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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수뇌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회담의 필요성을 느낀다 한들. 한 나라의 수장이 일정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
때문에 정상회담은 황제 데릭 오스마가 초대장을 보낸 지 보름 만에 날짜를 확정 지을 수 있었으며, 일주일간의 논의 끝에 회담 장소를 타협했다.
그렇게 한 달 뒤. 각국의 정상들과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이 제국의 서해안에 위치한 ‘테이론 섬’에 모였다.
‘회담은 한 시간 뒤에 시작인가.’
시계를 확인한 카델이 객실의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적린 기사단장의 신분으로 참석했기에 단복을 갖춰 입은 채였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하들도 없이 혼자 돌아다녀야 한다니. 좀 어색한걸.’
현재 테이론 섬에 머무르는 제국의 기사는 적린 기사단의 단장인 카델,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 소린 살라모와 스무 명의 대원, 천시 기사단의 대대장 메이첼 헤임브룩과 열다섯 명의 대원이 전부였다.
회담 자체가 은밀한 성향이었고, 인원 이동을 최소화해야 껄끄러운 충돌이 생길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포진한 기사들은 전부 내로라하는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국방을 위해 자국에 단장급을 남겨 두었으니, 카델을 제외하곤 실질적 이인자들이 모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속이 안 좋은 것 같아.”
어떤 자리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카델이었으나, 오늘처럼 각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목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까지 덤덤하게 굴기는 어려웠다.
아침을 괜히 먹었나. 더부룩한 속을 달래듯 배를 문지르자, 뒤편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몸 앞에서도 떨지 않으면서 고작 인간들 몇 모인 자리가 긴장된다고? 어이가 없군.”
거울 위로 시선을 움직이자,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심기 불편한 표정을 한 쿤라의 모습이 비쳤다. 진한 적색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는 짜증스레 혀를 차고 있었다.
“그쪽은 한 명이고, 제가 가야 할 곳은 십수 명의 앞이잖습니까.”
“그 십수 명을 수백 번 합쳐도 이 몸의 위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떨어야 할 건 반쪽이, 네가 아니라 그놈들이지. 이번 세대들은 운도 좋군. 이 몸의 인간형을 직접 볼 기회를 얻는 놈은 극히 소수뿐이라고.”
카델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자, 쿤라의 미간이 구겨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카델의 뒤에 섰다.
“이 몸의 위대함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제가 뭘 알겠어요. 다른 세계에서 온 반쪽인데.”
비꼬듯 말하자 쿤라가 작게 웃으며 카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허리를 굽혀 카델과 눈높이를 맞춘 그가 거울에 비친 둘의 모습을 응시하며 말했다.
“넌 이 몸이 마법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되는 모양인데. 진짜 걱정해야 할 건 따로 있을 거다.”
“……그게 뭔데요?”
“넌 다름 아닌 적룡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야. 이 몸이 인간들의 회담에서 그 사실을 밝히며 등장한다면, 지금까지완 비교도 되지 않는 무게의 관심이 쏠리겠지.”
“상관없습니다. 싸움에 방해만 안 되면 돼요. 본인들도 생각이 있으면 마족들이 판을 치는 와중에 이쪽을 건들진 않겠죠.”
덤덤한 어투에 거울 속 카델을 바라보던 쿤라가 호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손을 움직여 카델의 뺨을 움켜쥔 그가 안광을 빛내며 속삭였다.
“인간의 욕심을 얕보지 마라, 반쪽이. 이 몸이 인간이 아닌 세계를 지키는 데엔 다 이유가 있지. 곧 욕심에 눈먼 자들이 목걸이 하나를 가지기 위해 세상을 구할 영웅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저주와도 같은 속삭임이었으나, 쿤라를 응시하는 카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빤히 그를 쳐다보던 카델이 어깨에 올라간 팔을 쳐 내며 구겨진 옷자락을 폈다.
“어차피 당신이 지켜 줄 거잖아요.”
“흠?”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직접 가호를 내린 인간인데. 다른 평범한 놈들에게 쉽게 죽도록 놔둘 리 없죠.”
아닌가요? 그리 묻는 카델의 눈빛에는 쿤라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아닌, 어떠한 체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 흐릿한 감정을 발견한 쿤라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옷을 정리한 카델이 미련 없이 거울 앞을 벗어났다.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등을 좇으며,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쿤라가 낮게 읊조렸다.
“물론 죽게 놔두진 않을 거다. ……네가 맡은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테이론 섬 중앙.
