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8화 (28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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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남자의 절절한 눈빛과 다른 이들의 아련한 반응이 없었더라면, 카델은 이들이 그의 가족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재료가 부족해서 음식이 변변찮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많이 먹어 두렴.”

부드럽게 웨이브 진 엷은 갈색의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갸름한 얼굴형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청순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카델의 앞으로 토끼 고기와 감자 샐러드, 야채 구이를 가득 담아 내밀었다.

“……잘 먹을게요.”

카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자,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같이 만들었어, 형! 많이 먹어!”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금발에 가까운 머리색과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발랄한 외모와 활기찬 태도가 귀여운 아이였다.

고개를 끄덕인 카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기를 썰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저 여자가 카델의 이복 누나인 헬렌 라이토스, 저 남자애는 이복동생인 미켈 라이토스. 그리고 저 남자가…….’

작게 썬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씹으며, 카델이 상석에 앉은 남자를 일별했다. 곧장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먹던 것을 뱉을 뻔했으나, 다행히 사레에 들리는 추한 모습은 피할 수 있었다.

‘디오닐 라이토스.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가문의 명맥을 이을 가능성이 있는 장남인가.’

충격의 연속이었다. 라이토스가에 카델 이외의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건만. 그 생존자들의 거처를 제공한 것이 다름 아닌 황제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황실에게 있어 라이토스가는 쳐 죽여야 할 반란 종자가 아니던가. 그런 반란 종자의 후손을 다른 이도 아닌 제국의 황제가 보호 중이었다. 어쩌면 감시하는 것일 뿐일지 모르나, 죽이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따로 있었다.

‘하나같이 초면이라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야? 카델 라이토스는 서자잖아. 얘네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얘네가 너하고 놀아 줬냐? 응?’

예전엔 그리도 외면하고 싶던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가 간절해졌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색한 사이였대도 가문의 생존자끼리 만난 것이니 반가움을 드러내야 하나? 만에 하나 각별한 사이였다면?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 반응이 미적지근하다고 실망하면 어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고뇌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델 라이토스는 밝은 성격이었으니까, 과거의 관계가 어찌 됐든 살갑게 굴었을 거야. 역시 친밀감을 드러내야……. 아니, 사실 어떻게 굴어도 저 사람들이 내가 빙의자란 사실을 알아챌 순 없을 거 아니야. 못 만난 지 꽤 됐을 테니 성격이 변했다고 둘러댈 수도 있고, 아니면 모험 중에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흐릿하다고…….’

그렇게 카델의 사고 회로가 엉망진창으로 엉켜갈 무렵. 디오닐 라이토스가 입을 열었다.

“카델, 지금 우리의 반응이 어색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넌 어린 시절부터 모두와 교류가 적었으니까.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건 집안의 사정이었을 뿐, 우리는 한 번도 너를 미워한 적이 없다.”

고민하는 카델의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디오닐이 쓴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내려 두었다.

“과거 서운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마. 하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너를 만날 수 있어 진심으로 기쁘다고 생각해. 이젠 몇 남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지 않으냐.”

가족이라.

디오닐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 한 편으로 밀어 두었던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카델 라이토스가 아닌, 신여환의 진짜 가족.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또 라면 끓여 먹은 건 아니지? 그러게 그냥 집 와서 살라니까. 회사에서 그렇게 먼 것도 아니잖니. 다음에 오면 레시피 몇 가지 알려 줄 테니까 배워. 넌 반찬 챙겨 줘도 소용이 없어. 배가 고파야 뭐라도 만들어 먹지.”

매번 전화로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으시던 어머니나.

“회사 일은 괜찮으냐? 다닐 만해? 모름지기 남자란 힘든 일도 버티고 악착같이 이겨 낼 줄 알아야 한다. 고생을 해야 성장도 있는 거지. ……그래도 정 힘들면 그냥 때려치우고 들어와라. 우리가 지금까지 널 20년 넘게 뒷바라지했는데, 고작 몇 년 늘어난다고 대수겠냐.”

투박한 말투로 슬쩍 응원의 말을 건네시던 아버지나.

현실에 치여 살던 때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달려가기보단 홀로 어떻게든 이겨 내 보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도피처로 선택한 게 이 게임이었지.

‘……저 사람들이 내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뭐.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는 알 것 같기도 하네.’

음식을 꼭꼭 씹어 넘긴 카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디오닐에게 부드럽게 미소 짓자, 그 역시 뒤늦게 마주 웃었다.

“음식이 맛있네요.”

작은 칭찬에도 금세 분위기가 날뛰었다. 음식을 만든 헬렌은 뿌듯한 얼굴로 볼을 붉혔고, 미켈은 거보라며 어서 자신이 만든 음식도 먹어 보라 목소리를 높였다.

멸문했다지만 나름 제국을 지탱하던 세가의 자제들이었다. 하지만 식탁에서 느껴져야 할 귀족의 품격이나 자제력은 볼 수 없었다. 누구도 서로를 통제하려 들지 않았고, 수다를 멈추지도 않았다. 카델은 그들의 그런 자유분방함이 싫지 않았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 가던 카델의 시선이 문득 오두막의 문을 향했다. 소린은 이 식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 먹은 게 없어 꽤 출출할 터인데도 일부러 자리를 비워 줬다.

‘소린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제국에 내 존재를 찌른 것도 그 녀석일 텐데.’

어쩌면 그 역시 라이토스가 생존자들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됐을 수도 있다. 관문 전투 당시에는 순수하게 제국의 역적을 끌어내기 위해 행동했던 걸지도.

‘복잡하네.’

게임 스토리를 알고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취해야 할 태도가 명확할 텐데 말이다.

‘뭐, 차차 알게 되겠지.’

