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289/521)

“제 조부모와 부모, 형제를 죽인 이는 폐하십니다.”

“제국은 제 혈육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을 통치하실 뿐, 그곳의 무수한 의지까지 마음대로 조종할 순 없으시죠. 제국은 폐하의 것이나, 제국이 폐하인 것은 아닙니다.”

그 당돌하고 직설적인 발언이, 늦어도 한참은 늦은 후회를 몰고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토리 좀 제대로 보고 살걸. 매번 하는 후회였지만, 매번 후회스러웠다.

“네가 신분을 숨기고 제국의 기사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폐하께서 특별히 편의를 봐주신 덕이라고 생각했어. 그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우리를 보살펴 주셨으니까.”

떠올려 보면 그랬다. 자신이 어떤 감언이설을 하더라도 역적의 신분인 이상 황제가 자신을 성내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이유는 하등 없었다. 죽여 없애지 않을 이유는 더더욱. 황제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해로운 암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는 카델을 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기사단원 임명권을 일임한 것만 봐도…….

‘내가 반역을 저지르리란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지. 심지어 이번엔 암살자까지 고용했잖아. 그런데도 별 탈 없이 넘어갔어. ……그 말이 사실인 건가.’

하지만 지하실에서 본인이 젠가 라이토스를 죽였노라 고하는 황제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겁주기 용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나와 봤자 충성을 맹세하려는 이에게 반감만 심어 줄 뿐 아니던가.

뒤늦게 차오르는 온갖 의심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카델은 치미는 한숨을 애써 집어삼키며 새로운 형제들의 배웅을 받았다.

“다음에 또 와야 해, 형! 그땐 나랑도 놀아 줘!”

귀여운 미켈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자, 헬렌도 카델을 안아 왔다.

“자주는 못 보더라도 언제나 널 응원할게, 카델. 다치지 말고, 꼭 무사해야 해.”

“누님도요.”

마지막으론 디오닐이었다. 그는 카델을 숲 바깥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했지만, 카델이 거절했다. 소린이 있으니 괜찮다는 말에 디오닐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네 앞길에 우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 그러니 우리의 만남이 네게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물론이에요, 형님.”

꽉 끌어안고 있던 카델을 놓아준 디오닐이 걱정과 애정이 담긴 표정으로 아쉽게 손을 흔들었다.

짧은 만남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알게 된 ‘형제들’에게 유별난 애착은 생기지 않았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가 사라져도 전쟁으로 되찾게 될 라이토스가의 명맥을 이을 사람은 있겠네.’

야망은 보이지 않고, 척 봐도 다들 순해 빠졌지만. 그들이 되찾을 가문을 망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몇 번씩 뒤를 돌아볼 때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선 형제들이 번번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그들이 작은 점보다도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온 숲에서, 그는 소린을 발견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 있던 소린은 카델을 보자마자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식사가 길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리기에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테다.

“그냥 들어와서 편하게 기다리지 그랬어요. 불편하게.”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 어디 좀 괜찮은 데라도 찾아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든가.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궁상을 떨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이쪽만 나쁜 사람이 될 테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카델을 일별한 소린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시 마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갈 계획인 듯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카델이 불쑥 말했다.

“소린 경은 알고 계셨습니까?”

“뭘 말이지?”

“제 형제들이 살아 있다는 걸요.”

“몰랐다.”

참으로 깔끔한 답이었다. 기다려도 더 덧붙여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황당해진 그가 조금 더 자세히 질문해 보려는데, 그제야 소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알게 됐다. 자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근위대장께서 알려 주셨지. 자네를 이곳으로 안내하라는 명령과 함께.”

“꽤 신뢰받고 있나 보네요.”

“말수가 적기 때문일 뿐이다. 비밀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적다고 여기셨겠지.”

“놀랍진 않으시던가요?”

“놀라웠다.”

“더러운 역적 놈의 반쪽짜리 핏줄이 제국의 기사단장이 된 것도 화가 나는데, 나머지도 멀쩡히 살아남은 꼴을 봤잖아요. 일망타진의 꿈을 꾸진 않았나요?”

결과만 두고 보았을 때, 소린이 자신의 신분을 알아챈 덕에 황제와 대면하고, 무사히 제국의 기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과만 보았을 때다.

소린은 제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타지의 용병을 밀고했다. 그건 의리도, 기사도도 뭣도 없는 행위였다. 딱히 그것에 화가 난 적은 없었으나, 소린의 감정 상태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 물음에 소린은 걸음을 멈췄다. 눈치채지 못한 척 몇 걸음을 앞서가다, 슬쩍 뒤를 돌았다. 보이는 소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모욕이라도 당한 기분인가.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기에 농담으로 무마하려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더러운 역적…….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제 앞이라고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부 밝혀진 뒤 세간의 반응을 미리 볼 수 있을 테니 저로선 좋은 기회인데요. 편하게 말하세요.”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라이토스가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 말하는 소린의 얼굴에선 한 점의 가식도 비치지 않았다. 카델이 의심하듯 눈살을 찌푸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가요? 전 지금껏 소린 경이 황제 폐하께 제 정체를 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게 맞다. 내가 자네를 밀고했지.”

