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붙는 시선이야 익숙했다. 그야, 자신은 일평생을 미남으로 살아왔으니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못생겼던 적이 없었다.
이 진실에 기반한 자신감을 지지해 줄 사건은 차고도 넘쳤다. 예를 들어, 성직자인 자신의 앞에서 고해성사는커녕 결혼 타령하는 걸 듣는다든가, ‘가르엘 몬자시를 신에게 빼앗겼다!’라는 터무니없는 시위를 목격한다든가, 하는 것들.
이처럼 화려한 외모로 살다 보면 숨 쉬며 걷기만 해도 온갖 시선들이 모여드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눈초리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반면에 정말 거슬리는 것은…….
“어이, 지금 저 흑마법사 손에서 거무튀튀한 기운을 본 것 같은데. 또 누굴 저주하고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럼 또 누군가 이스턴 꼴이 난다는 거야? 젠장, 대체 왜 황제 폐하의 신성한 거처에 흑마법사가 돌아다니는 거냐고.”
“다 적린 기사단장 때문이잖아. 폐하께서 오냐오냐하니까 정도를 모르고…….”
“네가 가서 한 마디 좀 해 봐.”
“누구. 적린 기사단장한테?”
“저 흑마법사한테!”
“미친놈. 한 소리 했다가 사지가 뒤틀려서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이런 식이다. 카델이 부여한 흑마법사 역할은 자신을 사람들의 의심 속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으나, 그 부작용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이스턴 경은 혼자 낙마해서 다친 걸로 아는데. 이게 언제 내 저주로 인한 부상이 됐지?’
어이가 없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기사가 보였다. 짙은 남색 계열의 단복을 보니 천시 기사단 소속 같았다.
“이, 이쪽을 보잖아!”
“젠장, 눈 마주치지 마! 저주받는다.”
“이미 마주쳤어!”
“그럼 빨리 가서 싹싹 빌어!”
“기사의 긍지가 있지, 어떻게 흑마법사 앞에서 고개를 숙여?”
“그럼 혼자 죽어. 난 간다.”
의리 없는 친구가 빠른 걸음으로 가르엘의 시야를 벗어나자, 혼자 남은 한 명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눈도 못 마주치고 망설이듯 이쪽의 허벅지 부근만 힐끔거리길래, 가르엘은 친히 먼저 다가가 주기로 했다.
“무, 무슨 볼일이라도?”
바로 앞까지 다가갔는데도 남자는 눈을 내리깐 채 가르엘의 신발만 내려다보았다. 몸을 굽혀 억지로 시선을 맞추려 하자, 남자가 파드득 몸을 떨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뭐 하십니까?”
“…….”
“제 얘길 하시는 것 같길래 와 봤는데. 잘못 들은 걸까요?”
“…….”
“이상하네요. 제가 건 저주에 목소리를 뺏는 힘 같은 건 없었는데. 다시 확인해 볼까…….”
놀리듯 채근하니 금세 하얗게 질린 남자가 냅다 허리를 숙였다.
“함부로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주의할 테니, 만약 정말 저주를 거셨다면 거둬 주십쇼…….”
당연하게도, 저주 따위 건 적 없다. 거는 방법도 모르고. 하지만 가르엘은 농담이었음을 순순히 시인하는 대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글쎄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예? 그건……. 저, 저희는 함께 황제 폐하를 모시는 제국의 기사가 아닙니까. 동료끼리 서로를 해치면 곤란…….”
“경이 먼저 저희 단장님을 모함하지 않았습니까. 뭐랬더라. 폐하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감히 주제를 모르고 흑마법사 나부랭이를 들여와 제국 기사단의 기강을 흩트리고 본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니, 그놈의 피를 봐야 속이 풀릴 것 같다……라고 하셨나.”
“비약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습니다!”
남자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탓에 곧장 시선이 마주쳐 버린 남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가르엘은 그런 남자를 응시하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서 억울하시다?”
“……아닙니다. 사과하죠. 다시는 적린 기사단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를…….”
“뭐, 그러죠.”
예상외의 빠른 용서에 남자의 안색이 폈다. 그러나 안도는 찰나일 뿐이었다.
“제가 경에게 건 저주는 3일 후에 저절로 풀릴 겁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하루에 다섯 명씩 총 열다섯 명에게 적린 기사단의 위대한 업적을 퍼뜨리셔야 해요.”
“위대한 업적, 이요……?”
“이를 어길 시엔 수명이 10년 줄어듭니다.”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미 발동한 저주를 거두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보다는 열다섯 명에게 적린 기사단의 업적을 떠드는 게 쉽지 않겠어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가르엘이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걸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사람을 물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경이라면 했을 거예요. 죽을 때 후회하긴 싫거든요.”
뒤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더는 대꾸해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마족 혼혈인 걸 밝히는 쪽이 나았을지도.’
