쿤라는 그 모습이 매우 흡족하다는 듯 낄낄거렸다.
‘미친놈. 저러고 싶을까.’
쓸데없이 신비로운 쿤라의 옆태를 흘긴 카델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앞에선 그저 제 위대함을 알아 달라며 투덜거리는 꼰대 같기만 했는데.
일부러인지 아닌지,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한 나라 수장의 목숨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행위는 확실히 세계의 최강자가 아니고는 가지기 힘든 담력이긴 했다.
“그래. 이곳에 감히 이 몸의 능력을 믿지 못해 대마법진의 정보를 의심하는 자가 있다고?”
마치 어딘가의 불량배처럼 건들거리며 손을 흔드는 행위에선 ‘나서는 놈은 각오해라’ 정도의 폭력성이 엿보였다. 희번득 눈을 빛내는 쿤라의 험악한 얼굴에, 회장은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
카델의 역할은 마계 대마법진의 존재와 그것이 ‘제2차 마계 전쟁의 신호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수장들이 앞으로의 행보를 정하는 데에는 카델이 필요치 않다. 물론 그렇다고 곧장 회장을 빠져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입만 열면 트집을 잡고 위협해 대는 쿤라의 존재는 명백한 방해물이었다.
때문에 카델은 제 역할을 마치기가 무섭게 쿤라를 끌고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원래 오래 살면 성격이 다 그렇게 돼요?”
객실로 돌아온 카델이 물에 젖은 빨래처럼 의자 위에 늘어졌다. 설명은 대부분 쿤라가 도맡았음에도 기가 빨린 기분이었다.
“질문의 의도가 뭐지? 이 몸의 성격이 왜. 뭐.”
창밖을 내다보던 쿤라가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표정은 불편한 심기를 양껏 드러내고 있었으나, 카델은 그의 기분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폭군이 따로 없던데요. 어디 날건달이라도 하나 들어온 줄 알았잖아요. 그렇게 위대함을 어필해 대면서 위엄을 지킬 마음은 없는 건가.”
“흥, 모르는 소리 하기는.”
“반쪽이가 뭘 알겠어요.”
“거칠게 굴어야 귀찮은 놈들이 들러붙지 않는 법이다.”
아예 카델 쪽으로 몸을 튼 쿤라가 그를 손가락질했다.
“이 몸이 자비롭고 유하게 군다면 네게 접근해 이 몸의 힘을 탐하고자 하는 자들이 생겼겠지. 하지만 방금처럼 위협적으로 날을 세우면, 감히 이 힘을 소유하고 통제하려 들지 못해. 만약 그런 마음을 먹는다 해도 조심스럽게 나설 거다.”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군.”
“그럼 보지 말든가요. 남의 표정에 간섭이야.”
노골적으로 본인을 냉대하는 태도였으나, 쿤라는 좀 전의 괴팍한 반응 대신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 몸은 해 줄 만큼 해 줬다. 남은 건 너희 인간들의 몫이야. 네게 나눠 준 힘으로 잘해 보거라.”
“그동안 당신은 뭘 하게요?”
“나의 것들을 위한 요새를 강화해야지. 인간의 자리는 없으니, 도망쳐 올 생각은 말거라.”
당연히 도망을 목적으로 산을 찾을 생각은 없다. 끈질기게 싸워 퀘스트를 해결하기도 바쁠 텐데 도망칠 틈이 있을 리가. 가볍게 쿤라의 말을 무시한 카델이 눈을 감았다.
이번 회담이 끝나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부하들의 수련을 도울 생각이었다. 회담의 결과에 따라 파견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전쟁에도 대비해야겠지. 여전히 할 일은 차고 넘친다.
‘다른 생각 할 여유는 없어.’
닫힌 눈꺼풀 아래 아른거리는 얼굴을 지워 낸 카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틀 뒤.
하루가 꼬박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회담은, 데릭의 처음 의도대로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첫째로, 각국은 병력을 분산시켜 대마법진의 조각을 탐색 및 확보한다.
둘째로, 확보한 조각에 항상 일정 수의 병력을 포진시켜 마법진의 발동을 주시한다.
셋째로, 각국의 뛰어난 마법사와 공학자를 모아 대마법진의 파훼법을 조사. 알아낸 정보는 즉시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각국은 마계 전쟁이 발발하고 무사히 종전될 때까지 일시적인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제1차 마전 회담은 7대국의 임시 동맹 선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