결국 이 세계의 핵심은 전쟁이다. 이런 부가적인 비화나 관계들은 그가 가진 목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만약 이 세계에 남기를 택한다면 분명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겠지만, 그런 불확실한 훗날까지 미리 설계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한 시간이 넘는 식사가 끝나고. 카델은 디오닐, 헬렌과 함께 차를 마시며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문에서 새로운 기사단장의 이름을 봤을 땐, 그게 카델 너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저 너무한 우연일 뿐이라고.”

디오닐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그때의 일을 상기하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헬렌은 그런 디오닐의 등을 토닥이며 카델을 돌아보았다.

“어렸을 때도 네가 마법사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췄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다속성 마법사였을 줄이야……. 우리가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 기사에 난 기사단장이 너란 것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헬렌의 앞에서, 카델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뺨을 문질렀다.

‘뭐지? 라이토스가에선 카델이 다속성 마법사인 걸 몰랐어? 그게 말이 되나?’

이 천재적인 재능이 부각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혹시 후천적 재능이었던 걸까.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의심을 살까 두려워 모든 질문을 웃음으로 무마하고 있으려니, 헬렌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리야 너와 가까이 지내지 못하니 정보를 얻으려면 소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집안 어른들 사이에선 너에 대한 이야기가 잘 언급되지 않았잖니. 암묵적인 룰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젠가 조부님 덕에 어느 정도 눈치는 챌 수 있었던 게 다행이지.”

“그렇…군요.”

“젠가 조부님이 널 엄청 아끼셨잖아. 기억하지?”

기억할 리가. 젠가라는 이름도 마밀과의 첫 만남에서 처음 들었고, 이제까지 그가 카델의 조부라는 사실도 몰랐었다. 대충 아버지나 할아버지, 둘 중 한 명일 거라 짐작했을 뿐.

하지만 그런 무지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카델은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입니다, 누님.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요.”

“만약 조부님이 건강하게 살아 계시고, 가문도 예전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면……. 넌 이름을 숨기지 않고 떳떳한 제국의 기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우리도 네 소식에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 거고.”

“그랬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있어 저희가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었다면, 여전히 어색한 사이로 남았겠죠.”

“……그렇겠구나.”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카델을 응시하던 헬렌은, 이내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해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깊구나, 카델은. 단단해 보여서 마음이 놓여. 멀리서 봤던 너는 항상 밝았으니까. 그런 성격의 아이가 그토록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속이 무너졌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괜찮아요, 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 내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고 침착한 아이였어. 이쪽 장남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운 것 같아.”

헬렌이 내내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오닐을 찌르며 놀리듯 웃자, 그제야 디오닐도 입꼬리를 당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기색이었다. 그게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디오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게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카델.”

“……네?”

“난 아직 네가 어떤 결심으로 제국의 기사가 된 건지 알지 못해. 솔직히 말해 짐작도 못 하겠구나. 하지만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설령 그게 복수를 위한 것이래도 나는 네 편이다. 개인적으로라도 지지해 주고 싶어. 하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숨어 살며 목숨만 연명하는 꼴로는, 영원히 도움이 되어 줄 수 없겠지. ……미안하구나.”

디오닐은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듯했고, 그것은 카델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들은 말로 유추해 보자면, 적자들과 서자인 카델 라이토스의 사이는 전혀 가깝지 않았다. 카델 쪽에서 격리된 상태인 듯싶었고,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솔직히 바깥 자식을 친자식처럼 대해 주는 게 쉬울 리 없으니까.

카델은 그들이 여기서 무언가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그러려니 받아들이려는 마음마저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니. 진심인가?’

물론 디오닐은 카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쭉. 하지만 그렇다고 디오닐을 원망하진 않는다. 도움을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착한 건지,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머리를 긁적이며 뻘쭘하게 눈을 굴리던 카델은, 곧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혼자 내린 결정입니다. 오히려 죄송한 건 제 쪽이죠. 멋대로 큰일을 벌였으니까요. 이렇게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했을 겁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그리고 제가 제국의 기사가 된 건 복수라든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에요. 가문의 재기를 위해서죠. 저 한 사람의 노력으로 가문의 구정물을 씻어 낼 수 있다면, 가문의 일원을 몰살한 황제 폐하께라도 머리를 숙일 의향이 있었으니까요.”

이 정도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가족 행세를 할 수 있으려나. 막연히 생각하며 디오닐을 보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안심도 슬픔도 아닌, 의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카델? 폐하가 가문의 일원을 몰살하시다니.”

“말 그대롭니다. 음, 제 말에 어디 틀린 부분이라도…….”

그다음에 떠오른 것은 당혹감으로, 헬렌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디오닐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날 라이토스가의 일원을 죽인 건 황실 사람들이 맞다. 틈을 노린 다른 귀족들도 있었지. 하지만 폐하께선 아니셨어. 그분은 우리를 지켜 주셨다.”

“예? 하지만 방금 황실 사람들이 죽였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땐 나도 어렸을 때라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만, 당시의 황실은 마계 전쟁의 여파가 남아 권력이 심하게 분산되었다고 했어. 가족들을 죽인 건 황실 사람이 분명하지만, 폐하의 사람은 아니었지. 그 증거가 우리이지 않으냐.”

디오닐은 갑작스러운 타격에 굳어 버린 카델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의 말이 카델에게 혼란을 안길까 걱정되었으나, 숨겨서는 안 되는 정보라고 여겼기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폐하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여태껏 정체를 숨기고 살 수 있었다. 난 네가 어떻게 가문을 도망쳐 나왔는지 몰라. 그래서 네가 우리와 다른 걸 봤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하지만……. 폐하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거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텅 빈 머리에 뒤늦게 떠오른 것은, 과거 자신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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