각국의 수장들은 높은 고탑古塔의 꼭대기에 모였다. 호위는 전부 바깥에 포진해 있었고, 보좌관만이 수장의 곁을 지켰다.
7대국의 왕들은 저마다 한 명씩 데려온 보좌관을 뒤에 두어 새로운 정보를 기록할 준비에 한창이었으나, 데릭 오스마는 아니었다. 그는 회담을 주체한 제국의 황제임에도 보좌관을 멀찍이 물려 둔 채 상석에 홀로 앉아 그들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마이뉴 왕국의 ‘엘리야 마이뉴’, 화이트 왕국의 ‘다닐라 화이트’, 미스틱 공국의 ‘트레이 헴블턴’, 둥켈하이 왕국의 ‘드렌 세이즈’, 데번 왕국의 ‘제이토 데번’, 스니벡 공국의 ‘렌 소멀즈’.
대국을 이끄는 수뇌답게 그들의 눈빛에선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 오늘 이들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모였으나, 누구보다 적은 손해를 보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했다. 최소한의 부담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한 나라를 이끄는 왕이라면 그 정도 수완은 내주어야 했다.
물론, 그것은 데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서로 예의상의 덕담과 인사를 나누느라 소란스러웠던 장내의 공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그 흐름을 정확하게 낚아챈 데릭이 회담의 개막을 알렸다.
“지금부터 제1회 마전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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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장의 바로 아래층. 카델은 낡고 오래된 방 안에 홀로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물만 마셔도 체할 만큼 긴장이 됐지만, 막상 일이 코앞에 닥치니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졌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난 내가 황제에게 했던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되니까.’
마른 손바닥을 맞비비고, 이미 식어 버린 차를 몇 모금 들이켰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약 30분.
“따라오시지요, 카델 경.”
황제의 보좌관이 그를 불러냈다.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카델이 보좌관을 따라 탑의 계단을 올랐다. 슬쩍 살핀 보좌관의 안색은 묘하게 지쳐 보였다. 회담이 길어져서라기엔 고작 30분이 흘렀을 뿐이니. 카델은 자신이 예상보다 빨리 불려 가는 이유가 보좌관의 피로와 연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회담장에 들어섬과 동시에 확신이 되었다.
“…….”
싸늘한 정적. 문이 열리고 카델의 모습이 드러나자, 열댓 개의 시선이 단번에 날아 꽂혔다. 그 냉랭한 주목에 잠시 주춤했으나, 카델은 쭈뼛대지 않고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가 선 곳은 황제인 데릭의 옆이었다.
카델을 일별한 데릭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적린 기사단의 단장, 카델 경입니다. 이번 세 차례의 외부 봉인 점검을 통해 마계 대마법진의 존재를 밝힌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데릭의 소개에 카델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으나, 딱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슬쩍 눈을 굴리니 앞쪽에 앉은 다닐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말없이 카델을 바라보던 그가 이어지는 침묵을 깼다.
“카델 경은 화이트 왕국의 영웅이기도 하지요. 뛰어난 능력과 재능, 겸손까지 갖춘 인재이니, 그가 가져온 정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주위의 다른 수장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여전히 대마법진의 존재를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대답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데번 왕국의 국왕, 제이토에게서 나왔다.
“아닙니다. 저는 대마법진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그 마법진이 정말 마계의 마족을 전원 소환할 만큼 대단한 힘을 갖췄는지, 그것이 의심스러운 겁니다. 미완성 마법진인 데다 조각들의 위치도 불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저 어림짐작으로 그 마법진의 위험성을 가늠하고, 불분명한 위협을 막기 위해 각국의 총전력을 당장 외부로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시니……. 곤란할 수밖에요.”
다닐라에게 향했던 시선이 카델에게로 움직였다. 제이토는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카델을 턱짓했다.
“경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어떤 방법으로 대마법진의 용도를 밝혀냈는가?”
곳곳에서 적대적인 눈길이 날아들었다. 그 화살 같은 눈초리를 받아 내며, 카델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 사람들 지금, 제국이 일부러 타국의 전력을 분산시켜서 그 틈에 권력을 장악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건가?’
사실을 알고 있는 카델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오해였으나,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머지않아 두 번째 마계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른다. 그저 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오래된 봉인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정도로 사태를 인식하고 있을 테다.
마계 전쟁을 걱정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하겠으나, 여전히 확신은 없다. 타국끼리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심을 할 필요도 없다. 자신 쪽의 국방만 신경 쓰면 되니까.