경멸을 받을지언정 저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살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저주라니. 전직 성직자로서 참아 줄 수 없는 모욕이다. 설설 고개를 저은 가르엘은 본래 향하던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카델의 방문 앞.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리려던 가르엘의 손이 멈칫했다. 손바닥을 펼쳐 문 위를 더듬던 그가 가볍게 바람을 불자,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이쪽만 유난히 추운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노크하니 안쪽에서 카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접니다, 단장님.”
“들어와…….”
얼핏 들어도 잔뜩 힘 빠진 목소리였다. 어제 점심부터 소린과 함께 성을 떠나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걱정하며 문을 열자, 상상도 못 한 광경이 펼쳐졌다.
“……단장님?”
“얘 좀 어떻게 해봐, 가르엘. 나 너무 추워…….”
일단, 카델의 방 근처만 춥게 느껴졌던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의 객실은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바닥이고 천장이고 할 것 없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 발을 떼기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유일한 얼음 속성 마법사. 이 황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침대 위에 앉은 카델을 꼭 끌어안은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누워 있었다.
카델은 제 허리를 코알라처럼 끌어안은 라이돈의 뺨을 꼬집으며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거, 거기 있는 이불 좀 가져다줄래?”
카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니, 문 옆에서 구겨진 채 얼어붙은 이불 더미가 보였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 제 역할을 해내진 못할 것 같았다.
이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에 잠시 머뭇거리던 가르엘이 헛웃음과 함께 카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 위에 제 겉옷을 벗어 둘러 주자, 라이돈을 꼬집던 손을 뗀 카델이 필사적으로 옷을 여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라이돈 경이 마력 폭주라도 한 겁니까?”
폭주했다기엔 라이돈의 상태는 심히 멀쩡해 보였으나, 마땅히 짚이는 구석이 없어 그리 물었다. 그러자 카델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나한테 다른 인간 냄새가 난다잖아.”
“다른 인간의 냄새요?”
“당연히 그렇겠지!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고 왔으니까!”
짜증스레 라이돈을 흘긴 카델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자, 라이돈 역시 카델을 노려보았다.
“자기가 바람피워 놓고 왜 날 때려? 화내야 하는 건 나 아니야?”
“누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야!”
“그럼 왜 누구 만나고 왔는지 안 알려 주는데!”
“말하기 애매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거봐! 바람이잖아! 너무해, 카델. 나로는 부족한 거야? 내가 첩까지 봐줬잖아. 이렇게 많이 참아 줬는데도 욕심을 부리다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우는소리를 내는 라이돈의 앞에서, 가르엘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세간에 공개되어선 안 되는 인물을 만나고 온 카델이 비밀을 지키려다 라이돈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어떤 마음인진 알겠는데, 라이돈 경. 이러다가 단장님 감기 걸려요. 그만 화 풀지 그래요?”
“감기 걸리면 방에만 있겠지. 그게 더 좋아.”
“이런, 그런 집착은 상대방을 질리게 하죠. 저야 그 틈에 단장님의 유일한 숨구멍 노릇을 하면서 호감을 쌓을 수 있겠지만, 라이돈 경은 완전히 미운털이 박힐 텐데요?”
“…….”
“이미 한 번 미운털 박힌 전적이 있지 않나요? 그때 호되게 당한 걸로 반성한 줄 알았는데……. 뭐, 기회는 남았어요. 제가 보기에 아직 단장님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 같진 않거든요.”
유들유들하게 라이돈을 구슬리는 가르엘의 능숙함에 카델은 남몰래 감탄했다. 역시 전직 기사단장이라 그런지, 상대를 다루는 게 아주 능숙하다.
이윽고 가르엘에게 설득된 라이돈의 팔에서 조금씩 힘이 풀렸다. 시무룩해진 얼굴이 카델의 허벅지에 뺨을 비비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라이돈의 고집이 한풀 꺾인 것을 감지한 카델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정말 바람 같은 거 아니야, 라이돈. 죽었다 깨도 내가 그 사람들하고 바람피울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피워도 돼.”
“응?”
“다 죽이면 되니까.”
살벌한 발언과는 달리 드러난 표정은 완전한 울상이다. 그 한결같은 어리광에 결국 웃음을 터뜨린 카델이 하얀 뺨을 반죽처럼 문질렀다. 라이돈을 귀여워하는 카델을 바라보던 가르엘도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가면을 벗어 내렸다. 최근엔 도통 보기 힘들었던 단장님의 풀어진 미소이니,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가르엘.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야?”
“……아, 그랬죠.”
처음 이곳에 온 목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가르엘은 벗어 든 가면을 손에 쥔 채 본론을 꺼냈다.
“곧 7대국이 모인 정상회담이 진행될 거란 소문을 들었거든요. 주최국이 오스마 제국이라고 하니, 혹시 단장님도 연관되어 있나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일단 루멘 경은 마이뉴 왕국 때문에 곤란해진 모양이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