“……앞뒤가 좀 안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라이토스를 기억하고 있기에 자네를 폐하의 앞에 보낸 걸세.”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카델은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소린 경은 참 말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다면 그렇게 뭉텅뭉텅 잘린 말만 내뱉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역적인 라이토스를 싫어하진 않는다는 겁니까? 싫어하진 않아서 일단 폐하께 보내 봤다고? 설마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보낸 건 아니시겠죠.”

소린은 루멘보다도 감정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 그러나 카델은 비웃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자네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지.”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할 문제입니다.”

“드레프에겐 자네의 신분이 드러나 황실이 타격을 입기 전에 폐하께 데려가자고 설명했네. 이러나저러나 죽게 될 테니 일단 끌고 가자고. 자네의 말대로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그 외의 쓸 만한 변명거리를 내놓기가 힘들었거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변명에 불과했네. 나는…… 그날,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날, 그곳. 여전히 부연 설명이 부족한 말이었지만, 카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표정을 굳힌 카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쪽 사람이었습니까?”

“호계 기사단은 언제나 폐하의 사람이지.”

“…….”

“당시의 나는 지금 같은 대대장이 아닌 말단 신입에 불과했고, 호계 기사단의 규모도 크지 않았네. 고작 신입인 내가 그런 곳에 불려 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 맡은 임무래 봤자 피해가 번지지 않게 잘 막으라는 정도였어.”

소린은 차고 온 검집을 힘주어 쥐고는,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되새겼다.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 아비규환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장이었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변 피해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라이토스를 향한 그들의 공격을 방해하는 것뿐이었어. 하지만 소용없었지. 이미 젠가 라이토스는 제국의 역적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냥 두고 봐도 됐을 텐데요. 말 그대로 젠가 라이토스는 역적이고, 라이토스는 역적의 가문이지 않습니까.”

“그때까지도 믿을 수 없었네. 그 사람이 황실에, 아니, 제국에 해가 되는 일을 벌였다는걸. 그리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거든.”

“이상한 점……?”

“함께 갔던 단장님이나 고참 기사들. 그분들이 어느샌가 사라졌었네. 남은 신입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우연히 그분들을 다시 발견했을 때, 그분들의 품에는 낯선 아이들이 들려 있었어. ……누군지는 보지 않았네. 일부러 보지 않았지.”

설마 그 아이들이 카델의 형제들이었던 걸까. 이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걸까.

라이토스가를 지키고 싶었던 거라면 라이토스를 해치는 자들을 저지했어야 한다. 은밀하게 움직여 어린 생존자 몇을 건진다고 무너진 가문이 살아나진 않을 테니까.

소린은 점점 영문을 알 수 없어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식적으로, 그날 라이토스 가문은 한 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고 멸문당했다. 역적의 가문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제국인들은 라이토스를 그리워하지. 그들이 쌓아 온 역사와 그 속에 존재하는 긍지를 기억하거든. ……나라고 다르진 않았네.”

“…….”

“그래서 자네가 나타났을 때, 자네가 라이토스가의 또 다른 생존자라고 판단했을 때. 폐하의 앞에 자네를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 판단이 틀렸다면 자네는 죽게 됐겠지. 그건 인정하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게 결정의 이유일세.”

뜻밖의 비화였다. 디오닐에게서 들은 비화와 어긋나는 곳 없이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목격자와 증인이 전부 존재하는데, 굳이 부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카델 라이토스라면 몰라도, 이쪽은 제삼자인 신여환이니까. 보다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자신을 향한 빤한 시선에도 소린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게선 부족한 언변을 채울 만한 진실함이 존재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과거 폐하와 젠가 라이토스 사이에 우리는 모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뿐이지만……. 나는 자네가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다시 한번 제국에게 라이토스를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과 다를 바 없는 희망도 있어.”

“……소린 경이 그렇게 라이토스가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나는 제국에 충성할 뿐이다. 그 제국을 지키기에 라이토스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다시 걸음을 옮긴 소린이 카델의 뒤에 섰다.

“자네가 이끄는 적린 기사단도 마찬가지네. 앞에서 응원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자네를 이곳에 데려온 책임은 지지.”

짧은 눈 맞춤 끝에, 카델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돌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튼 그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처럼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린 경이 아니었대도 전 제국의 기사가 됐을 테니까. 그러니 오늘 말한 속마음도 계속 혼자 가시고 있으십쇼. 어차피 제겐 들으나 마나 한 소리였으니까요.”

……그런가.

짧게 중얼거린 소린이 천천히 멀어지는 카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자신의 선택이야 어찌 됐든, 그가 제국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운명이었다. 소린은 그의 ‘운명’이 자신의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거대한 운명 앞에 스러지는 한 줌의 재가 된대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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