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전魔戰 정상회담.
그것은 일전, 카델이 황제에게 적룡 쿤라의 존재를 밝힌 순간부터 계획된 회담이었다. 카델은 쿤라가 지금까지 수집해 왔던 정보와 빙의자인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종합해 황제에게 전달했다.
일개 기사단장이 이런 커다란 정보를 제 손에만 꼭 쥐고 있어 봤자 세계는 알아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정보를 내어 주는 수밖에.
그 결과, 황제는 7대국의 정상을 초대한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고, 카델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그 직후 바로 카델 라이토스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탓에 부하들에게는 한 박자 늦게 알리게 되었지만.
카델은 우선적으로 가르엘과 라이돈에게 회담에서 그가 알리게 될 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현재 곤란에 빠져 있다는 루멘을 찾아갔다.
루멘은 기사단이 묵는 별채 바깥의 수련장에 있었다. 별채에는 적린 기사단이 묵는다지만, 수련장을 이용할 수 있는 인원에는 딱히 제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인지 도착한 수련장에는 루멘 이외의 인물이 잔뜩 모여 있었다.
“저 사람이 루멘 도미닉이라고? ……소문대로 미남이긴 하군.”
“실력도 소문만큼 대단한지 알고 싶은데 말이야.”
“대련을 신청해 보지 그러나.”
“신청했다가 퇴짜 맞은 사람만 한 수레네.”
“전부 거절했단 말인가? 흠……. 어쩌면 실력에 거품이 낀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
마치 잉첸 마을에서 기사단이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주민들 같은 모양새였다. 카델은 둥글게 모인 인파의 중심에서 꿋꿋하게 검을 휘두르는 루멘을 찾아 고개를 빼 들었다. 제법 오랫동안 수련을 한 모양인지,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이 땀에 젖어 있었다.
“마이뉴 왕국에서 그렇게 탐을 냈다던 인재인데, 설마 실력에 거품이 꼈겠어? 남자의 질투는 추하다네.”
“질투는 무슨, 합리적인 의심일 뿐이지. 게다가 보게. 결국 마이뉴 왕국이 아니라 제국에 오지 않았는가. 제국이 마이뉴 왕국보다 뒤떨어진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지만, 왕국이 순순히 인재를 보내 줄 정도면 놔 버려도 상관없는 실력이란 말 아니겠나?”
“……그런가?”
“그렇대도! 호계 기사단 녀석들이 루멘 도미닉의 쾌검을 추켜세우는 것도, 그들보다 적린 기사단이 더 크게 활약했으니 본인들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지. 일부러 과장한 게 틀림없어.”
인파의 벽을 뚫기가 어려웠다. 다들 수련만 하는 근육 돼지들이라 그런가, 카델이 슬쩍 밀어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카델은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등을 쿡쿡 찔러 돌아보게 했다.
“게다가 저 기생오래비 같은 얼굴로 전장을 겪어 봤자 얼마나 겪어…… 응?”
한참 신나게 말을 늘어놓던 남자는 카델이 총 다섯 번을 찔렀을 때야 눈치채고 뒤를 돌았다. 카델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대고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앞으로 나가고 싶어서요.”
“……어? 어어? 혹시…….”
새하얀 단복과 붉은 망토,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과 오묘하고 탁한 빛을 띠는 회색 눈동자. 부드러운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시선이 자신을 천천히 훑어내리자, 남자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저, 적린 기사단의 단장님……!”
“네, 맞습니다. 경은 아마도 천시 기사단 소속인 것 같은데……. 이쪽도 이름을 여쭤볼까요?”
남자의 우렁찬 외침에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의 시선까지 모여들었다. 난데없는 주목에 진땀을 빼던 남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시 기사단 소속, 네펠리 드레이즈라고 합니다.”
“그래요, 네펠리 경. 이제 길을 비켜 주시겠어요?”
한껏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네펠리는 안심하지 못했다. 카델이 타 기사단의 단원인 자신의 이름을 굳이 알아냈다는 데에서 불안을 느낀 탓이었다. 그는 카델에게 길을 터 주는 대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좀 전의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흥분했더니 입이 멋대로 움직여서 그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음? 제가 네펠리 경에게 화를 냈던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사과를 하십니까. 기껏 못 들은 걸로 해 주겠다는데.”
카델은 동네 꼬마를 상대하듯 유순한 얼굴로 네펠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웃음을 쳤다.
“그런데 이게 세 번쨉니다.”
“……예?”
“비키세요. 경의 커다란 몸이 방해됩니다.”
“아아, 네, 죄송합―”
“……아니. 이게 아니지. 자, 이리 오세요! 같이 갑시다, 네펠리 경.”
“카, 카델 단장님?”
