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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이 떠난 뒤, 데릭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회백색의 머리와 권위 넘치는 용모, 검고 깊은 눈빛은 고고한 제국의 황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간계를 아우르는 마계 소환진이라…….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는가.”
그의 표정에선 짙은 근심과 고통이 뒤엉켜 있었다. 되풀이되는 지옥을 자신의 세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도 통탄스러웠다.
하지만 그나마 카델이 있었기에 이런 이른 고민이라도 가능한 것이다. 그가 건넨 정보가 없었다면, 그 정보의 출처가 적룡이 아니었다면. 둘 중 하나라도 빠진 미래는 참담하기만 했으리라.
“너의 피는 여전히 제국을, 나아가 세계를 수호하려 드는구나. 젠가…….”
검은 눈동자에 그리운 상념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 어슴푸레한 기억을 더듬기도 전.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데릭은 방문자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 일렀다.
안으로 들어선 이는 인셀 토트락. 황실 근위대장이었다. 그는 데릭에게 정중히 예를 표한 뒤, 절도 있는 자세를 취했다.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실 것인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폐하.”
“……카델 라이토스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가?”
“예. 부하들과 식사 중입니다.”
“그렇다면 식사가 끝나는 대로 데려가게.”
“소린 살라모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릭이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되네. 소린 살라모와 카델 라이토스. 그 둘만 은밀히 움직일 수 있도록 주의하게. 만약 그들의 존재가 들통난다면, 나로서도 더는 보호할 방도가 없으니.”
덜컹. 덜컹.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내다봤다. 먼 풍경을 보거나, 광활한 하늘을 올려 보며 더부룩한 속을 달래 보려 애를 썼으나.
‘멀미 나…….’
금방이라도 먹은 걸 게워 낼 것 같았다. 카델은 구역질을 참듯 입 안을 짓씹으며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풍경 감상을 포기한 그의 시선이 제 맞은편으로 움직였다.
‘밥 먹자마자 갈 데가 있다면서 끌고 오더니, 여태껏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 주고.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의 앞에는 소린 살라모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 부하를 포함한 어떤 호위 인력도 데려오지 않았기에, 대화 없는 마차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던가. 그 탓에 어떻게든 따라오려는 라이돈을 떼어 내느라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기사단끼리 회의라도 하는 줄 알았다. 마차를 타고 시내를 가로지를 때만 해도 어디 은밀한 지하 회의장을 찾아가는 줄 알았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이는 풍경은 단출해졌고, 인적은 드물어졌다.
이젠 소린이 자신을 어디 양지바른 곳에 묻으러 가는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의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카델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는 소린에게 말했다.
“정말 목적지가 어딘지 알려 주지 않으실 겁니까?”
“도착할 때까진 말해 줄 수 없네.”
“언제 도착하는데요?”
“……앞으로 세 시간 정도.”
“세 시간이요? 지금 한 시간도 넘게 달렸는데요? 대체 어디로 가는 거길래―”
“말해 줄 수 없네.”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거 미리 말해 주면 어디 덧난단 말인가. 듣는 귀라곤 마부밖에 없고, 그 마부도 마차 안의 속닥거림까지 들을 순 없을 텐데.
홀로 대단한 임무라도 수행하는 듯 진지하기 짝이 없는 낯짝을 노려보던 카델이 짜증스레 시선을 돌렸다. 저 어색하고 과묵한 인간과 앞으로 세 시간은 더 마차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 관둬.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어차피 내가 더 강해.’
덜컹거리는 벽면에 머리를 기댄 카델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
마차가 멈췄을 때쯤엔 이미 초저녁이었다. 소린이 마부에게 값을 치르고 무언가를 당부할 동안, 카델은 비틀거리며 땅을 디뎠다.
‘일주일 내내 누워만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기분인데.’
당장이라도 침대로 달려가 엎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카델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소린은, 또 한 번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꺼내 들었다.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목적지가 나온다. 서두르지.”
“예……? 여기가 목적지 아니에요? 도착도 안 했는데 왜 마차를 돌려보냈어요?”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어서 따라오게.”
본인은 저런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 네 시간 넘게 마차를 탄 뒤에 30분을 더 걸어도 멀쩡하겠지. 분하다는 듯 이를 간 카델이 흐물거리는 몸을 끌고 소린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나무와 수풀이 빼곡한 숲을 가로질렀다. 인적이 전혀 없는 숲이었고, 보이는 짐승이라곤 다람쥐나 토끼, 사슴 같은 온순한 동물들뿐이었다. 근처에 별다른 마을도 없었으니.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사람 사는 곳은 아닐 것 같았다.
―라고 예상한 것이 무색하게.
“이곳이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넓은 초원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어느 오두막이었다. 길을 대신하듯 양쪽으로 듬성듬성 자리한 횃대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사람이 사는 곳인 듯했다.
대체 저 안에 누가 있길래 자신을 데려온 것일까. 소린을 일별했으나,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그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기를 포기한 카델이 묵묵히 걸음을 이어 갔다.
가까이서 본 오두막은 작고 소담했다. 제법 관리가 잘 된 흔적이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장작이나 농기구, 고기와 과일이 걸린 건조대 등.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이의 부지런함이 드러났다.
앞선 소린이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집 안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음에도 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깐 자리 비운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어떻게 하게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카델이 뭘 그렇게 대책이 없냐는 힐난의 눈빛을 보냈으나, 소린은 덤덤하기만 했다.
그리고 약 5분이 흐른 뒤. 카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한 뼘. 고작 한 뼘의 너비였다. 그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가 앞에 선 소린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누구십니까?”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 소린 살라모라고 하오.”
“호계 기사단이요…? 기사단의 대대장분이 여기는 왜…….”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이 날카롭게 그의 뒤를 살폈다. 소린에게 가려져 있던 카델이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내민 탓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카델의 얼굴이 걸린 순간.
“……와, 왔구나! 정말 왔어!”
벌컥 문이 열리며, 녹색 눈의 주인이 소린을 거칠게 밀쳐 냈다. 순순히 밀려난 소린을 대신해 정면으로 카델을 마주한 사내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잔뜩 감격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진 카델이 설명을 구하며 소린을 바라봄과 동시에, 사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카델을 덥석 끌어안았다.
“가, 갑자기 무슨…….”
“정말 왔구나. 정말 돌아왔어……. 네가 진짜 카델이었구나. 그래, 살아 있었던 거야.”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연신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뒤이어 집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카델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보다 앳돼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형, 이제 나가도 돼?”
남자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으므로, 소린이 대신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주었다.
“폐하께서 미리 알리셨던 대로 카델 라이토스를 데려왔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의 말에 문 앞에 있던 여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급히 닦아 낸 그녀가 뒤편에 있는 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뒤, 마음을 추스른 남자 또한 얼어붙은 카델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