하지만 마계 전쟁은 인간끼리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이 힘을 합쳐 마족과 맞서 싸워야 하는 전쟁이다. 본인 조직의 잇속만 챙겨서는 승리할 수 없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쳐 움직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승리 외엔 죽음뿐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카델은 작게 숨을 고르며 옆에 있는 데릭을 일별했다. 쿤라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되도록 마지막까지 미뤄 두고 싶었으나, 이미 이런 식으로 회담의 진행이 막혀 버렸다면 별수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대마법진의 용도를 밝혀낸 건 제가 아닙니다.”
“경이 아니라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계의 대마법진, 그것도 몇 조각에 불과한 일부를 발견한 것뿐이죠. 고작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판별해 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뛰어난 공학자와 마법사가 와도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당당한 발언이었다. 한 점 부끄럼 없는 떳떳한 태도에 냉담하던 회담장이 잠시 술렁였다.
분명 데릭은 대마법진의 힘을 입증해 줄 자를 불러온다고 했다. 카델이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그들의 의문을 충족시켜 줄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불려 온 카델이 용도를 밝혀낸 당사자가 아니라니.
당황하는 수장들의 앞에서, 카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라면 그 일부만으로 해독이 가능할 테죠. 예를 들어…… 적룡. 고서에 기록된 적룡은 천하 만물에 능통하며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적룡이라면 몇 조각의 퍼즐만으로도 전체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룡. 이런 자리에서 언급되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미지의 존재. 소란이 한층 더 거세어졌다. 그중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미스틱 공국의 트레이 헴블턴 대공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경은 지금, 본인이 적룡을 만나기라도 했다는 건가? 어디 산속에서 우연히 꾼 꿈에 등장한 적룡의 말을 계시로 알아들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입을 닫고 돌아가게.”
“산속에서 우연히 꾼 꿈……. 맞습니다. 시작은 분명 그랬죠.”
“허어.”
“저는 고요의 산맥에서 적룡을 조우했고, 그에게 대마법진의 존재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말로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 말한 카델이 걸고 있던 펜던트를 쥐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낮은 공명음과 함께 펜던트에서 새어 나온 붉은 빛이 장내를 물들이고. 눈부심에 잠시 흐려졌던 그들의 시야가 회복된 다음 순간.
“이번 우두머리들은 영 맥아리가 없군. 뭐, 한바탕 전쟁이 인재를 휩쓸고 갔으니 그럴 만도 해. 이해하마. 넓은 아량으로 상대해 줄 테니,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거라.”
인간형의 쿤라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자인가?”
난데없는 등장과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 황제를 밀어내고 본인이 상석에 앉으려는 충격적인 행동까지. 각기 제 국가를 다스리는 수장으로서 경험해 볼 일 없던 무지막지한 행태에,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카델이라고 황제를 밀어내는 망발을 두고 볼 순 없었으므로, 다급히 쿤라를 잡아채 상황의 무마를 시도했다.
“적룡은 여전히 고요의 산맥에 머무르고 있으나, 저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나누어 줬습니다. 지금 앞에 있는 존재는 적룡의 인간형으로, 일종의 사념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적룡……? 저자가 적룡이라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이 그간 듣고 읽은 적룡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지혜로운 권위자였다. 제 영역에 발을 들이는 자를 가차 없이 처단하고, 가끔은 변덕스럽게 지혜를 나누어 인간계의 톱니바퀴를 굴리는. 그런 존재가 한낱 인간에게 힘을 나누어 주었다니?
좀 전보다 거세진 의심은 곧 쿤라에 대한 부정으로 표출되었다.
“저자가 적룡임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소환술이라면 누구든 꾸며 낼 수 있네.”
“참으로 당황스럽군. 저자가 적룡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제국 전체의 문제로 번지게 될 것일세.”
타당한 지적이었다. 본체도 아닌 인간형의 모습이었으니, 저들이 쿤라를 적룡으로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한 의심이었으나, 쿤라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여유롭던 표정에 균열이 일며, 녹색 눈에 흉흉한 안광이 맺혔다.
“저자……? 지금 이 몸을 그리 칭한 것이냐?”
고저 없는 음성이 회장을 낮게 울리며, 쿤라의 전신을 타고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변화에 의심의 말을 내뱉었던 수장들의 안색이 굳었다.
“이 몸이 일개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너희에게 아주 작은 자비를 베풀어 주기 위함이다. 그러니 한 번만 더 말해 주지.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라, 우둔한 미물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