길을 터 주려는 네펠리의 팔을 다시 낚아챈 카델이 앞에 있는 기사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중앙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이미 한참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수련을 멈췄던 루멘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멘은 카델과 그가 끌고 온 낯선 기사를 번갈아 보다,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뭐 해, 대장?”
“별거 아냐. 이쪽은 네펠리 경이라고, 너와 대련을 하고 싶으시다길래 직접 데려왔어. 괜찮지?”
“……대련?”
루멘의 냉담한 시선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네펠리를 향했다. 대충 봐도 뭔가 거슬리는 짓을 해서 카델이 끌고 온 것 같은데. 한 번 대련을 받아 주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일일이 거절했었지만, 카델의 부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루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돌리자, 네펠리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카델은 그런 네펠리의 등을 떠밀며 곱상하게 눈을 휘었다.
“실력에 거품 쫙 빼고 상대해 줘. 네펠리 경에게는 네 기생오래비 같은 얼굴의 미인계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니까.”
*
당연한 결과지만, 대련은 루멘의 승리로 끝났다. 대련이라기에도 애매한 것이, 루멘은 특기인 발도술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 찌르기만으로 네펠리를 농락했다.
네펠리도 제국의 기사 자리를 꿰찬 만큼 제법 강한 검사였으나, 모두의 주목 속에서 그 압박감을 이겨 낼 만한 담력은 없어 보였다.
결국 형편없이 패배한 네펠리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고. 카델 역시 모두의 수련을 방해해 미안하다는 진심 없는 사과와 함께 루멘을 데리고 떠났다.
“왜 안 하던 짓을 했어? 눈에 띄는 거 안 좋아하면서.”
정원 벤치에 앉은 루멘이 물통을 꺼내며 말하자, 카델은 지금껏 유지해 왔던 성격 좋은 단장의 허물을 벗고 짜증스레 눈가를 구겼다.
“날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내 부하를 얕보는 건 참을 수 없어. 엉덩이에 불붙여 주려다가 보는 눈이 많아서 참은 거야.”
“……뭐, 그것도 나름 재밌긴 했겠네.”
작게 웃으며 물통을 비워 낸 루멘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카델은 땀에 젖은 루멘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련 되게 열심히 했나 봐.”
“나야 항상 열심이지.”
“정상회담 때문에 그래? 마이뉴 국왕을 대면하는 게 부담스러운 거라면, 그동안 다른 곳에서 지내도 돼.”
“……별로. 그나저나, 대장도 회담에 참석하는 건가? 이쪽엔 적룡이 있으니 발언권을 위해서라도 황제가 데려갈 것 같은데.”
“말 안 해 줘도 잘 아네.”
“이런 일엔 늘상 빠지지 않았잖아.”
루멘은 다 마신 물통을 만지작거리며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카델이 입을 다무니 둘 사이엔 금세 정적이 차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작게 숨을 고른 루멘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회담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되도록 내 쪽엔 오지 마.”
“그게 무슨 소리야?”
“황제 쪽에 계속 붙어 있어도 좋고. 어쨌든 수장들이 전부 돌아갈 때까진 나랑은 접촉하지 않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카델의 물음에도 루멘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히 마이뉴 왕국의 국왕 때문이라기엔 반응이 이상했다. 그리고 카델은 딱히 그쪽 국왕에게 죄지은 기분도 없었다. 뭐라 면박을 준대도 한 귀로 흘려들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카델이 루멘을 안심시키려던 찰나.
“아버지가 오실 거야. 어젯밤에 전보를 받았어.”
뜻밖의 소식이 카델의 입을 막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국왕에게 동행을 부탁했다고 해. 아들인 내가 제국에 있는 데다, 도미닉가는 마이뉴 왕국을 지탱하는 중심 세가이기도 하니. 명분은 충분하겠지.”
그가 왜 제국에 오는가. 그런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카델이 루멘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폐기 처분도 불가능한 불연성 쓰레기가 다시 루멘을 보러 온다고?’
카델은 아직도 프로치 도미닉 암살 작전을 세웠을 당시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멘의 어린 시절을 통째로 앗아 간 구제 불능의 악마. 죽이지 못한다면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카델의 눈빛이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그의 옆에서, 루멘은 자신의 아버지가 카델에게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의도치는 않았으나, 그 은근하게 위축된 태도는 카델의 투쟁심에 불을 붙였다.
“대장만 안 보인다면 아버지는 계속 내 쪽에 붙어 있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며칠만 떨어져 있어 줘.”
“……알겠어, 그럼. 주의할게.”
마족을 해치우고 오니 이젠 인간이 문제였다. 회담 기간 내내 루멘의 옆에서 그를 괴롭히시겠다? 좋다. 자유 찾아 집 떠난 아들을 구질구질하게 붙들겠다면, 이쪽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카델은 남의 가정사엔 전혀 관심 없는 척, 그의 과거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루멘을 안심시키며 프로치 도미닉을 완전히 떨쳐 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